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전봉석 2023. 2. 3. 05:22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잠언 27:19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편 67:7



서로 다를 게 없는 생이라, 좀 나은가 하고 들여다보면 똑같다. 이를 오늘 잠언으로 들으면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19).” 그러니 모두가 사는 게 그 하루가 전부라. 우린 내일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내일 일’은 하나님의 영역이지 사람의 욕심일 수 없다. 하여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1).” 하고 오늘 잠언은 말문을 열었다. 이를 시편으로 읽으면,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39:5).

그런 존재일 뿐인데도 우린 모두 과하다. 남은 생이 마치 보장된 것처럼 요구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3-14).” 그러므로 하루씩 오늘 하루에 충실한 삶이 복이었다. 아프면 아픈 대로 혹은 견딜만하면 견디면서 또는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자기 인생을 자랑하면 악취가 나고 남이 칭찬하면 향기가 된다. 예수님은 이를 가리켜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 5:41).” 그런데 우린 어떠한가 했더니,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42).” 곧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 하면서도 세상을 따르고 사느라 그저 전전긍긍하는 것이고 보면,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 10:18).” 우리 스스로 백날 자부하며 산들 소용이 없다. 주가 나를 칭찬하시는 삶,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17).”

그렇게 발전한 것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이와 같은 고백이 나는 요즘 참 다행이고 감사하다. 내가 내 것이 아닌 게 왜 이처럼 다행한 일인지, 내가 내 것으로 살 때는 그게 그처럼 무겁기만 하던 것이, 그래서 분 낼 일도 많아 하는 일마다 분에 차서 했던 게 많다. 그래서 오늘 잠언은 말하길,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3).” 아! 그래서였구나, 하는 어떤 이해가 생겨난다. 그땐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나 자신을 위하는 일도 분에 겨워 무겁기만 하더니 더는 그 무게가 내 몸에 짐으로 여겨지지가 않는다.

되는 일이 그러하여 그런가보다 하고 있을 뿐, 오직 주만 바란다는 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6).” 그러게, 스스로 내가 구하려 살던 것과는 다른 무게의 삶이다. 오늘 오라, 하시면 언제든 가려는 마음으로. 그리하여 잠언은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5).” 나는 이 홀가분함을 안다. 면책, 더는 책임이 내게 없다는 것의 자유함. 이에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레 19:17).” 굳이 더는 미워할 사람도 원망할 과거도 마음에 담아 둘 한(恨)도 없다. 이에 시인은,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0).

이를 삶으로 사랑하며 살게 되는 것이 평안이었다. 어떤 노여움이 내 안에 있으면 어떤 교훈도 듣지 않는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그러니 누굴 미워하거나 어떤 일에 여전히 마음이 붙들려 산다는 일은 참으로 고역이라. 이는 매우 미련한 일이어서 아무리 누가 뭐라 달래도,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아니하느니라(22).” 별 수 없다고 오늘 잠언도 고개를 젓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벗을 길은 주를 경외함으로 주께 맡겨 저의 말을 듣는 것,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가 예비되었나니 그것을 정하신 이가 누구인지 들을지니라(미 6:9).”

그런 삶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 이때 참된 친구란 아픈 책망도 마다하지 않는 일이겠다.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6).” 이를 잠언이 언급하는 까닭은 날이 갈수록 우린 ‘잦은 입맞춤’을 원하지 바른 소릴 바라지 않는다. 다 잘 될 거야, 하는 말보다 공허한 위로가 또 있을까? 나이가 들수록 곁에는 바른 소릴 해주는 사람이 없고, 내게도 그 말을 들을 귀가 점점 막히는 것 같다. 성경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살전 5:10-11).” 곧 예수를 생각하라는 것. 오늘을 더하여 살게 하신 이를 기리며 사는 것, 이를 예수님도 항상 기뻐하신다는 것.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삼 1:4).”

