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전봉석 2023. 6. 7. 05:24

 

너희가 돌이켜 내 이름을 더럽히고 각기 놓아 그들의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너희에게 복종시켜 너희의 노비로 삼았도다

예레미야 34:16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34:18

 

 

 

필연적인 심판과 무조건적인 은혜가 동시에 전파된다. 구원과 회복에 앞서 징계와 심판은 따른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기에 앞서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에게 이를 예언하고 그의 운명을 알게 한다.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의 제 4차 침략으로 시드기야 9년 B. C. 588년 10월의 일이다. 이후 586년 4월 9일에 예루살렘은 함락당하였다. 당시 시드기야는 도망하다 붙잡혀서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가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왕하 25:7).”

 

이 끔찍한 한 치 앞의 일을 두고 예레미야는 여러 번 예언하였으나 저와 그의 고관들은 듣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의 경고와 그의 뜻은 여러 차례 다각도로 전달되었고 이내 이를 거부하고 불순종한 결과이다. 그런 거 보면 기회는 한 번이 아니다. 오늘에도 또한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이 어디까지 우리 생활에 전달되고 있는지,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하여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10:12).” 이와 같은 말씀이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새겨질 때 경고의 다급한 음성이 우릴 붙든다.

 

그러나 다들 사는 게 부산하고 또한 오늘이 어제 같은 날들이 이어지면서 내일도 설마, 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다. 우린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내 삶에 또한 내 곁의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예수님도 이르시기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마 28:10).” 하여 제자들을 중심으로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6-27).”

 

이를 듣고, 보고, 느끼고, 깨달아 삶의 지경을 개간하여야 한다.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어떤 푸념의 말이나 부정적인 언행을 삼가 주를 의식하고 사모하여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이를 실질적으로 경험하며 사는 삶이 복이 있다. 이런저런 상황에서 파국인 줄 알았던 일에서 놓여나서 하나님이 어찌 그렇듯 몰아세우셨는지를 나중에 알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새삼 더 크고 놀랍고 감사할 따름이다. 하여 오늘 시편의 세계에서,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34:18).

 

이를 지은 다윗은 그 시점이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는 점에서 놀랍다. 그런 와중에 저는,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1).

 

하는 이 놀라운 신앙을 보유하고 있었으니,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51:17).

 

저는 이를 삶에서 실질적으로 느끼고 포함하여 살았음으로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를 알고 있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겔 18:30).” 곧 늘 회개하며 사는 삶. 주를 더욱 바라고 의지하며 사는 날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삶이란 단호한 의지와 결단으로 그 생활이 바뀌는 일이다. 어린 다니엘의 경우 이후 포로로 끌려갔으나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단 1:8-9).”

 

실제 그 생활에서 이를 경험하고 사는 데는 단호한 입장이 필요하다. 타협할 수 없는 굳은 걸음이 뒤따른다. 제자들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아는 만큼 각오하고, 각오한 대로 이를 받아들이고 이행한다. 그럴 수 있는 힘이 회개하는 행동에서 마음의 변화로 수반된다. 오늘 본문 8절에도 보면, “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한 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고 자유를 선포한 후에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곧 “그 계약은 사람마다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고 그의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 그러했던 이들이 하루 이틀 지나면서 마음이 바뀌어서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11).” 그러니 사람 마음 그리 믿을 게 못 된다. 각오로는 해결이 안 된다. 결단으로 책장을 넘길 수 없다.

 

왜 바울이 자기 몸을 쳐 복종시켰는지를,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행동하지 않으면 결단은 하나마나다. 회개는 실행에 있지 의식에 있지 않다. 하여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돌아오라 하실 때 그에 따르는 용기는 행동으로다.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겔 18:31).”

 

아이들과 수업할 때 가끔 들려주곤 하였던 우화가운데 ‘개구리 다섯 마리’ 이야기가 있다. 저들 앞에 어떤 위험이 닥쳐오고 있다. 다섯 마리 개구리 가운데 두 마리는 이를 알았다. 위험을 느꼈고, 인식하고 생각하였다. 피해야 한다! 하지만 결국 그 다섯 마리의 개구리는 결과가 똑같았다. 이유는 생각한 개구리나 생각도 없던 개구리나 행동하지 않으면 결국은 같다는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말하였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는 마치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17, 26).” 저의 이 단호한 설교가 오늘 새삼 무섭게 들린다.

 

늘 생각은 많다. 나름 각오도 숱하게 한다. 그러다 채 하루도 못돼 언제 그랬냐는 듯 나는 자주 무너진다. 그래서도 이 새벽, 말씀 앞에 앉히는 일만은 죽기 살기로 하는 것이다. 이것만이라도 잃지 않으려 몸을 쳐 복종시킨다. 늘 기도하기를 묵상하는 이 시간의 반의반만이라도 하루 동안 살게 하소서, 하고 기도한다. 돌아서기 무섭게 어떤 불안이 또는 염려가 엄습한다. 누구에게 위로할 때의 나와 실제 나를 대하는 나는 다르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한결같을 수 없는 나 자신의 마음을 두고 나는 늘 주께 빈다. 빌고 돌아서기 무섭게 또 그 짓이라 해도 다시 또, 또 빈다. 하여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남들이 다 어떻다 해도, 오직 말씀으로, 말씀으로만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3-15).” 두려워할 줄 아는 게 경외함이다. 존경은 공경과 따름이 동시에 같이 가는 것이다. 하여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나는 오늘 시드기야와 그의 고관들의 태도를 보며, 코 앞에 닥친 일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우리의 한계를 생각한다. 그에 반해 오늘 다윗의 신앙이 새삼 위대한 것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로 그 첫 구절이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4:1-2).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가만히 보면 저는 거의 평생을 쫓기며 살았고 간절함으로 주를 바라고 느끼고 동행하며 의지하였던 광야의 생활이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3).

 

하는 저의 권유가 크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하겠다. 지금의 내 삶이 어떠하든지 진정한 신앙이란 진실한 신뢰로써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하는. 그러기까지 무던한 행함과 또한 반복되는 일상으로 단련되어야 한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 그럴 수 있는 것으로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21).” 복종, 그 실천이 오늘을 견딘다. 할 때,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6, 9).

 

경외함은 마음의 다짐이 아니라 실천이었다. 고로,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12-14).

 

모든 게 실제적으로 사는 일에서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 11:8).” 그렇듯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10).” 이는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그리하여 묵묵히 주신 날을 사는 것이었다. 그러할 때,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8).

 

이로써 나의 오늘도 열 가지 좋은 마음보다 한 가지 실천으로, 무던하게 또한 주를 의뢰함으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그러할 때,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19-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