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전봉석 2023. 9. 10. 04:37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호 12:5-6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시 121:5-7

 

 

 

모든 사연이 우리로 주의 도우심을 찾게 한다. 찾을 때 주는 우리의 영혼을 지키신다. 우리 스스로는 ‘바람을 먹으며’ 사는 일처럼 공허하고 헛될 뿐이다. 오늘 1절,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종일토록 거짓과 포학을 더하여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이는 현실적으로 좋은 수 같아서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는 실리를 취하는 듯하나 ‘바람’은 비었고 공허하여서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요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호 8:7).” 즉 하나님을 의뢰하는 대신 이방을 신뢰하고 도움을 구하려 함을 뜻한다.

 

‘동풍을 따라 가서’ 곧 동쪽의 아라비아 광야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무역을 도모하는 것일 테지만, “동풍이 그를 들어올리리니 그는 사라질 것이며 그의 처소에서 그를 몰아내리라(욥 27:21).” 이는 비유이지만 실제였다.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기를 동풍으로 함 같이 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렘 18:17).” 이는 우리 믿는 자의 ‘위험한 행동’ 곧 앗수르나 애굽 등과 동맹을 맺어 구원을 의뢰하는 것을 뜻한다.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앗수르를 의지하여 도움을 청하고 예물을 보낸 사실은 이미 여러 번이다.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호 5:13).” 우리가 어떤 일에 처할 때, 그 난감함을 주께 아뢰고 의지하기보다 무슨 수를 쓰든지 안 믿는 자와 같이 해결하려고만 드는 모든 노력은 이와 같다. 저들이 ‘기름을 애굽에 보내’었다 하는 것은 감람나무 열매에서 추출되는 올리브유를 뜻한다. 이는 주께 드리는 제사 때 필요한 것이다.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2:1-2).”

 

또한 일상에 필요한 식용이었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 17:12).” 또한 구급의약품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6).” 또한 향품으로도 쓰였다. “드고아에 사람을 보내 거기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상주가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 같이 하고(삼하 14:2).” 이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이처럼 팔레스틴 지역에서 나는 귀한 특산품으로 이스라엘은 예배와 일상에서 꼭 필요한 게 기름이었다. 그런데 이를 애굽에 보낸 것은 그들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한 예물로 썼다는 것이다. 마치 살다보니 다급하여 예배도 작파하고, 일상의 모든 문제를 남들처럼 해결하고자, 문제해결만을 위해 정작 쓰여야 할 마음이 일상이 이처럼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호 7:11).”

 

이것만으로도 저들의 삶이 얼마나 하나님 외의 다른 것으로 도움을 얻고 구하려 하였는가를 알겠다. 우리 주는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5-6).” 여호와는 ‘스스로 계시는 분’이란 뜻으로, 영원 전부터 자존하는 하나님이심을 알려준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언약하신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기념 칭호이다. ‘여호와 그의 기념 칭호’라 하심은 아브라함 이래 이스라엘과 언약하신 하나님으로서 영원히 기억해야 할 분이심을 나타낸다.

 

그에게 우린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 인애와 정의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이시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 7:9).” 우리 삶의 표준으로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호 6:4).” 그러니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7-8).”

 

사느라 사는 동안 산다고 살면서 우린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저버리고 스스로의 살 궁리로 우리만의 ‘앗수르’나 ‘애굽’을 향해 도움을 구하며 살고 있는지.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결국 우리 영혼이 사는 길은,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이러한 몸에 밴 삶의 습관을 버려야 한다. 사람을 의지하여 저에게 할 말 못할 말 다 하면서 정작 하나님께 아뢰며 기도하기는 싫어하고, 유튜브니 뭐니 온갖 것은 뒤져 살피며 도움을 찾으면서 정작 말씀은 멀리하고 사는….

 

그러할 때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로 온전히 주를 바라기를 원하신다는 사실. 분명 당신을 찾는 자를 만나주시고 복을 베푸실 것을 약속하는,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호 12:5).” 이를 나타내심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성경에서 이를 가장 현명하게 돌이킨 자는 탕자였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20-22).” 이 장면보다 더 확실한 게 또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나를 돌이켜 돌아오게 하신 아버지. 그때는 그게 억지 같아서 얼마나 서럽고 억울하기만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 나로 하여금 그 고집을 꺾고 아버지를 기억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고 또 참고 마음 조리며 지켜보고 계셨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기다리심을 이제는 압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저는 오히려 죄송하기만 하여, ‘아버지.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저를 다시 무조건적으로 받아주셨습니다.

