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전봉석 2023. 12. 5. 05:56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막 3:35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시 56:9

 

 

신앙의 만병통치약은 감사다. 작은 것으로 감사하는 데는 훈련이 필요하다. 가령 허리가 너무 아팠다. 새벽에 나올 수 없을 정도여서 간신히 운전을 하고 왔었다. 새벽제단만 쌓고 묵상 글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묵상 후 잠시 소파에 누웠다 잠이 들었다. 통증은 가라앉았고 적당하였다. 하루는 완만하였고 그것으로 충분히 감사하였다. 친구와 통화하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와 같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와의 가벼운 수다가 감사하였다.

 

어려움은 당연히 우릴 피하게 한다. 하던 일을 멈추고 다른 궁리를 하게 한다. 고통은 그러하여서 마음이 먼저 줄행랑친다. 두려움 때문이다. 이때 먼저 붙드는 것, 내가 주의 전에서 주의 일을 하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 3:12).” 하여,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시 18:6).

 

이를 일상으로 경험하며 사는 삶이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우리 일상의 어려움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알려준다. 고난이 그 길이란 게 아니라, 고난으로 주를 바라는 마음은 단단하여진다. 그렇게 우리는 병사와 같고,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경기하는 선수 같고,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또한 농부와도 같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와 같이 나중을 우선하는 오늘은 현재로도 감사할 게 많다(딤후 2:4-6).

 

살면서 더러 ‘손 마른 사람’이 될 때가 있다. 오늘 말씀 모두의 인물,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1).” 손 마름은 마비 된 손이면서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손이기도 하고 어떤 결과를 기대하기가 어려운 손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거나 막힐 때, 곧 인정받지 못할 때이다. 더러는 경건의 모양은 갖추었으나 실제는 따르지 않는 생활이어서 본인도 그런 자신이 어렵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스스로 이를 인정하고 주의 도우심을 바랄 수 있는 것은 복이다. 그럼에도 저가 성전에 있었다는 데서 나는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도 주의 전에 거할 때 주는 ‘안식일’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저를 고치셨다. 이를 사람들은 논쟁거리로 삼으나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4).” 우리가 구한다는 선이 얼마나 겉으로 보여지는 데 급급한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지를 알게 한다.

 

저들은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고, 예수님은 “바다로 물러가”셨다(6-7). 그때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시고 그 위에 오르셔서 말씀을 전하셨다(9). 졸지에 작고 비린내 나는 고깃배는 그리스도의 설교강단이 되었다. 어느 우화의 한 대목에서, 세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깊은 산속에서 곧게 자라며 나무 셋은 꿈을 꾸었다. 하나는 성전의 대들보가 되기를, 하나는 왕궁의 화려한 기둥이 되기를, 하나는 망망대해를 누리는 유람선이 되기를. 그러나 현실은 꿈과 같지 않아서 하나는 구유의 짐승 여물통이 되고, 하나는 초라한 고깃배가 되고, 하나는 끔찍한 형틀의 십자가가 되었다.

 

그저 ‘작은 배’일 뿐이었는데 예수께서 그 위에서 무리를 향해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 강단이 되었다. 앞서 말구유의 보잘것없던 여물통에 아기예수가 구유에 누이셨다. 훗날에 끔찍한 형틀의 십자가는 우리 죄의 구속을 위한 거룩한 표지가 되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주가 나를 쓰실 때 나는 더 이상 초라하지 않다. 이곳은 거룩한 주의 전이 된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이다.

 

교회가 밖으로 나오면서 ‘아픈 아이’가 자유롭게 온다. 어제도 점심께 퇴근하고 들러 같이 점심을 먹고 올라와서 한참을 쉬다 갔다. 아이와의 이런저런 대화가 어려운데, 더는 개의치 않는다. 저가 주의 전을 사모하고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으로 감사하였다. 엄마나 형 이야기를 한참씩 할 때는 아이가 무얼 허기져하고 마음이 이중적으로 어려운지 짐작하게 된다. 우선은 그것으로 교회가 밖으로 나온 이유 하나는 분명해졌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딛 2:15).”

