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 20:9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시편 20:7
앞서 토기장이의 비유와 깨어진 옹기에 대한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바 있다. 이를 듣고 성전 총감독 제사장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가두고 목에 고랑을 씌운다. 저를 때리고 구금한 후 예루살렘은 안전하게 보전될 것이라 거짓 예언을 한다. 바스훌은 자신의 권력을 가지고 예레미야의 증거를 묵살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대신한다.
바스훌이란 이름의 뜻은 ‘자유를 가져오다’ 하는 것인데 예레미야는 저의 이름 대신 ‘사방에 두려움이 되다’ 하는 의미의 마골밋사빕이라 부른다.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서 풀어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3).”
이를 보면서 주의 일을 하고 주의 뜻대로 산다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한다. 성도로 바른 삶을 산다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 협착한 길로 가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즉 오늘에도 바스훌과 같이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지위나 권력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와전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는 정치꾼 같은 목회자들도 허다하다.
오늘 1절에서 언급된 임멜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정비된 24반차의 제사장 서열에서 16반차에 뽑힌 자였다. “열다섯째는 빌가요 열여섯째는 임멜이요(대상 24:14).” 곧 바스훌은 그 집안 대대로 명문가의 제사장 서열에 위치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명망 있고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이들은 선줄로 생각하는 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곧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레미야를 바스훌은 박해하고 조롱하였다. 이와 같이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말씀으로 온전하고자 할 때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기는 쉽지 않다.
이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앞서 우리의 다짐을 요구한다. 몸소 그 길을 가신 이가 ‘나를 따르라.’ 하고 선언하신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이는 우리가 주를 온전히 바라고 따르는 삶이란 그렇듯 견고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멀리하는 길이다.
예레미야는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4).” 이를 들으며 저들의 심경은 어땠을까?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또 이 성읍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중품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5).” 거의 저주와 같은 말에 저들이 흥분할만하다. 그럼에도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 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하셨느니라(6).”
예레미야는 용감하였고 오직 주만 의지하고 외쳤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저들의 조롱이었고 박해뿐이었다. 이를 예레미야는 주께 고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7-8).” 이와 같은 무시와 업신여김을 받는 것에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여 우리 안에 말씀대로 살다 실의와 낙심에 빠질 때가 종종 있다.
하여,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9).”
이와 같은 경험은 경건히 주를 따를 때 당면하는 내면적 갈등이다. 굳이 이 일을 꼭 해야 하나, 싶을 때. 내가 저의 일에 끼어들듯 아는 체 하고 먼저 연락하고 안부를 묻고 주의 길을 바로 가는가? 하고 관심을 둘 때 열에 아홉은 꺼려한다. 그저 일상적이고 가벼운 관심 정도이지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타복하였던가보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실제 형제의 연합은 거의 어렵다. 처음 저들은 가인가 아벨이었다. 그 결국은 살인으로 끝장났다.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도 서로는 결국 반목하고 두고두고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모세와 그의 형제, 아론과 미리암은 또 어떠했나? 하물며 예수님의 형제들도 더디 믿었고 주의 사역을 알지 못했다. 혈연적인 관계에서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경우도 그러하다. 교단은 수도 없이 갈라지고 와해되어 반목하고 씨름하기 일쑤다. 교회 안에서도 목사와 장로 사이가 갈리고 각각 저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나뉘기 일쑤다. 그럼에서 서로 하나 되는 일, 이는 선하고 아름답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우리로는 할 수 없으나 성령으로는 하나될 수 있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행 5:12-13).” 먼저는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 시인은 ‘연합하여 동거함’으로 표현한다. 함께 한다는 일은 두 번째로 서로에게 제사장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2).
