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전도서 2:25-26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편 73:17, 28
살아보고 아는 삶보다 비통한 일이 또 있을까? 인생의 수고 자체가 허무뿐인 것을 오늘 지혜자는 통탄한다. 스스로 그 마음이 원하는 바를 다 행하며 살았는데 만족스러움이 없었다. 저는 절규한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10).” 하고 마음이 흡족할 줄 알았는데, 이 모든 게 바람을 잡은 격이라.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11).”
이와 같은 허무주의적인 진술에 당황스럽기만하다. 성경은 일러 우리 사람 모두에게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3).” 이에 오늘 본문은 우리로 우리의 실상을 바로 깨닫게 한다. 스스로에 대한 오해는 착각을 일으키고 착각은 더 큰 오류를 범하게 한다. 결국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1).” 이 간단한 진리를 깨닫는 데 있어 평생을 걸렸으니,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
…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시 39:11, 62:9).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우린 어찌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까?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 15:32).” 곧 죽음 너머의 생이 없다면 이생의 자랑이 무엇이겠나?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33-34).” 이와 같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하여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5-26).” 우리의 이해와 상식 너머의 세계를 소망하게 된다. 이를 성전에 들어갈 때 깨달았으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73:17, 28).
오늘 아삽의 시는 솔로몬의 깨달음과 그 길을 같이 한다. 우린 왜 성전으로 들어가야 할까? 그에 따른 실습과 같이 우린 교회로 모인다. 시편 122편을 준비하면서,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1).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일, 예배가 빠진 그리스인의 모임은 허사다. 예배가 없는 삶은 허무하다. 예배가 없는 공동체는 헛것이다. 이는 먼저 우리 성도의 삶의 틀이기 때문이다. 예배 없는 영원한 삶이란 상상할 수 없고, 예배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로 하나님 없이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일깨운다. 해서 예배는 우리가 사는 데 따른 어떤 결정을 할 때 하나님께 그 집중을 모은다. 이를 시인은,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2-3).
곧 예루살렘은 모여서 주를 예배하던 도시였다. 오늘의 교회이면서 장차 들어갈 하나님의 도성이다. 예배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가는 곳이다. 영혼의 허기와 목마름을 달랜다. 하여 우리는 잘 짜인 성읍과 같이 건설된다. 곧 흩어졌던 우리로 하나 되게 하심으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왜냐하면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21-22).” 오늘 우리가 교회에 모이고 교회와 함께 호흡하며 장차 이루게 될 완전하게 잘 짜인 도성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자라간다.
이는 명령이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이를 어거스틴은 말하여, ‘그리스도인이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할렐루야이다.’ 하고 외쳤다. 삶에 모든 게 예배가 서로가 예배가 되고 감사가 되고 주께 영광이 될 때 감각적이고 즉흥적이고 단회적인 이 세상의 유혹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래서 예배는 판단의 보좌이다.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5-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예배란 나의 주의를 말씀에 집중시킨다. 주의 보좌에서 이뤄지는 판단에 전념하게 한다. 그러므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 그때에 우리 모든 사람을 재판하실 것이다. 하면 그때에 우리의 대언자께서 보좌에 앉으셔서,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그리고 외쳐 평화와 안정을 선포하신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7-8).
오늘 아침 이와 같은 말씀과 어제 오후에 설교원고를 작성하면서 같이 나누었던 묵상이 하나로 이어지는 듯하다. 곧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9).
이를 오늘 전도서로 다시 보면,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26).” 이를 우리가 수고하여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해서도 우린 구한다. 찾고 두드린다. 그럴 때 주일 예배 후에도 우리의 일상은 예배로 채워지면서 평안과 형통을 찬양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이를 오늘 시편, 아삽의 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저는 미끄러질 뻔하였고 넘어질 뻔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73:1-2).
그 하나님을 알면서도 우린 번번이,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3).
저들을 부러워하고 질투할만하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4-5).
그런 저들을 보며 어찌 아니 부러울 수가 있겠나?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7, 9-11).
하나님을 예배할 줄도 모르고 하려하지도 않으면서 어쩜 그리도 일생을 평안하게 잘 사는 것인지.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12).
그러니 기운이 나겠나? 이런 모습만 보고 있으면,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13-14).
나름 신앙생활을 하고 예배를 사모하며 주를 바라며 사는 데 따른 일생의 수고가 헛됨이었으니,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15).
하마터면 저들과 같이 주를 모른다 하며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26-27).
결국은 예배가 있는 곳에 참 평안과 안식이 있었고, 이는 영원하여 무엇이 진정한 복인가를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28).
우리의 한 날이 예배로 가득 채워진다는 것은 그 안에 평안과 형통함이 함께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었다. 곧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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