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전봉석 2023. 6. 5. 03:55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예레미야 32:38-4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2:1

 

 

 

유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 10년 곧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되기 직전인 B. C. 587년의 일이다. 주의 뜻을 전하여 예레미야는 왕궁 시위대 뜰에 갇혔다. 바벨론에 대항하지 말고 항복하라는 말에 시드기야가 예레미야를 가두었다. 한데 그 시점에 의외로 예리미야는 뜻하지 않게 아나돗의 밭을 산다. 땅을 사고 파는 일에 엄격하였던 당시로 보아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벨론에 포위된 상태였고,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다가 갇혀 있는 신세였다. 사촌 하나멜의 아나돗 밭을 매입할 수밖에 없는 예레미야는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은 십칠 세겔을 주고 공식적으로 이를 취한다.

 

이는 상징적인 일이다. 진리를 증거하다 억울하게 갇혔다. 588년 10월에 예루살렘은 포위당한 상태다. 587년에 잠시 바벨론은 포위를 푼다. 그 상황에 예레미야는 뜻하지 않게 자기 분깃의 땅을 사게 된 것이다. 우린 주의 일을 하다 뜻하지 않는 곤경에 처한다. 이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이와 같은 일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예레미야는 주의 뜻을 전하였을 뿐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더니 유다 왕 시드기야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였느냐 하고 그를 가두었음이었더라(5).” 이러한 때에 우리는 아득해진다. 주의 일을 감당한다는 것이 뜻하지 않은 일을 겪는 게 된다. 이를 성경은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다만 주께 맡긴다는 것,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곧 믿음에 있어 행함이란 순종의 다른 말로 말씀이 원하시는 바를 이행하는 일이겠다. 그때는 ‘억지로라도’ 곧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이 순종이겠다. 불신앙은 순종할 수 없는 이유를 천 가지는 가지고 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영국의 희극작가인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생각났다. 저는 희극인답게 자신의 묘비명에 ‘내 이럴 줄 알았다.’ 하고 새겼다. 유다의 오늘이 그럴 줄 알았다. 이를 앞서 말하였던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혔다. 우리는 이를 이성적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위의 것’을 생각하면 다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우리로서는 주의 뜻을 분변하기 위해 영성을 단련해야 한다.

 

오늘 본문 8절에,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예레미야는 갇힌 상황에서도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저는 모든 판단과 결정에 있어 주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데 오늘 우리는 어떤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2-3).” 일련의 이런저런 상황을 파악해야 하고, 주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때의 기술은 경건이다. 평소 다진 경건의 연습이 발휘된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8).” ‘자신을 연단하라’ 하심이 바울이 항상 자기 몸을 쳐 복종시켰다는 말씀과 연결이 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일종의 이런 게 아닐까? 친구가 오늘 이른 새벽에 저수지로 온다고 하였다. 성경공부를 운운하던 터라 나는 어쩔까 망설였다. 평소보다 두 시간 일찍 눈을 뜨고 교회로 올라왔다. 이처럼 말씀을 먼저 끌어다 묵상을 하고 글을 쓴다. 어떤 의무감이 아니라 앞서 ‘먼저와 나중’을 고려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오늘의 모든 상황과 여건은 그 자체로 징조다. 하나님이 보이시는 계시다.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의 일들이 텍스트가 된다. 나치 시절 독일의 본 회퍼 목사의 말처럼 우리 믿는 자는 한 손에 성경을 한 손에 신문을 들고 살아야 한다. 정세를 살펴 소소한 일에서도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기준을 둬야 한다.

 

오늘 예레미야도 자신과 유다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15).” 하고 “내가 매매 증서를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넘겨 준 뒤에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16).” 우린 이와 같이 모든 일에서 주의 뜻을 분변하고 그 처한 상황을 잘 분별해야 한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2-14).”

 

나에게 있어 이른 아침 말씀 앞에 나를 먼저 세우는 일은 주어진 하루에서 주의 뜻을 온전히 구하기 위함이다. 어쩌면 강박적이고 습관적인 일이라 해도 나는 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예수님도 다니엘도 습관을 좇아 이른 아침에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묵상하시고 기도하였다. 때론 억지로라도 내가 이 시간을 고수하는 까닭은 나의 하루 중에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경건의 시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곧 어떤 불안이 엄습할 것이고, 산만한 일들이 달려들듯 여러 소식이 들러붙을 것이다. 또한 누군가는 나의 이 미천한 글을 같이 읽고 묵상의 시간을 갖는다. 그게 한 사람이라 해도 나의 이야기 속에 하나님의 이야기가, 나의 성경 읽기 가운데 저의 하나님과 마주하는 시간이기를 나는 기도한다. 결코 주목 받는 생이 되길 바라지는 않으나 말씀을 전하는 일이나 나타내는 일에서 나는 더욱 신중하고 싶다.

 

이는 하나님의 인정하는 일로 오늘 17-25절까지 예레미야는 그 와중에 토지 매매를 마치고 기도한다. 저의 첫 부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이가 누구신지를 알고, 오늘의 처지와 유다의 처한 상황을 두고 슬퍼한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17).” 저의 탄식은 유다를 향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처지에서의 토지 매입은 선민의 회복을 믿기 때문이다. 믿음은 더러 이율배반적인 행함으로 탄식을 수반한다. 그럼에도 “주는 은혜를 천만인에게 베푸시며 아버지의 죄악을 그 후손의 품에 갚으시오니 크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이시요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이다(18).” 저는 주의 은혜와 구속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주의 뜻 안에서 계획하신 바, “주는 책략에 크시며 하시는 일에 능하시며 인류의 모든 길을 주목하시며 그의 길과 그의 행위의 열매대로 보응하시나이다(19).”

