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전봉석 2023. 2. 8. 04:44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도서 1:3-4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편 72:18-19



인생의 허무함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 지혜자는 말한다. 생의 허무함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는 것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저를 아는 것으로 이를 귀히 여길 수 있는 게 믿음이고, 이를 의로 여기신다는 데서 모든 게 달라진다.

곧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2-13).” 돌이켜 자신을 온전하게 돌아보고 인정하는 일,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0-11).” 이를 내게 알게 하시는 것,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19:105).

생을 다하는 동안 이 길을 잃지 않고 사는 게 복이었다. 우린 얼마나 자주 뒤를 돌아보곤 하는지, 주를 사랑하면서 여실히 알 것 같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 즉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우리로 이처럼 주를 바라게 하심을 따라, 역설적이게도 인생의 허무함을 직시할 수 있다. 오늘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2).” 하고 규정하고 있다. 생의 헛됨에 대하여는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20).” 우리의 경험이나 판단이나 신념이나 이상이 모두 헛된 것임을 인정하는 데서였다.

누구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세상을 가까이하며 사느라 헛되고 누구는 나름 주를 온전히 믿는다고 믿는데 그 믿음의 노력이 헛된 것을 본다. 결국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나는 가끔 인생이 참 길었다는 생각을 한다. 올해부터 만 나이로 한다고 해서 본래 나이에서 한두 살 어려졌다고 하는데, 나는 가끔 돌아보면 까마득하다. 청소년 시절의 나로서도 그렇고 더 이전과 그 이후의 날들도 왜 그처럼 멀게만 느껴지는지. 마치 수천 년 전의 이야기 같이 느껴지곤 한다. 하여 돌아보니 참 많이 지나쳤다. 전도자의 표현으로 하면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7:16-17).” 늘 ‘지나치게’ 그러했던 것 같다.

이를 두고 지혜는 말하길,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비로소 이 모든 것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더는 나이 들어 늙는다는 것을 방어하거나 대비하지 않고 돌아보아 무엇을 그리워하다 상념에 빠져들지도 않는다. 언제부터는 오늘뿐이어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39:5).

하는 시편을 인정하며 산다. 오죽하니 오늘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다는 말을 다섯 차례나 반복하여 거듭 되풀이하겠나? 그러면서도 우리가 생의 허무주의로 살지 않는 까닭은 “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렘 16:19).” 이를 인정할 수 있는 데서 전혀 다른 생을 살고 있는 것이었다. 곧 내가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일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이와 같은 말씀이 이제는 가장 든든하고 참 다행한 일이 되었다. 곧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요 14:31).” 여기는 어떠했는지,

하나님이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그들의 햇수를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셨도다
(78:33).

그것을 다 살고 살아서 알게 된 것과 이처럼 일찍이 알게 된 것은 그 차이가 크다.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를 인정하는 삶이란,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20).” 하여 더는 허무한 데 굴복하지 않으려고 ‘아버지’를 부르게 하시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15).” 이럴 수 있는 것, 그래도 되는 삶, 그리하여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 1:3-4).” 하는 오늘 전도서의 말에 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감사하고 감사하다.

모든 게 그러하여서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5-7).” 이어지는 모든 생의 순리 앞에서 겸손하여진다. 결국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8).” 다들 그런가 모르겠으나 나는 그러했고, 그러하여서 지난날들이 그러하였음을 돌아볼 때 너무 멀고 까마득하기만 하다. 나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 같지 않을 때 나는 기우뚱하며 진정 무엇이 진짜인지 모른 체 시치미 떼게 된다. 누군가 그리운 것 같다가도, 어느 시절을 내 생의 화양연화라 하였다가도 주춤하며 그것이 진정한 나였는지 분간이 안 된다.

성경은 묻는다. 그리고 답을 제시한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1-22).” 가령 이런 것일까? 장모와 저녁마다 성경공부를 하는데 저는 자꾸 옛날 기억을 더듬으며 한도 끝도 없는 이야기로 끌려가곤 한다. 같은 말은 반복되는데 나는 그 열매 없음을 인정하고 부끄러움으로 주 앞에 나아가기를…. 나는 자꾸 장차 우리가 누릴 소망을 전하고자 하는데도 저는 자꾸 지난날의 이야기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나는 이제 단호히 전하여야 할 것을 전할 뿐 저의 흘러간 이야기를 가로막는다.

그리움이란 마치 연막 같아서 기억은 가물거리면서도 진실을 왜곡한다. 하나님 없이 살았던 세월은 부끄러움뿐이라,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9-10).” 오늘 전도자의 말도 그런 것이다. 결국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13).” 그 모든 세월을 지나 이제야 주 앞에 서는 일이니,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
(39:11).

‘그때가 좋았지…’ 하는 말보다 허무한 것도 없겠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모든 나라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할지로다(대상 16:30-31).” 곧 나의 생에 그러했던 시절에도, 하나님을 부정하고 외면하며 살던 때에도 하나님의 통치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일,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39:5, 62:9).

고작 그런 것을 가지고 일생을 바동거리며 사는 꼴이었으니, 결국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18).” 하여 오늘 시편도 마침 솔로몬이 지은 것으로,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72:3).

오직 의, 우리의 이 한 가지 의로 인하여 사는 것이었으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그러니까 나는 점점 이와 같은 진리 앞에 안도한다. 즉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나의 이 다행함이 가당키나한 것인지는 감히 염치없을 뿐이지만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이제 이 고백이 내 것이 되었으니,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17).

오늘 시편이 나의 갈 길을 환히 밝혀주는 것 같다. 곧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18-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