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전봉석 2023. 12. 3. 04:42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막 1:7-8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시 54:4

 

 

마가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이 글을 쓴다. 예수를 하나님의 종, 고난 받는 종으로 강조하였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구속을 성취하시고 승리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이는 어느 곳보다 고난 중에 있는 로마의 교회와 성도들을 격려한다. 즉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말씀으로 완성된 하나님의 성경은 그 목적과 이유를 우리에게 알린다. 오늘 마가는 이 주제를 첫 문장으로 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 이에 성경은 구원의 메시지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를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하면서 그 목적을 분명히 한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곧 우리는 저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성도라, 교사라… 그 사명을 더하셨다. 이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6-17).” 그러므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이렇듯 말씀으로 말씀을 따라 각자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사는 것이 사명이다. 이는 은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곧 나의 어떤 행위나 수고로 얻을 수 있는 사명도 부르심도 아닌 것이다.

 

요즘은 새벽에 나와 말씀 묵상을 하고 아침께 잠깐 잔다. 저녁 여덟 시까지로 하루 종일 있으려니까 일부러라도 시간을 그리 안배하였다. 토요일이든지 공휴일이든지 새벽제단을 지키는 일에서는 양보가 없다. 어제도 그렇게 오전을 보내다 누가 들어와 무얼 묻다 저가 같은 층 저편에 있는 모 단체임을 알았다. 어디 소속의 선교사라 소개하는 것을 듣고 이단으로 규정된 단체임을 알았다. 코로나 정국에 저들은 코로나 백신이 DNA 구조를 바꾼다는 소리로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으로, 신사도운동을, 교회의 보편성과 교회 정치를 따르지 않고 배타적선교행위로 알려졌다. 저들은 모든 교단으로부터 주의와 주시, 단절과 금지를 당했다.

 

단기선교 등으로 교회를 교란시키고 이단으로 규정된 베뢰아 출신의 선교사가 이끌고 있으며, 흔히 ‘땅 밟기 운동’이니 빽투예루살렘(Back to Jerusalem) 운동 등을 펼치고 있다. 결국 말씀을 왜곡하고 자의적인 해석으로 자신들의 운동에 짜깁기하는 게 문제다. 비전스쿨이니 선교훈련 등을 펼쳐 교회와 마찰을 빚고 모든 교단으로부터 요주의단체로 주목 받고 있다.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 24:4).” 하신 덴 다 이유가 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5).” 정말이지 이번에 새삼 느끼는 일이지만 좀 이상하다, 싶으면 영락없다. 대놓고 이단이나 이교도이면 그 경계가 분명할 텐데, 교회의 주목을 받는 즉시 여러 형태의 영문화된 단체명으로 바꿔 이를 줄임말로 하고, 그럴듯한 봉사나 해외선교를 운운하며 활발하게 활동한다. 그에 따른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이끌리고 그 세력을 확장하기도 한다. 하여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6).” 이와 같은 말씀은 그때나 지금이나 적중하고 있어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7-8).” 교회가 분화되어 분파됨은 어찌 보면 자연스런 현상이기도 하다.

 

마가는 점령국의 땅, 이교도의 나라에서 신앙을 지키는 성도들을 향해 오늘 이 성경을 썼다. 세례요한에 대해 소개하면서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막 1:6-7).” 하고 주목하는 것은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8).”

 

곧 모든 시점과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요한은 자신을 주목받는 자리에 두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이단이나 문제가 있는 교회의 특징은 목사나 그 지도자가 중심에 선다. 저의 말과 권위가 성경의 권위를 능가한다. 사람들이 저를 주목하고 중심으로 모여든다. 이를 과시하듯 세를 불리고 사람들을 규합한다. 이단은 아니라 해도 교회의 문제는 목사나 그의 주장이 문제가 된다. 저로 인해 교회가 좌지우지되는 그 자체가 세상적이다. 무슨 시스템이 있고 어떤 규정이 있다고 하나 그에 앞서 저의 말 한 마디나 행동 하나가 의미를 갖는다. 가령 대통령 중심제에서 갖는 폐단과 같이 목사가 주목 받는 즉시 교회는 흔들린다.

 

우리는 말씀을 중심에 섬겨야 한다. 설령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흩어지고 사라질 것 같으나 교회는 언제나 말씀으로 섰다. 목사의 권위나 그의 행정이 유난히 두드러질 때 교회는 말썽이 생긴다. 요한 상대적으로 있는 듯 없는 듯 광야로 물러나 생활하였다. 우리의 사명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때 우리 손에 들린 것은 말씀뿐이다.