보배로운 기름은 하나님의 권위요 성령의 임재다. 머리에 부어지는 것은 부르심인 소명을 넘어 보내심인 사명으로 이어져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다. 일상이 곧 투신이다. 성령의 강에 뛰어드는 삶이어야 한다. 서로에게는 아론의 역할, 곧 말씀을 선포하는 제사장직이 필요하다. 저의 어떤 말을 듣고, 그의 상황과 처한 현실에 대하여 또는 겪고 있는 어려움을 두고 말씀으로 찾아가야 한다. 우린 누구나 주의 길을 가다 확신을 잃는다. 낙심이 오기도 한다. 이때 물론 주께 기도하고 말씀으로 그 중심을 붙들어야 하지만 우리 곁에 두신 ‘아론’을 찾아야 한다. 저가 전하여주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 말씀이 기름부음과 같이 머리부터 수염을 적시고 옷깃까지 흘러내리게 해야 한다. 이는 서로가 서로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연합이란 어느 한 쪽의 굴종이 아니다. 또 하나는,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3a)
헐몬은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레바논 산맥으로 해발 270미터에 가깝도록 둘러쳐져 있다. 높은 산에는 기온 차가 커서 이슬이 흠뻑 젖는다. 스미듯 느낌도 없던 이슬은 흘러 시온 곧 예루살렘에까지 내림 같다. 이는 우리 성도 개개인의 특성이며 독특하고 기이하고 신비하고 다채로운 간증이다. 하나님을 만난 개별적인 고백들이며 저마다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이슬 같다. 한 방울의 이슬은 느낌도 없을 정도로 티도 안 나지만, 별 것 아닌 듯 하나하나가 모며 이슬은 대지를 흠뻑 적신다. 가령 새벽 낚시를 할 때 파라솔을 꼭 펼치고 해야 하는데, 종종 이를 잊고 있다 아침에 보면 낚시 가방이며 온 몸이 다 젖어있는 것에 놀란다.
헐몬의 이슬 같이 우리 개개인의 시온은 젖어서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다. 우리 모두 남다른 성령의 인도하심을 체험하고 간증하고 지니고 산다. 이를 서로 나눌 때 아멘, 하고 화답할 수 있는 것은 서로의 상황이나 정도는 다르다 해도 저절로 눈물이 흐르고 감격이 이어지는 경험을 한다. 교회 앞에서 종종 간증을 하는 까닭도 자신만의 독특한 경험을 나눔으로 개개인의 은총을 되새기게 하려 함이다. 그저 누구의 어떤 유별난 체험을 떠받들듯 하려는 게 아니다. 하여 시인은,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3b)
‘거기서’ 곧 개별적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여호와의 명령을 듣는다. 곧 우리의 영생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에 풍성한 자는 아론과 같이 선포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무명 교인에서부터 담임목사에 이르기까지 전하여져야 한다. 그러할 때 주의 영광은 확장된다. 친밀한 사귐에는 ‘명령’과 같은 강제가 있는데, 이는 스스로도 불가항력적인 일이다.
마치 오늘 예레미야가 경험하는 고통스러우면서도 신기하고 놀라운 경험,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즉 육신으로의 나는 싫다하나 거부하면 할수록 내 안을 괴롭게 하는 어떤 역사와 같은, 그리하여 사무엘은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삼상 12:23).” 이에 굳건하였고, 바울 또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하여,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결국 이는 영적 싸움이다. 자신의 개인적인 내적 갈등이 아니다. 나 역시 종종 드는 생각은 ‘이 길이 아닌가?’ 하고 ‘그만할까?’ 하는 마음에 시달리기도 한다. 혹은 ‘다른 곳으로 옮겨 달리 해야 하나?’ 싶은 마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때에 내 곁에서 아론과 같이 말씀으로 선포하며, 성령의 임재로 나에게까지 강하게 붙들고 가는 누구의 사연이 있다. 어떤 이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던한 삶이 있다. 순간 나를 부끄럽게 하고 담금질하는 것을 느낀다. 오늘 시인은,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20:7).
우리다. 혼자가 아니다. 형제의 연합하여 동거함이다. 이는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오늘 예레미야는 그 와중에 선포한다.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13).”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어떠한데, 그리하여 실의에 빠져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나의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당신이 득남하였다 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무너뜨리시고 후회하지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가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니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머니를 내 무덤이 되지 않게 하셨으며 그의 배가 부른 채로 항상 있지 않게 하신 까닭이로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14-18).” 한탄하면서 할 소린 아닌 것 같은데…. 다시 들어보자.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13).”
어쩜 이것이 우리가 가진 신앙의 이율배반적이고 불가항력적이고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
(20:2-3).
그럴 수 있는 우리의 위력은,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4).
선포한다. 선포하여 알게 되는 사실,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5).
이와 같이 기이하고 놀라운,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1-22).” 하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6).
이는 영생이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47, 51).”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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