 

곧 우리가 아버지께로 돌아온다고 하는 것은,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6).” 오직 우린 회개와 자복으로 모든 지위가 다시 복원되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6-17).” 이는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눅 3:8-9).” 이미 더는 돌이키려 해도 돌이킬 수 없는 때가 이르렀으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곧 온전히 신앙을 간직하고 산다는 일은 삶이 무탈하고 형통하길 바라며 사는 것이 아니었다. ‘범사에, 어떠하여도’ 주를 의뢰하는 것으로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곧 서로가 처한 어려움을 덤덤하니 서로 토설함으로 주께 아뢰는 효과가 같은 것이 서로를 위한 중보기도였다. 흔히 우리의 기도는 자신의 문제와 씨름하는 링 위의 선수 같이 맹렬한 일이겠으나 중보기도란 저의 힘듦과 고통을 같이 등에 이고 주 앞에 엎드림으로 기도의 효과는 배가 된다. 누가 말하길 요즘은 주변에 기도할 제목이 너무 많아서 정작 자기문제는 아뢸 시간이 없다고 했다. 저는 아이들 학교에 데려다주고 교회를 찾아 개인기도실에 들어가 기도수첩을 보고 아뢰어야 할 이들의 사연을 주께 고한다. 그러다 남을 위해 울기도하다, 출근길이 늦어지기도 한다.

 

그러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배우는 게 많다. 누구의 기도 사연을 적어두고 혹시 몰라 이를 펼치고 앉아 주께 아뢰는 일은, 정작 자신이 직면한 일을 고하지 못한 것 같지만 주가 더 잘 아신다. 그런 처지에서도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 우리가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하는 오늘 말씀의 실현이다(호 12:6). 항상 주를 바란다는 것, 늘 자기 일에 함몰되고 자기문제로만 주께 아뢰는 사람은 곁을 볼 새가 없다. 한 번쯤은 ‘좀 어떠하세요?’ 하고 물을만하고, 전에 나누었던 어려움에 대하여 되물을 법도 한데, 종종 보면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늘 자기 문제로만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상대의 어려움은 귓등으로도 듣지 못한다. 그러니 매일 기도가 ‘비나이다’ 하는 기복적이다. 심지어 굳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될 것 같은, 누가 도와주기만 하여 해결될 수만 있다면 ‘앗수르’면 어떻고 ‘애굽’이면 또 어떻겠나 싶다. 그러니 저들에게 ‘기름’을 보내고 별의 별짓을 다한다. 기독교 내의 기복신앙은 우상숭배와 같다.

 

오늘 시편이 맞춤하니 이를 뒷받침하듯,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121:1-2).

 

이 짧은 구절 안에 우리의 모든 실상이 그려져 있는 것 같다. 어떤 일이 터졌을 때, 우린 당황스러워하며 주변을 먼저 살펴 눈을 들어 산을 본다. 어디 도움을 줄 수 있는 산 같은 존재를 찾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럴 때 성경은 우릴 불러 세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

 

아버지. 나는 이제 이 한 구절의 말씀이 주는 저를 향하신 복을 잘 압니다.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맞습니다, 아버지.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하고 물으실 때 저로서는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나를 돕는 방패시요 내 영광의 칼이셨습니다. 어디서 내세울 것 없이 부족한 자로 살았던 것 같으나 그때마다 ‘나의 대적이 내게 복종하였다는 것을 압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이 놀라운, 참으로 신기하고 기이한 마음은 내가 누구의 어려움을 듣고 저를 위로할 때 나도 모르게 나의 아버지 하나님을 자랑하고 있었다. 저들 보기에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아, 이 놀라운!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처음 사람 아담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셨고 오늘의 나의 하나님으로,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모든 이에게 동일하심으로 저를 위한 기도가 나의 기도였음을 다 아십니다.

 

곧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7-18).” 그러므로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9).” 하여,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28:7).

 

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3, 5-6).

 

이 놀라운, 참으로 신기하고 기이한, 나를 향하신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하실 때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121: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