 

사람 중심의 사회에서 그 지도자의 권위나 말 하나가 갖는 위력을 무시할 수 없으나 저는 스스로 작아져야 정상이다. 요한은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막 1:7).” 하고 자신을 낮추었고 숨겼다. 나는 이단은 차치하고 누가 자기 교회에 대해 말할 때 말씀이 아닌 목사나 그의 역할과 독특한 특징을 자주 언급하면 이를 경계한다. 우리 목사님은, 하고 시작하는 말에서 어떤 경계를 느낀다. 들은 말씀과 함께 중심으로 삼는 성경이 우선하지 않을 때 자칫 요한도 그 추종세력으로 둘러싸여 예수의 복음을 가릴 수 있었다. 이를 피하여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14-15).” 예수님의 사역은 시작되셨다.

 

바울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주의하였다. 오로지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 3:19-21).”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구원의 첫 발은 회개다. 어떤 진취적인 사상이나 대단한 결의의 무엇이 아니다. 자신이 죄인 됨을 알고,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2-13).”

 

우린 다만 우리에게 맡기시고 허락하신 곳에서 충성을 다할 뿐이다. 교세를 불려 확장하는 게 목표가 아니고, 교회를 건축하여 성공적인(?) 목회를 하는 게 사명이 아니다. 엄밀하게 이는 주가 하실 일이고, 우리는 늘 베드로와 같이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매순간 주가 하시는 일로 말씀의 실현을 목격하는 사람들이다. 우린 그 현장에 있다. 곧 나의 분량을 아는 것,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나도 뭔가 남다른(?) 혹은 성공적인(?) 어떤 목회를 꿈꾸기도 했었다.

 

그러다 오늘의 비루한 현실을 사랑함은 최소한 그리하여 나의 새벽제단은 절실하였고,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 10:13).” 그것으로 나의 분수에 대하여 나의 기준이나 기대가 사라졌다. 설령 한 사람도 구원하지 못하는 교회라 해도, 하여 노아처럼 평생 방주나 짓고 자기가족이나 구원을 얻었다 해도… 일생을 교회를 지키며 아기예수, 메시야를 기다렸던 이처럼 누가 하나 알아주지 않았고 그 어떤 역할도 변변한 게 없었던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로 끝난다 해도…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어쩌면 우리의 점점 더 심각한 과오는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신앙이 ‘지나치게’ 스스로를 열심이게 한다는 것이다. 한데 그 열심이 자신을 삼키는 것으로 ‘내가 어떻게 했는데…’ 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떠나거나 복음을 저버리는 이들이 많다. 혹은 스스로 왕좌를 탐하듯 교회의 중심이 되고 어느 단체의 교주 같이 되는 이들도 있다. 우리 안에는 저마다 ‘주목 받는 생’이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서 말이다. 이는 스스로의 만족을 추구한다. 남의 인정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긍함이 자신을 삼킨다. 공교롭게도 무슨 세미나에서 앞서 언급한 모 단체의 우두머리(?)를 본 적 있다. 그땐 이단시비가 일어나기 전이었다. 기억나는 것은 저의 설교에서 말씀은 없고 자신의 주장, 선교의 필연성과 각국의 처지에 따른 전투적인 강요가 그때도 다소 거부감이 들기는 했다. 마치 목사가 되려면 이런 일을 해야 한다는 식의 강요와 억압이 느껴졌었다. 저의 설교인지 강의인지가 끝나고 삼삼오오 모여 그 내용을 언급할 때에 저의 주장에 동조하는 쪽과 다소 경계하는 무리로 나뉜 것도 같다.

 

하여튼 같은 층에 그러한 단체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데서 잠시 마음이 어렵다가 나의 특유의 대처능력은 말씀 외의 것은 무시다. 보니 저쪽으로 돌아 무슨 교회가 또 있는데, 한참 그 교회 목사가 사모와 함께 찾아오기도 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하였는데 나의 무덤덤함에 저절로 시들해진 관계다. 저는 열정적으로 지역사회를 위한 목회자 모임을 운운하고 이단세력과 전면전을 치러야 할 것처럼 강경하였으며, 나더러 뭐라도 직책을 맡아 같이 하길 바랐지만 나는 오히려 저의 열심에 주의를 주었었다. 무슨 교육법이니, 어떤 교제를 중심으로 모이는 무슨 목회자들의 사역이니… 몇 번을 종용하다 내가 미동도 않으니 저절로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막상 같은 층에 이런저런 교회나 선교회가 있는 게 신기했다. 미처 그 생각을 못했는데… 그런들! 어제도 다녀간 그 단체의 선교사란 이는 나의 아리숙한(?) 반응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나는 늘 내 몫의 감당할 사역을 주가 맡기실 것이란 걸 믿는다. 나는 다만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아무 것도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게 사용하실 것이고… 나는 다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4).” 누가 알아주고 유명해진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예수님은 사역을 감당하시며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17-18).” 이에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22).” 그것에 개의치 않으셨고,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32-33).” 주어진 곳에서 맡기신 사명을 다하실 뿐.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41, 45).”

 

결국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시 54:1-2).

 

그러할 때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0-12).” 자칫 내가 뭘 한다, 안다, 나 아니면 안 된다 하는 생각으로 죽 쒀 개 줄 수 있다. 무던히 주를 바람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그러할 때,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