[묵상글]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전봉석 2023. 1. 30. 05:09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잠언 23:26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편 63:3



주께 마음을 다하지 않을 때 재물과 여자와 술에 도취될 수밖에 없다. 오늘 잠언의 핵심은 간단하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 23:26).” 아니면 먼저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 다만 부자 되기에 애씀으로,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4).” 이는 허무하여서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5).”

둘째로는 유혹의 상징인 여자에 대하여 “대저 음녀는 깊은 구덩이요 이방 여인은 좁은 함정이라(27).” 이는 여러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묵상할수록 자신의 취약한 부분이 무엇인지, 그것을 파고드는 게 ‘깊은 구덩이’와 같은 ‘이방 여인’이다. 하나 더, 술 취함에 대하여는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20).” 탐욕과 탐식은 같이 가는 바퀴 축과 같아서 이와 더불어 사귈 때면 어떠한지 잠언이 되묻는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29).”

서로 어울려 외로움을 달래려 술 한 잔에 여자의 꾐과 고기를 즐겨하다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34-35).” 그 끝은 이내 ‘돛대 위에 누운 자 같다.’ 그러면서도 아니라 하는데 모든 죄와 추행과 악행이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30).”

하여 우리에게 잠언은 외친다.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10).” 곧 경계가 무너지면 모든 게 뒤죽박죽되어 죄를 죄로 여길 지각도 잃는다. 예수님은 이르시기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그럴듯한 위인들이 너무 많다. 시대는 전문가의 시절이 되었고 저들은 자신의 분야 외에는 바보다. 그럼에도 마치 모든 것을 아는 양 구는 것이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지혜란 두루 충만하여서 우리 신앙의 방해요소를 본능적으로 방어한다. 그리하여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8-39).” 저들이 어찌 그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21). 그러므로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시 49:6-9).

우리 인생의 허무한 것에 대하여 이보다 더 절실하게 들려주시는 말씀도 없겠다. 그저 안일하고 막연하여서 에이, 설마… 하는 동안에 세월은 흘러 나이 들고 병들어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때를 맞게 된다. 이에 악한 것들과의 교제를 끊는 것이 필요하다. 저들은 항상 악을 도모한다.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잠 6:17-19).” 그러다보면 우리도 모르게 그리 하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 5:10).” 다만,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
(141:4).

하여 시편은 간구한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3).

주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다. 다시 오늘 잠언의 일침,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26).” 우리가 지혜로 기울이지 않으면 당도할 수도 맛볼 수도 없는 세계,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63:3).

주의 인자하심에 대하여는 어찌 그 세계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누굴 위해 기도하고 누구의 사연을 듣다보면 저가 어찌 어려운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를 시편은,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119:70).

그 마음에 기름이 꼈다. 마음이 너무 살쪘다. 이를 보고 안타까워할 수 있는 것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71).

어떤 어려움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니 무조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그 문제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를 바라는 자리로가 더 시급하다. 성경은 엄히 이르신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나아가 우리에게 경계하게 하시는데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10:14).” 뭐라 하여 될 일이 아닌 것은 저들에게 백날 들려줘도 저들에겐 들을 귀가 없었다. 하여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18:17).” 이는 매우 두렵고도 분명하신 말씀이다.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고 하시는 것도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의 족적이 우리의 갈 길을 알게하기 때문이다.

그저 모든 게 다 새로운 것으로 변해가는 이 시대에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너희의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라 하니라(대하 15:7).” 서로가 진영논리로 다투고 같은 민족인 것도 오락가락하면서 “이 나라와 저 나라가 서로 치고 이 성읍이 저 성읍과 또한 그러하여 피차 상한 바 되었나니 이는 하나님이 여러 가지 고난으로 요란하게 하셨음이라(6).” 그리 두시는 하나님의 때가 다다랐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4-5).”

서로가 혼란스러운 때에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18).” 시대가 악한 가운데 우리의 간절함은 자연스럽게 모아진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63:1).

실제 다윗이 피해 다니며 지은 시이면서 동시에 오늘 우리의 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시편이기도 하다. 나로 주를 사모할 수 있게 하심이 귀하다.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
(143:5-6).

가끔은 그렇듯 창밖을 바라보며 시선을 놓고 여기까지 인도하심을 생각하곤 한다. 주를 멀리하고 살던 시절과 그런 나를 돌이켜 주 앞으로 서게 하신 이 놀라운 사실 앞에 더는 바랄 게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를 잠언의 시선으로 고쳐 말하면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나로 주를 사랑하게 하심으로 내가 주의 사랑을 더욱 바라게 하신다. 하여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그럴 수 있는, 그리하시는 주의 은혜 앞에서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63:2).

오늘 시편은 내가 할 일을 알게 한다. 그러할 때 튀오나오는 고백 하나,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3).

돌아보면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보다 귀하다. 일찍이 죽어 마땅했을 나의 날들이 아직도 선명한데,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그러하던 때에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4).

그리할 수 있게 된 것으로 감사하였다. 곧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그렇듯 내가 주를 사랑한 것이 아닌데 주가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것이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9).” 하시는 말씀 앞에서는 염치가 없어서도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러므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