우리가 진리 안에 산다는 것을 오늘 잠언으로 들으면,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으리라(11).” 곧 주를 경외함이란 저에게 모두 맡기는 것, 주를 신뢰하는 일. ‘성전을 올라가는 노래’를 가지고 설교원고를 준비하면서 그 첫 걸음이 ‘회개’였다면 다음은 ‘신뢰’였다. 내가 주를 신뢰할 때 그 다음 걸음이 ‘예배’로 드러났다. 이는 시편 120편에서 121, 122편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예배는 그래서도 강요될 수 없다. 그 안에 자원하는 영으로 드려진다. 하나님도 이를 기다리실 뿐 억지로는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할 때 우린 비로소 기뻐한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122:1).

곧 내가 기뻐할 수 있는 권리. 예배란 삶의 기틀이었고 내딛는 보폭의 정도로 하나님과 나의 긴밀함의 간격이었다. 그래서 성경을 보는 이유가 그 결정, 하나님의 결정에 집중하게 하였다. 이어지는 찬송도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2-3).

잘 짜여진, 우리 발이 그의 성읍을 밟고 나아간다. 그러할 때,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6).

이와 같은 노래가 우리 삶에 있다는 것을 오늘 잠언으로 읽는다면,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잠 27:14).” 다시 말하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아는 것이 지혜로 얻는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이를 위해 이 모든 일을 시작하셨고 이루시고 결판을 내실 것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1:4).” 그리하여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23).”

나는 말씀으로 이어지는 데서 삶을 본다. 살다 그리 읽히는 삶을 듣는다. 설교원고를 쓰고, 이처럼 묵상을 글로 쓰면서 나는 내가 주목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말씀이 드러나길 바란다. 그 복된 비밀을 오늘 잠언은 오늘 우리 서로의 부대낌에서 들릴 수 있게 외친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17).” 대장장이를 연상하다가 서로 칼싸움을 연상하다가 그러한 연단으로 이뤄지는 실력을 꿈꾸게도 된다. 이와 같이 말씀을 음미하며 그 가운데서 주의 은혜를 맛보며 느끼는 일에 대하여,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그래서 오늘을 사는 동안 너, 나, 우리를 곁에 두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에 오늘 잠언은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에게 시중드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18).” 내가 속한 이 무리를 잘 건사하며 사는 일, 누가 어쩌네 뭐네 어려워할 게 아니라, 들춰보면 다 똑같다.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19).” 이렇듯 이어지는 잠언의 절제된 표현이 깊고 또 맛있다. 그렇게 하여 서로를 위하는 것은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22).” 사랑은 곧 자랑이다. 자랑은 칭찬이고, 칭찬은 찬송을 입안에 머금는 일이다. 그럴 때,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23).” 할 일이 어디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눅 19:17).” 언젠가 주가 이르실 말씀이 오늘 우리의 하루 속에 있었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6:37-38).” 말씀이 말씀으로 호흡하며 이어져 우리의 숨결이 되는 것이 예배였다. 하루하루가 예배일 수 있는 것은 주를 신뢰함으로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나아가는 발걸음이 닿을 천성이었다. 하여 오늘 잠언은 들려준다.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나니 산에서 꼴을 거둘 것이니라(25).” 주신 한 날의 꼴이 값지었다. 이를 시편으로 그대로 받아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67:1-2).

주의 은혜가 비추는 길, 그의 얼굴 빛을 비추어 주의 도를 딛고 걸을 수 있게 하시는,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느 9:31).” 이에 오늘이 있었고, 내가 살아 있었다. 곧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이를 자기 삶에서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7:1).

이와 같은 노래가 내 삶이 되게 하시기까지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2).” 이와 같은 은혜의 수혜자로 사는 것.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나는 가끔 이와 같은 말씀이 말씀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삶에서 내가 먹고, 마시고, 지지고 볶고 사는 이야기 가운데 함께 하심을 느낄 때가 있다. 숨을 쉬면서 굳이 몇 번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지 세어보지 않다가 어느 순간 헉, 하고 어떤 숨 막히는 일이 생길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숨. 그 생명의 연장에서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 놀라운 목적이 있는 삶을 다시금 알게 된다. 그러할 때,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5).

새삼 나의 찬송이 감사가 이 한 마디 고백이 얼마나 값진 일이었는지를,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어떻게 이런 고백이 찬송이 될 수 있었는지를 알겠다. 그렇게…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