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 11:8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시 120:1
우리는 언약으로 맺어진 사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내 아들”이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하나님이 그들을 출애굽 시키신 사실을 말한다. 또한 “내 아들”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애굽’에서 나오셔서(마 2:13-23) 온전한 삶을 사시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이루셨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둘째 아들의 후예이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하나이지만(창 48:8-22), 에브라임 출신 여호수아 이후 이스라엘 내에서 큰 위치를 차지했다. 에브라임은 곧 이스라엘 전체를 일컫는다. 오늘 말씀,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여기서 ‘아드마’와 ‘스보임’은 각각 ‘붉은 흙’과 ‘영양(羚羊)’을 뜻하며, 소돔과 고모라 근처에 있는 성읍이다(창 10:19, 14:2, 8).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멸망당했다.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에는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격분으로 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물을 것이요(신 29:23).” 여기서 이 성읍들이 언급된 것은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심판받아 마땅하지만 멸망되지는 않을 것임을 역설하기 위함이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한다. 오늘 1절,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이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저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심을 상기시킨다. 이는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다. 내가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고 벗하며 살았는지, 그러느라 하나님을 멀리하고 살았는지, 살았다하나 죽었던 나를 강권하심으로 이끌어 오늘에 주의 자녀로 살게 하심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한다. 곧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이로써,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시 120:1-2).
우리의 회개는 일차적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 놀라우신 사랑의 역사를 알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이 놀라운 사실 앞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인생은 죄에 가까워진다. 오늘 2절,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이러한 삶이 어떤 것인지, 내가 어찌 살았는지를 돌아보면 ‘죄인 중에 괴수’라. 그런 나를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잠 16:6).” 이 간단명료한 원리는 나와 죄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확신을 간직하고 사는 게 복일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긍휼’이란 ‘라함’이라 하여,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삼하 24:14).” 곧 주의 긍휼하심을 아는 자는 이를 바란다.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느 9:31).” 하여 시인들은 구하였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
여호와여 주의 긍휼이 많으오니
주의 규례들에 따라
나를 살리소서
(40:11, 119:156).
이에 우리에게서 주의 평강을 빼면 우린 무엇으로 살까? 주의 인자하심과 사랑하심이 긍휼이다.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용서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단 9:9).” 그래서 부모가 자식에 대해 가지는 사랑과 같이,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03:13-14).
곧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이는 곧 우리가 ‘숨 쉬다, 동정하다, 위로하다’와 같이 오늘 9절,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는 주의 긍휼하심 앞에 감사하고 송구할 따름이다.
여기서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하실 때, 하나님은 거짓하거나 변개(變改)치 아니하시고, 한번 선택하시고 목적하셨으면 끝까지 이루시는 분임을 우리는 성경으로 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하실 때 안도하고,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삼상 15:29).” 이와 같은 말씀에서 다시 또 마음을 가다듬으며,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말 3:6).” 하실 때 주 앞에 엎드린다.
곧,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 12:24).”
이에,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9:10-11).
어려울 때 또는 고통 중에 있을 때 주의 긍휼하심이 더욱 선명하다. 전날에 어깨에 맞은 무슨 주사 때문인지, 어제는 온 몸이 아파서 쩔쩔맸다. 오죽하니 정신과에서 약을 받아오면서 며칠 입원하여 진통제와 안정제로 단 며칠만이라도 평안할 수 있겠나? 하고 묻기도 했다. 그러니 내 입에서는 저절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나왔고, 나의 고달픔을 아뢰는 기도가 비명소리 같이 들렸다. 누구에게 말을 한들 고통은 나눌 수 없고 줄어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은 이 모든 게 또한 지나간다. 모든 게 끝이 있다. 끙, 하고 돌아누워 잠자리에 들었다가 이처럼 또 아침에 새 힘을 얻고 주 앞에 나올 수 있으니 감사하였다. 고통은 단순하게 주를 부르게 한다. 군더더기가 없다. 덧붙여 무얼 바라고 추구할 게 없다. 고통은 주의 나라를 사모하게 한다. 평안한 쉼을 소망한다. 이로써 평강의 열매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11-13).”
그러할 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주가 내게 더하시는 이 날들이 유익이다. 오늘 이스라엘의 곁길이 나의 지난날을 주 앞에 회개하게 한다. 하나님 없이 추구하며 살았던 날들의 고역을 이제는 안다. 그땐 그게 다 그런 것인 줄 알았다. 다들 그러고 사는 것이겠지, 하고 여겼던 것이 어리석었다. 충분히 고통 중에도 주를 바랄 수 있고, 그에 따른 간절함이 주를 더욱 사모하게 하는 거였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2-33).” 그러므로,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9-39).” 하여 오늘 시편에서, 우리의 영원한 성전 곧 천성을 향해 가는 노래에서 그 첫 마디는 회개였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120:1-2).
하나님은 우리를 평안 가운데 두시기보다 환난 가운데 두실 때가 많다. 이는, “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그러므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즉 고통의 역설은 더욱 주를 바랄 수 있는 능력이다. 아니면 다른 무엇으로 이를 모면하며 살까? 저마다 그래서도 악착 같이 잘들 사는 것 같지만 들추고 보면 말 못 할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저마다 고통을 은폐하고 살 뿐이다.
성경의 사람들은 어째서 고통을 축복과 연관 지어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하는 바울의 진술을 토대로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 하였던 수제자 베드로의 진술에서도 보이고,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119:67, 71).
이 놀라운 고난의 역설을 나는 소망한다. 고로,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18:6).
마치 환난과 고통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직통으로 연결하는 통로 같다. 그렇게 하여 나의 회개는 이루어져서,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120:3-5).
오늘 시편의 이와 같은 비탄으로 애통해하며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기도하고 찬송하는 원리가 고통의 숨은 뜻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118:5).
결국은 주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나의 의지로 견딜 것인가 할 때,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120:6-7).
애굽, 곧 세상이 주는 것은 싸움뿐이었다. 하여 성경은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사 52:11).” 그리하라고, 이에 ‘고난 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가 있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102:1-2).
하면,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140: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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