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전봉석 2023. 6. 9. 05:17

 

유다 가문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 한 모든 재난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리니 그리하면 내가 그 악과 죄를 용서하리라 하시니라

예레미야 36:3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시편 36:7

 

 

 

레갑 족속의 신실함과 유다의 불순종이 대조된 후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아 그에게 전하여 주시는 말씀을 바룩으로 하여금 받아적게 한다. 바룩이 이 두루마리를 전하였으나 여호야김은 이를 찢어 소각한다. 이를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읽고 돌이켜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아 구원에 이른다. 곧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데서 구원이 회개에 따른 것임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말씀을 읽고 쓰고 나는 묵상하면서 듣는다.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신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관계, 늘 보는 사이에 더욱 할 말이 많은 것처럼 하나님 앞에 아뢰고 듣고 하는 말의 깊이가 다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마치 날마다 씻는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청결한 것 같이 우리 영혼을 돌아보아 자신의 날들을 청결하게 하는 것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과 영혼으로였다. 보면 환경은 우리를 옭아맬 수 있으나 말씀은 우리 영혼을 자유로이 드나들며 활개 친다. 하나님 앞에 한 마음으로 회개할 때, 므낫세의 간구도 들으시었다.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대하 33:12-13).”

 

나는 매이나 나는 풀려난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주의 말씀을 상고하고 주의하여 생활을 돌아보고 누구를 두고 주께 중보하는 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6:19-20).” 때론 이와 같은 역설적인 말씀 앞에 주저한다. 쇠사슬에 매인 삶을 바라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그로 인한 역동적인 신앙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빌 1:13-14).”

 

가령 딸애가 지난 공휴일에 나의 매임을 두고, 그 육신의 약함을 염려하며 이러저런 못하는 것을 따져 묻듯 확인하였다. 보기에 답답해서 그러려니 하고 일일이 답하였다. 한편으론 미안하고 속상하였으나 한편으론 그것이 내게 은혜인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젊은 날 내가 어떠했는지, 오늘에 이르러 서로 같은 것을 공유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자로 사는 데 있어 그와 같은 대화가 남다르게 여겨졌다. 즉 어떤 매임이 우리로 주를 더욱 간절히 바라게 한다. 친구의 오늘도 결국은 저의 위기감 때문이란 것을 안다. 눈이 다시 침침해지기 시작하고 몸도 예전 같지 않으면서 저는 더 성경을 알고자 하여 ‘쉬운성경’부터 해서 여러 권의 성경을 섭렵하고 있다.

 

저마다의 어려움이 저로 주를 바라게 한다. 그 사모함이 절박하여 더러는 우상적으로 다가오지만 이에 ‘상한 영혼이라.’ 주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이 저를 용납하신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 7:9).” 이를 알고 사모할수록 오늘의 어떤 매임 혹은 어려움이 도리어 복이라는 사실을 증언하게 된다. 하여,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37:25-26).

 

주를 알면 의인이 되기를 사모한다. 사모하는 만큼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안다. 아는 만큼 주의 은혜를 바란다. 곧 “네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니라(겔 3:9).” 말씀을 바라고 이를 전하는 데 있어 어떤 어려움이 오히려 더욱 단단하게 그 신앙을 붙든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

 

오늘 본문에서도 여호야김이 말씀을 찢어 불태우고 예레미야와 바룩을 찾으나 하나님이 저들을 숨기셨다. “왕이 … 명령하여 서기관 바룩과 선지자 예레미야를 잡으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셨더라(렘 36:26).” 우리가 위기에 강할 수 있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이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13-14).”

 

우린 누구나 주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이때에 우리로서는 두려운 일이나 동시에 우리에게는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그러니까 우리로 죄가 없다 할 수 없으나 그 죄는 이미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하심을 받은 것이다. 이에 우리로서는 은혜이면서 동시에 날마다 드릴 회개이기도 하다.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1-12).”

 

때론 이 일을 상상하면 낯 뜨겁고 부끄러워 어디 숨고만 싶다. 내가 아는 하나님 앞에서의 허물과 죄를 주가 덮으셨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슥 3:3).” 저는 나다. 그러한 나를 사탄이 정죄할 때에 도리어 사탄을 책망하신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2).” 그리고 주는 명하신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4).” 나아가 그럴 자격도 없는 내게 정결한 관을 씌우신다.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5).”

 

이 놀라운 심판의 현장을 앞서 상상하고 묵상할 때 오늘의 나로 내가 매인 것을 두고 씨름할 게 무엇이겠나?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하여 나는 나의 약함을 사랑한다. 딸애가 이 말을 어찌 들을지, 답답해할지 그저 안쓰러워할지 알 수 없으나 저 또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는 안다. 그처럼 사모는 되지 않겠다고 하던 아이가 목사와 사귀면서 저의 선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먼저 이야기할 때까지 나는 묻지 않고 보기만 한다.

 

하나님이 나 같은 자로도 돌이켜 기어이 주의 종으로 삼으셨는데… 나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이라.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 3:10-11).” 이 단순명료한 진리 앞에서 나는 의인이기를 소망하나 은혜가 아니면 악인의 길에서 벗아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인정함으로 육신의 이런저런 어려움이 도리어 주를 자라게 한다. 이에 예레미야는 다시 두루마리를 썼다. “이에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에게 주매 그가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책의 모든 말을 예레미야가 전하는 대로 기록하고 그 외에도 그 같은 말을 많이 더 하였더라(렘 36:32).” 더는 세상이 저지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36:1-2).

 

오늘 시편은 준비하였던 것처럼 그와 같은 일에 있어 악함의 속성을 진술하고 있다. 하여 “이로 말미암아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사 5:24).” 익이 악한 이유는 말씀을 버린 것이다. 내가 주를 멀리하며 살 때 가장 멀리하였던 것이 말씀이었다. 성경이 하찮았다. 아버지와 형제들의 전하는 말씀이 듣기 싫었다. 그땐 참 가족들과 모이거나 어떤 대화를 나누는 게 그처럼 꺼렸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오늘에 이르러 주와 멀어진 어떤 이가 이런저런 주변 이야기는 즐겨하나 말씀으로 가까이 가려하면 신경증적으로 거부감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도 그럴 것이 말씀이 있는 곳에 죄가 같이 할 수 없다. 저들은 자긍할 뿐이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이라

그는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

(3-4).

 

그랬던 나로서는 할 말이 없으면서 동시에 들려주고 싶은 말이 참 많다. 나는 나름 논리적이었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그와 같은 이들을 사귀었고 저마다 사회에서 자기 역할에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믿는다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잘 되고 잘 살았다. 때론 더 도덕적이고 근면하였다. 그래서 나의 편견은 불교인은 대체로 인자하고, 천주교인들은 선하다. 하나 저들은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 그것을 악으로 여길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7).

 

나로 오늘에 이르러 돌아볼 때 이와 같은 주께 송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 하나님은,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8).” 또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하여,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