 

곧,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시 24:1-2).

 

이와 같은 찬미는 아무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이를 붙들고 살고 싶다. 그러한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인정한다. 솔직히 나에게 이 시간이 귀한 것은, 이 시간 이렇게 말씀을 의지하는 게 없다면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데 따른 기준이 모호해진다. 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주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 주를 사랑하고 바란다고 해서 저절로 실천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수시로 드는 생각에서부터 여러 일상의 소소한 일들 앞에서 나는 번번이 갈등하고 또한 주께도 흔들린다. 나야 늘 변변하지 못하나 그런 내게 누군가 고민을 말한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말을 내어놓는다. 나는 종종 피할 수 없다. 저의 사연이 나까지 회의하고 갈등하게 한다. 같이 느끼는 어떤 아픔, 이를 우린 무엇으로 견디고 이겨낼 것인가?

 

가령 동생이 폐에 물이 차서 응급으로 입원했다. 연휴가 낀 때라 주중에나 결과가 나온다고 한다. 통화하며 말로 위로하다 괜한 서러움도 인다. 15년을 필리핀 사역으로 보냈는데, 그 끝이 말도 안 되게 한 아이의 억지로 고소를 당해 그 마무리가 씁쓸하다. 당장 송사로 엮였으니 동생은 가정에서 가족들과 필리핀 때 같이 자랐던 아이들 한둘과 줌으로 연결하여 예배를 드린다. 어디 사역지를 구하기가 어렵다. 생활도 어렵다. 동네 공장에 취업해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막일 가까운 일을 한다. 그 처와 아이도 당장 공장에 나가 일을 한다. 하나님, 이건 좀… 하는 마음이 솔직히 내 안에는 있다. 오히려 당사자인 동생은 덤덤한데 나는 엉성하여 주께 입을 삐쭉거린다. 하긴 꼼짝 못하고 붙들려 있는 것 같은 나의 목회현장도 한심하다. 소속된 교단에서 가을 교단 총회를 앞두고 참석 여부를 확인하고는 그럼 위임장을 바랐다. 나는 기꺼이 두 장의 내 권리를 대신하여 위임했다.

 

이런저런 일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누구 일, 어떤 이의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글로 옮길 수 없다. 위해 기도하는데 하나도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 같다. 그런데도 저는 번번이 어려울 때면 거침없이 쏟아내듯 기도를 부탁한다. 무슨 막장 드라마보다 엉망진창인 저의 처지를 두고 나는 하나님께 골을 부리기도 한다. 문득 드는 생각은 내가 언제 누구 일로 이처럼 속상해본 적이 있던가? 할 때면 내 자신이 가소로울 지경이다. 내 앞가림도 못하면서 누굴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어쩌면 그러니까 어쩌면 예레미야의 심정도 조금은 이렇지 않았을까? 또는 늘 내 기억의 은인으로 있는 지 장로님에 대해 생각할 때면 본인도 소경에 문둥병자로 저 여수 외딴 정착촌에 이름 없이 사는 촌로(村老)에 지나지 않으면서 누굴 위해 기도하고, 병실을 돌며 암송한 말씀을 들려주면서 가끔은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그런데 성경에서 돌아오는 답은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나의 약한 데서 그 능력이 나게 하신다니! 하여 우리를 질그릇으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4:7).” 우리 신앙의 이 아이러니한 역사를 나는 이제 조금 알겠다. 알면 알수록 사랑하게 된다.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 32:26-27).”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산다는 것은 최소한 이 정도의 말씀 정도는 붙들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친구가 성경공부를 했으면 한다. 부산한 생활로 시간을 내기 어렵다. 토요일에 어찌 시간을 낸다더니 아팠던 모양이다. 링거를 맞고 좀 나았다며 낚시 겸 저수지로 온다고 하는 것을 마다할 수 없었다. 덕분에 이른 새벽 낚시를 가야하고, 해서 평소보다 일찍 교회로 올라왔던 것이고… “보라 내가 노여움과 분함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들여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여 안전히 살게 할 것이라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하는 이와 같은 말씀을 같이 듣게 된 것이다. 나는 말씀을 앞에 두고 다음 말씀에 소망을 가진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37-41).”

 

이 귀한 언약의 말씀이 우리 삶에도 유효하다. 유효하여서 이를 믿고 의지함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주를 신뢰한다. 비록 ‘허물과 죄로 죽었던’ 저희나 나나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이 놀라운 은혜가 우리 삶에 발판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우린 대체 무엇으로 신앙을 유지하고 믿음을 지키며 살 것인가? 우리에겐 말씀이 있다. 나는 이 말씀을 죽기까지 우선하여 바라고 싶다. 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백성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린 것 같이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렘 32:42).” 아!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32:1).

 

오늘 시편의 첫 어절이 나를 두고 하신 말씀으로 귀하다. 결국 나도 예외일 수 없어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성경의 핵심이고 복음의 진수다. 하여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성경을 한 마디로 축약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주의 뜻이다. 하면,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5).

 

이와 같은 고백이 은혜와 비례한다. 받은 바 은혜가 남다르고 크게 여겨지는 까닭은, 내 허물과 죄를 내가 알기 때문이다. 이를 주 앞에 내어놓기도 민망할 정도인데,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7).

 

조금은 염치 없고 민망하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고개를 들 수 없으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이에,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8,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