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전봉석 2023. 5. 22. 05:4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예레미야 18:3-4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편 18:1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토기장이의 토기 굽는 과정을 목도한다. 토기장이는 터진 진흙을 이겨 뭉개고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다시 만든다. 이는 어그러지고 터진 선민을 하나님은 뭉개고 다시 빚으실 것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이가 이를 알게 하심이다. 하나님은 흥하게도 망하게도 하실 수 있다. 곧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알게 한다.

 

그렇게 북이스라엘은 B. 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남유다는 B. C. 586년에 바벨론에 의에 각각 멸망당한다.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는데 에스라, 느헤미야의 때에 남은 자들로 귀환하여 거룩한 공동체를 다시 구성하게 하신다.

 

우린 주의 손에 붙들린 진흙과 같다. 주가 원하시는 토기로 이겨 뭉개어 빚으신다. 그 과정이 때론 잔인하고 가혹하다. 다 버려진 듯 전혀 쓸모없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사 43:15).” 우리 하나님의 위용을 우리는 잘 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16-17).”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시고 가능할 거라 여긴 것을 전혀 불가능한 일로 처리하시도 한다. 하나,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시 95:7-8).

 

이는 성도로부터 목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자의 숙명이기도 하다. 동생은 몇 개의 선택의 기로에서 스스로 더 나은 쪽을 선택하기보다 주가 흐르게 하시는 대로 자신을 놓아두었다. 우린 늘 그렇게 기도하나 실제 어떤 일을 추구하고 선택하는 데 있어 ‘주의 일’에서보다 ‘자신의 일’에서 판단하기 일쑤다. 나도 어쩌면 저가 어찌할까? 하고 내놓은 서너 가지 방식을 두고 가장 좋을, 저의 삶에 더 유익이 될 것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선택은 다른 것이다. 우리가 제비를 뽑는 것 같지만 그 결국은 하나님이 이끄신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1).”

 

우린 ‘어떤 일’을 두고 이를 다스리는 데 있어 ‘무엇으로’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무엇으로는 ‘믿음으로’이고, 어떤 일에는 ‘순종함으로’이다. 앞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8-10).”

 

부르심으로 끝인 게 아니다. 믿음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믿음으로 또한 약속의 땅에 거류해야 한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우린 우리의 바람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이를 겪을수록 느낀다. 느낄수록 확실해진다. 나는 주가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는 표현이 참으로 좋다. 무의식적으로 눈꺼풀이 먼저 깜빡하며 눈동자를 지킴 같이, 또는 눈을 부릅뜨고 주가 나를 지키심 같이,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17:8-9).

 

비록 당장 그 어떤 문제로 모든 게 끝장난 것 같지만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 64:8).” 오늘 시편은 찬양한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18:30).

 

그러므로,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31).

 

우리는 겪음으로 안다. 들어서 아는 게 전부가 아니다. 느낌으로 아는 것도 한계가 있다. 실제 나의 삶 속에서,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143:8).

 

늘 나의 심정은 이와 같으나 현실은 여러 형태로 나를 들쑤시기도 하는 것이어서 그때에는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 하는 순종이 나를 지킨다. 우리로 바른 길을 가게 한다. 결심도 어떤 각오로도 아니고,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묻고,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하실 때 스스로의 판단을 구하지 않고,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행 22:10).” 때론 이와 같은 불확실한, 모호하고 막연한 게 진리다.

 

주가 더하시는 마음은 말씀과 기도로 확신을 얻는다. 누구의 조언이나 저가 가는 길로 따라 나서는 것이 아니라,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리하실 것이다(왕상 9:6-7). 그리하여 “이 성전이 높을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우리로서는 난감하나 그와 같은 난감함으로 주 앞에 엎드리게 된다(8). 그러해야 한다.

 

회개 없이 회복은 없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 18:6).” 우리가 주의 손에 있다는 것이 전에는 어렵고 거북하고 부담스러워 거부하고 싶은 일이었으나 이제는 그러해서 안심이다.

 

하루는 딸애가 말했다. 자신은 사역자를 원하지 않고 사모가 되지 않겠다고 기도하며 사람을 가려 사귀려하는데 하나님은 자꾸 그리로 연결하시는 것 같다. 나는 그 심정을 안다.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를 때, 언제나 하나님의 생각이 옳으시다! 가끔 어머니는 자신이 사모로 일생을 살았다는 것으로 영광을 주께 올린다. 다시 산다 해도 사모로 살겠다고 하실 정도이다. 곁에서 그 지긋지긋한 여정을 지켜본 터라, 그와 같은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란 것을 안다. 솔직히 목사야 자신의 부르심에 어쩔 수 없이? 또는 합당하게 그 길을 간다고 하지만 얼결에 사모가 된 이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아내도 가끔 지청구를 내며 하는 말이 누가 사모가 된다고 했어? 한다. 하긴 우리가 연애 때 나는 목사가 되지 않을 것이라 약속을 하고 결혼을 한 터라…. 나는 복이라 하나 아내는 더러 이 길이 고단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이혼을 할 수도 아내 말마따나 버릴 수도 없는 길이라…….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나로 오늘 여기에 있게 하신 이가 말씀하심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6-7).” 그래서인지 나는 가끔 나의 젊은 동기 사역자들의 생활을 부러워하면서 또한 위로한다. 일찍이 주 앞에 승복하는 게 복이었다. 나는 이를 너무 오래도록 거절하고 살았다. 주는 누구신다?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렘 18:14).” 이를 바로 잡으신다. “무릇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들의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하게 하여 그들의 땅으로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의 머리를 흔들리라(15-16).” 주의 자녀로 주에게서 떠난 자의 삶은 기구하다. 둘째아들 탕자의 비유가 그러했고 나의 적잖은 시간으로도 이를 뼈저리게 느꼈다. 돌면 도는 동안 그 길이 맞는 것 같고 같이 동행하는 이들이 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으나 이는 일시적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누운 곳은 돼지우리였고 내가 주워 삼키고 있는 것은 돼지가 먹는 주엄열매였다. 결국 죄는 죄로 인도할 뿐이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18:1).

 

오늘 다윗의 고백이 나의 것이 된 것으로 나는 더할 나위 없다. 아주 좋고 완전하다.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갈 마음이 없다. 그 고통과 인고의 시절을 보내고 노년에 이르러서도 사모로 살았던 날들을 축복으로 여기는 어머니의 마음이 진심인 것을 안다. 구원의 은총은 체험한 자의 찬송으로 증거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이에,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71:8).

 

나의 남은 생이 그러하기를. 내가 아는 내 곁의 모든 이들의 입에 고이는 말이 모두 그러하기를 그러하여서,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18:30).

 

하는 고백이 저절로 입가에 머물기를. 오늘 시편은 그 세계에서 우리에게 묻는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31).

 

이때에 우리의 대답이 모두 그러하였으면,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2).

 

그러므로,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3).

 

이와 같은 분명한 확신이 없다면 어떤 객쩍은 소리로 주 앞에 설 수 있을까?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사 43:2-3).” 그러므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50:15).

 

이 확실하고 분명하고 진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으로,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이는 그리 고백하고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자의 것이다. 하여 욥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나는 그래서 동생의 어떤 결정에 지지와 감사로 기도와 응원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나는 그래서 딸애의 희한한 인도하심에 찬미한다. 아내의 이런저런 지청구에도 감사가 깃들었음을 안다. 결국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아, 이 놀라운! 신기하고 기이하고 희한하고 알 수 없는, 그러나 분명하고 확실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10).” 그리하여,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18:27-29).

 

이는,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3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