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막 2:21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55:22
우리가 주와 함께 하면서 주를 숨기고 살 수는 없다. 예수님은 오늘 가버나움의 한 집, 아마도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이었을 곳으로 들어가셨다.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1).” 마치 빛을 숨기고 소금의 맛을 가릴 수 없는 것과 같다. 곧 우리가 예수와 함께한다는 것은 마치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5).” 예수 믿는 자로 살면서 이를 곁에 있는 사람이 알지 못한다면 오히려 이 일이 이상한 일이다. 이와 같이 예수가 우리가 함께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이는 당연하였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8-9).”
예배가 끝나고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 누가 안 믿는 자들과 친구하고 어울리는 일에 아무런 지장이 없고 저들 또한 알지 못한다는 말에 의아하였다. 반대로 누군 자꾸 예수를 말하고 권하여 밉상이 된다는 소리에 그 또한 이해가 갔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음식냄새가 나고 생선 장수나 고짓집 사람에게서는 비린내가 나듯,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서는 예수냄새가 난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누군 이를 싫어하고 누군 이에서 생명을 맡는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16).” 이를 우리가 임의로 꾸미거나 지울 수 없듯이 서로 감당할 수 없어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17).”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그렇듯 예수가 계시는 곳은 금세 알려졌다. 모이는 이들은 간절히 주를 바란다. 가령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3-4).” 우리의 어떤 간절함, 저마다의 ‘전도서’를 깨닫는 순간 물불 가릴 게 없어진다. 전도서를 본문으로 하여 설교준비를 하고 거의 대부분의 말씀 준비로 전도서를 관통하고 있는데, 모든 영광을 누린 솔로몬이 왜 그와 같은 염세적인 내용의 글을 썼을까? 하는 데서 늘 한참씩 턱을 괴고 앉게 된다.
곧 우리에게는 어느 순간 ‘전도서’와 같은 절벽에 서게 된다. 모든 게 헛되고 헛됨으로 믿고 뛰어내리든가, 자포자기하고 죽기를 바라던가… 하는 어떤 절박함에서 선택해야 한다. 오죽하니 중풍병자와 그 주변인들이 저를 들추어지고 예수께로 왔을까? 다른 사람이 너무 많으니 돌아갈 일이 아니었다. 더는 물러설 곳에 없는 지점이 저마다의 ‘전도서’다. 저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구멍을 뚫었다. 예수 앞으로 내려놓을 수 있는 길이 거기뿐이다. 그야말로 미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지점의 ‘전도서’에서 저들은 그 일을 감행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5).” 모두를 놀라게 한 반전, ‘네 죄 사람을 받았다니!’
우린 ‘전도서’ 앞에서 헛됨으로 치를 떨며 그 문제에 매몰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우리의 문제를 들추시고 그 근본의 해결책으로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신다. 영혼의 문제가 아니면 무엇이 대체 문제일 수 있을까? 먹고 사는 일도 중요하고 하루치의 고민과 고통으로 일그러져 사는 일에도 이골이 났다. 지겹고 지친다. 우리는 저마다의 ‘전도서’를 쓰듯 유서 같은 간절함을 품에 지니고 산다. 어떨 때는 육신의 질병으로 고달파서 혹은 항상 돈에 쪼들리며 치를 떨다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환멸을 느끼다 품에 손을 넣고 유서를 만지듯 자신의 ‘전도서’에 한 줄 더한다. 사는 게 지옥이라… 그러할 때에 우리로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게 죄다. 죄는 영혼의 문제를 비켜서게 한다. 사는 게 지겨워서일까?
나는 아이가 전화를 받지 않아 애가 닳았다. 아이엄마에게 전화를 하여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줄까? 차라리 죽으시라,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예수의 냄새는커녕 썩은 생의 고름냄새로 진동을 할 뿐이어서. 차라리 없는 이만 못한 게, 하면 기독교 시설에라도 들어가서 믿는 자들과 어울려 살던가? 그저 하루살이 인생처럼 언제까지 자기 한탄만 하고 썩어갈 것인지?! 나는 혼자 끙끙거리며 괜히 속상한 마음에 별 생각을 다했다. 결국 저이는 영혼에는 관심이 없다. 몸도 마음도 힘에 겨울 따름이나 주일 아침, 아픈 아들이 늦잠을 자면 깨워 교회를 보내야지! 자신이 더는 교회와 상관없이 살고 예수는 안중에 없이 산다 해도, 누구처럼 예수가 계신 곳이면 지붕이라도 뚫고 아이를 달아 예수 앞에 내리지는 못할망정! 몇 번을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했다.
