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전봉석 2023. 2. 2. 04:47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잠언 26:16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시편 66:20

 

 

 

미련한 것과 게으른 것을 합해도 자신을 옳다 하는 죄가 더하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12)” 오늘 잠언은 이를 일깨우는 데 있어 고집불통의 미련과 맡은 일을 싫어하는 게으름은 한통속이란 사실을 일깨운다. 그런데 이 둘을 합친 것보다 더한 게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자인데, 도무지 이들은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이 와도 자신이 옳다고 한다. 이 모든 게 무질서함 때문이다. 즉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 오는 것 같으니라(1).” 이는 오늘 우리 사회의 단면이기도 하다.

 

주먹구구식으로 막무가내다. 괴이하고 비정상적인 일들이 버젓이 사회 지도층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죽어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레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서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에게 밝히 알게 하시리라(삼상 12:17).” 자신들이 개돼지 취급을 받으면서도 토한 것을 도로 먹고 싼 곳에 도로 눕는다.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사 1:23).” 죽어나는 것은 어려운 사람들이다.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암 2:7).” 그야말로 엔트로피법칙의 세계다. 질서가 무질서화 되는 것, 우리 스스로의 물리적 한계.

 

이를 교회가 엄정히 다스려야 한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19-20).” 이를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데 따른 엄중한 경고가 있다.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요삼 1:10).” 목사가 목회를 잃고 성도가 그 직분을 팽개치고 살 때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오늘 잠언의 미련한 자와 게으른 자의 특징은 그 마음에 악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 경고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말 4:1).” 상대적으로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2).” 이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 곧 때가 이르리니,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시 37:1-2).

 

이는 한 마디로 정의를 상실한 데서 온다. 오늘 잠언 2절이다.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실제 골리앗의 저주가 그러했고,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삼상 43-44).” 시므이의 저주도 어처구니가 없다.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삼하 16:7).” 그저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떠들어대고 함부로 행동하는 일이 무질서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럼에도 백성의 저주다.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렘 15:10).”

 

모든 질서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게으른 자가 돌이킬 줄 모르고 미련한 자가 여전히 자신을 고집하는 데서 사는 일이다. 그러니 달리 방도가 없다.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3).” 오늘 잠언은 직설적이다. 하여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4).” 행여 우리의 존영을 잃을까 함인데, “두렵건대 네 존영이 남에게 잃어버리게 되며 네 수한이 잔인한 자에게 빼앗기게 될까 하노라(5:9).” 자칫하다 한 순간이다. 덩달아 부화뇌동하기 십상이다. 사회가 그만큼 요지경이라 교회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인지. 부교역자나 사역자를 개인 사환 정도로 취급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실제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하니….

 

교회도 부익부빈익빈의 구조에 빨려들은 건 오래 전의 일인 것 같다. 귀부인들의 사교모임 같고, 서로 우아하게 고상을 떠는 관계가 된 지 오래다. 행여 누가 알까 하여 개인의 고난과 아픔은 가려지고 덮어졌다. 그런 자들이 교회에 오래 남을 수가 없다. 누구의 말과 어떤 이의 ‘사역열전’은 맹목적인 헌신을 강요하는 특정계층의 사유화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다. 대체 겁들이 없다.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를 일개 목사가 또는 투자(?)하여 개척한 이가 쥐락펴락하는 게 현실이고 보면 자본주의사회에서 그와 같은 현상이 기이한 것도 아닐 테지만… “이는 그들이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느 13:2).”

 

하긴 어제오늘의 일이겠나? 아담 이래로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11).” 오늘 잠언은 우리의 현상에 냉정하다. 그러니 몰라서들 그러는 것도 아니고,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15).” 어쩌겠나? 사는 데까지 그리 살아야 할밖에. 우린 일련의 사태를 목격할 때면 주 앞에 엎드린다.

 

그들은 내게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그들은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109:28).

 

결국은 자기와의 싸움인데 이 싸움이 또 혈과 육의 문제가 아니어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그런데 문제는 그 심각성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러려니 하는 게 ‘미련한 영혼’이고 그래도 된다고 여기는 게 ‘게으른 영혼’이다. 결국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롬 2:5).”

 

같은 일이 반복되어도 무감각해져간다는 게 심각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그리 여길 수 있도록 말씀만을 붙들고 씨름하는 일,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25).” 그리하여 무던하게 우리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알고,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3).” 누구는 여전히 사역지를 전전긍긍하며 그 맡겨지는 일에 회의하며 환멸을 느끼는데, 현실과 동떨어진 그 밀실과 같은 비화밀교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친구의 아들은 오후 여섯 시를 넘겨 수술에 들어갔고 생각보다 위증하였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다급하게 서두르신 하나님의 섭리에 새삼 놀라워하였다. 어떠하든지 우린 그 가운데서 주의 은혜를 마주한다. 나는 상심하는 어느 목사에게 이를 말해주고 싶었고, 일련의 일들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을 친구에게는 설명하였다. 주의 역사하심이란 참으로 기이하여서 ‘내 생각’이 앞설 때 닥치게 되는 일을 두고 나는 두려워하였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21).” 그 결과는 자신이 안고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 별 수 있겠나? 하나님께 100% 맡기는 사람과 미덥지가 않아 70%만 맡기로 사는 사람의 차이는 그 생활로 드러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그러니 맡기지 못하고 사는 만큼은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일이라, 곁에서도 어찌 도와줄 게 없다. 다만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어떤 일을 보고 스스로 근신하는 일이겠으니, 우린 자신을 자처하여 세상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즉 의외로 잠든 영혼이 그만큼 많고, 스스로 옳다 여기는 이가 허다하여서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16).” 오늘 잠언은 일갈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특이한 것은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22).” 우리로 그러한 배가 신이라는 것을 경고하시는데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9).”

 

자기 배 채우는 일이 신전과 같았던 삶에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하필 그 배에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벧후 1:8-9).” 나는 어떠한가? 되묻는 것 같다. 하여 오늘 시편도 결연하다.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시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교만하지 말지어다 (셀라)

(66:5-7).

 

오늘 우리의 이 모든 현상을 다 아시는 바,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렘 32:17).”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그렇다면 하나님으로 하실 수 있게 나를 내어드리는 일, 나의 주장을 날마다 거두는 삶. 그들을 결국을 알면 알수록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를 굳건하게 붙들고 나의 남은 길을 걸어갈 수 있다면….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9).

 

우리는 누구나 믿는 자이면 이런 하나님을 한두 번 이상은 만났다. 그렇다면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9).” 아무리 세상이 어떻다 해도,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12).

 

주가 함께 하신다. 곧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곧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부디 주를 바라며 그 끝의 영광을 사모하며 굳건하기를. 실의에 빠진 동기 사역자에게 또한 낙심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이게 그러니까 아무나 그리 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의 사랑이다. 긍휼이시며 놀라우신 섭리다. 부디 이를 붙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16-17).

 

이를 위해 오늘도 산다. 그러하니 부디,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

(18-19).

 

온전히 주만 바라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