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전봉석 2023. 5. 17. 05:05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그가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어두운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어둠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예레미야 13:15-16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시편 13:5-6

 

 

 

‘썩은 베 띠의 비유’로 유다의 교만과 타락의 실상을 보이신다. 하나님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명령을 세 번이나 내리신다. 베 띠를 허리에 띠고 물에 두지 말라는 것, 허리에 띤 베 띠를 유브라데로 가서 바위틈에 감추라는 것, 여러 날 후에 이를 취하라는 것. 그때마다 예레미야는 묻지 않는다. 그대로 따를 뿐이다. 예루살렘에서 유브라데까지는 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다. 이 먼 길을 저는 세 번씩이나 반복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당시 걸어서 왕복하였을…. 순종에는 순순히 복종하는 순복(順服)이다. 순할 순자로 온유함을 묵상하게 된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따뜻하고 부드러움이 쌓인 것으로 온유함은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는 것을 연상하게 된다. 가령 아브라함의 경우 기껏 이삭을 주시고 어느 정도 키웠을 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하실 때의 이 황당함까지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3).”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보이는 태도에서도, 새삼 우리의 여러 처한 상황에서도,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도 그래서이다.

 

신앙이란 더러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는 순복으로 몇 가지 더 묵상하게 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바울은 진술하기를,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하나로 놓았고, 이는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로 받으면서 이를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하는 어떤 분명한 지조가 있었다. 오늘 나의 처지와 어떤 상황을 고려하기보다 한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경주자 같이 예수께 받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기를 생명조차 아낌없이 한다는 소린데….

 

이는 우리 주님이 보이신 길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신 바로 이 순복이 죄에서 구별된 자로 살려는 우리 신앙의 지속성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오늘 베 띠를 허리에 두르고 그것을 물에 적시지 말라하심을 되새기게 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 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적시지 말라 하시기로(렘 13:1).” 물은 죄로 물든 것을 연상하게 된다. 물은 적시는 것이며 더러움을 씻기도 하지만 묻히기도 한다. 뻣뻣한 베의 형질을 구겨지게 하고 부드러워지게도 한다. 허리에 두르고 수 일 동안 먼 길을 갈 때 비도 내리고 흙먼지도 묻었을 것인데, 이를 그대로 두라 하심은 선민 이스라엘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의미도 있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 죄에 오염된 유다의 부패와 타락을 보게 한다. 더하여 우리 자신의 죄성이 어떠한가를 연상하게도 한다. 회개가 더해지지 않는 삶이란 배에 두른 베 띠 같이 그 실상이 어떠한가를 돌아볼 수 있겠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자신을 늘 깨끗하게 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다. 우리의 회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당시 그러한 죄의 실상을 말씀하시는 데 있어 베 띠를 두고 전달하신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 22:14).”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곧 오늘 본문에서 이를 유브라데 강가 바위틈에 숨기고 오라 하심을 생각하면, 습하거나 금세 젖어서 썩어 쓸모없게 될 것인데… 당시 유브라데는 바벨론의 중심을 흐르는 두 줄기 강이었다. 하나님의 선민이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타락과 부패의 온상인 바벨론의 한 유역에 두어진 꼴이라니!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1-2).”

 

죄는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갈라놓고, 그 얼굴을 가리어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한다. 오늘 본문 10절,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 같이 되리라.” 결국 더는 쓸모없어 어둔 곳에 버려져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인데,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5-6).”

 

말씀이 말씀으로 이어져 오늘의 우리로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결국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이는 당연한 진리다.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사 13:11-12).” 오늘 우리 안에 그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사람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욥 23:11-12).” 부디 나의 남은 날들이 그러할 수 있기를. 이에 오늘 주시는 말씀은 촉구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렘 13:15).”

 

그러기에는 너무 분주한 나날이다. 할 일도 많고 관심 둘 일도 끝이 없다. 누구의 어떤 이야기가 또는 말로 옮겨오기 어려운 상황이 때로는 답답하기만 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그러함으로 들을 수 있고, 세심히 기울일 수 있다. 그러하여서 겸손할 수 있다. 더러는 어떤 아픔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 오히려 주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마음을 두게 한다. 그러할 수 있도록 누굴 위해 기도하고, 어떤 이의 일을 두고 혼자 생각이 많기도 하다. 어쩌면 오늘 이 말씀은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원론적인 것으로 마땅한 이치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게 그렇듯 어려운 일이 된 것은 다른 데 우선하게 하는 마음의 분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어지는 경고의 말씀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그가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어두운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어둠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렘 13:16).”

 

더는 그럴 수 없는 때가 오기 전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들어갈 수 있을 때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라 하실 때 들어갈 수 있는 게 복이다. 반드시 얼마 후에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그땐 안 하는 게 아니라 하려 해도 못한다. 곧 우리 모두에게 있을 일이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 11:28).” 결국은 아무 때나 언제든지 그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말씀으로 산다는 것, 이는 곧 닥칠 일에 대한 준비이면서 대비이고 기대이면서 두려운 일이다. 성경은 일러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22-2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그러므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 21:3).”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5).” 예수님의 이와 같은 기도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어찌하여 오늘의 나로 여기에 두셨는지를 알게 한다. 이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4).” 그리하신 일일진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순종하심에 따라 오늘 우리로도 살게 하려하심이겠다. 왜?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며 여호와의 양 떼가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렘 13:17).”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생기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네 몫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25).” 부디 그와 같지 않기를.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시 13:3-4).

 

결국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그렇다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내가 나를 앎으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오늘도 이처럼 말씀 앞에 앉히신 것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여,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