아이는 약물부작용으로 새벽에 깬다. 그럼 앉아서 성경을 쓴다. 그리고 다시 선잠을 든다. 평일에는 직장을 가야 하니까 억지로라도 들고 깨워 출근을 시키고 자신도 출근을 서두느라 악을 악을 쓴다. 그러면서 주일이면 자신이 예배와 상관없이 살기 시작하면서 교회 가는 일에 시큰둥한가? 나는 아이에게 새벽에 성경쓰기를 하지 말라고 했다. 잠결에 마치 하루치 숙제를 하듯 그러다 정작 주일예배도 놓치면 쓰겠나? 아이는 억울한가? 주말에는 쉬고 싶다고 했다. 주일은 주말이 아니라 한 주의 시작이라고 말해주었다. 원활하게 대화가 통하지는 않는다. 뭐라 하는 걸 알고 아이도 뚱하다. 그렇게 돌려보내고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아 카톡을 하며 평소 사용하지 않는 이모티콘을 써대면서 주중에 밥 먹자고 어르고 달랜다. 오늘 나의 한 영혼이다.
영혼의 문제가 아니면 우리가 서로에게 무슨 일인가? 아프면 병원가고, 슬프면 혼자 잘 견디는 것이지 어쩌란 말인가? ‘전도서’는 마치 단면을 보여주고 있으나 스펙트럼처럼 오만 가지 길로 빛이 통하는 것을 본다. 영혼의 문제로 서로를 대하지 못하면 저는 그저 단면의 인간으로 보이는 게 전부다. 보이는 것도 제대로 보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한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6-7).” 전면이든지 측면이든지 단면으로는 전부를 알 수 없다.
바울의 영혼의 문제로 복음을 들고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21).”
저 한 영혼을 얻을 수만 있다면, 지붕을 뚫어서라도 예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육신의 문제가 전부가 아니었다. 차라리 육신이 문제라면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없는이만 못한 것도 수두룩하다. 돈 때문에 혹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또한 자신의 평소 아집 때문에 우린 언제까지 각자의 ‘전도서’를 펼쳐들고 단면적으로 외칠 것인가?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정작 그가 전하고자 하는 말은 그게 아닌데… 인생의 모든 질고는 죄로 인한 것임을.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요 5:14).”
당장의 문제나 그 해결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이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나의 간절함으로 나는 나의 지붕을 뚫고 구들장을 깬다. 그렇게 해서라도 예수를 보기 원한다. 아,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시 139:2).
그와 같은 주께 나는 오늘도 지붕을 뚫는 심정으로,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6:2).” 부디 나의 마음을 감찰하여 주시기를.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4).” 그러하기를. 우리의 변화된 삶이란,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막 12:12).” 사람들이 예수 믿는 자를 꺼리고 나를 전에 같이 대할 수 없는 이유다. 예전에 같이 즐기던 것으로부터 나는 자유하다. 자유함을 얻은 내가 나의 동무요, 가까운 사이일수록 부담스럽기도 하다. 이해한다, 저들이 알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하는 세계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예전의 내가 아니다. 거듭나야 하겠다 하심은 마치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막 2:21).” 낡은 것을 덧대어 해결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이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막 2:22).”
곧 나는 이제 지붕을 뚫고 주 앞에 달려 내려오던 병자가 아니다. 이제 한 영혼을 붙들고 씨름하며 저를 달아 주 앞으로 이끌어간다. 그때에 오늘처럼 보시는 것은 믿음이었다. 현재의 상황이나 저들의 수고가 아니다. 그만큼의 절박함으로 주를 찾는 마음이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5).” 내가 순간 아이엄마에게 화가 나는 것은 대체 그 영혼의 문제가 아니면 뭐하러 꾸역꾸역 우리 생을 기를 쓰고 사는 것일까? 자신의 ‘전도서’가 말해주지 않던가?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3).” 그 이면의 영혼의 문제를 알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3:11).”
본인의 맡은 바 아름다움이 아픈 자식으로 그 생을 복되게 주를 바랄 수 있는 것일 텐데… 아이 일로 아직은 지붕을 뚫을 정도는 아니던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외칠 정도는 아니던가? 그래서 어느 큰 교회 뒷전에 물러앉아 혼자 신세한탄으로 주를 바라고 안다고 여기다 그나마 이젠 주일도 생략하고 살고 있는가? 나는 어제도 오늘도 아이로 인해 저이한테 화가 자꾸 난다.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55:13-14).
서로 가까운 게 병이라! 잘 안다고 여기는 데 늪이 있었다. 아,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이라
그들이 죄악을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1-3).
가끔은 양치기 같이 거짓말 같아서 아무도 달려오지도 않는데, 나는 오늘도 혼자 외친다. 늑대가 나타났어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
(4-5).
아, 때로는 지겨울 때도 있어서….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6-7).
고단한 육신으로는 그만 쉬고만 쉽다. 그러할 때에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1-33).” 그리하여,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8, 16-17).
곧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22-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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