 

여러 생각은 안타까움만 가중시킨다. 생각하기를 멈추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이유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덩달아 요동한다. 우린 우리가 받은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우는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 1:3).” 우리 안에 ‘가만히 들어온 자’가 있어, 저로 순간 ‘손 마른 자’가 되어 할 수 있는 일을 미루게도 한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4).”

 

우리 안의 여러 생각은 복잡할 따름이다. 특히 가족 사역에서는 대책이 없다. 남이면 수월하였을 것이 가족이어서 더 원수 같을 때도 있다. 오늘 예수님 또한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20-21).” 가족은 너무 잘 안다는 선입견이 우선이라 정작 그 사역을 올바르게 판단하기 어렵다. 공교롭지만 나는 이를 어려서는 아버지의 사역에서, 오늘에는 나에게 맡기신 사역에서 경험한다. 서로 응원하고 격려하는 게 참여가 아니다. 장모를 모시다보니 처가와도 잦은 왕래가 있는데, 더러는 신앙으로 뭐라 권면하기가 어려워 입을 다물게 된다.

 

내가 할 수 없는 일, 그래서 나로 주를 더욱 간절히 바라게 하는 것을 복으로 여긴다. 나의 오늘은 어쩌다 그리 된 진로가 아니다. 나의 선택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 1:15-17).” 아, 그럴 수 있겠다. 어쩌면 가장 의지하려 들고 가장 위로 받고 싶은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하나님은 거리를 두게 하신다. 하나님을 먼저 바라게 하는 것으로 가족보다 어려운 대상도 없다. 예수님의 젖동생 야고보도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후에야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았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이를 알고 고백하며 살기란 머리로도 가슴으로 안 된다. 더러는 가족이 원수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 그러므로 거리두기와 주께 맡기기에서 가족부터 그리 행하는 게 옳다. 앞서는 마음이 그르쳐 주의 뜻을 온전히 전할 수 없게 한다. 가령 아이는 아이엄마와 그 형을 전도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동시에 불가능한 것도 안다. 우린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는 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3-4).” 말씀을 사모하다 말씀으로 살기 어려운 것을 느낄 때 우린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것으로 주와 동행하게 된다는 사실, 아이러니하지만 ‘손 마른 자’로 주의 치료하심을 받는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살면서, 사랑하면서, 늘 같이 있으면서 어떤 답답함. 풀릴 길 없는 문제를 놓고 씨름하게 하심으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 9:16-17).” 이상한 일은 그게 어려워서도 내가 먼저 답을 찾아가듯 복음으로 무장하게 된다.

 

사람을 대하는 일 가운데서도 특히 가족이란, 목사님은 뭔지 아시죠? 하고 아이가 뜬금없이 엄마 이야기를 하다 앞뒤 없이 그리 물었을 때, …나를 짐짝처럼 취급하는 걸 알아요!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제도 아이는 형과 엄마는 ‘어려운 말’을 써서 대화에 낄 수 없어요. 하고 아이는 더 말을 이어가다 그리 툭, 하고 물었다. 내가 뭐라 대답해줄 수 있는 말도 아니고, 어떤 답을 바라고 물은 것도 아닐 거였다. 만으로 스물다섯, 더는 어린아이가 아닌데 아이큐 60의 정신과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아이와의 시간은 가끔씩 어떤 경건함을 요구하는 것 같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저 같이 있고 무엇을 듣고 함께 하는 일밖에. 나는 언제부턴가 아이엄마나 그 형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내게 맡기신 영혼은 현재로서 아이라, 점심 같이 드실래요? 오늘 가도 돼요? 할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는 일 외에는…. 오늘 주님은 제자들의 이름을 달리 붙이셨다. 저들의 특징을 알고 그 성품을 변화시키심이다.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16-17).” 이는 곧 옛사람을 벗어버림으로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10).”

 

오늘도 하루를 허락하실 때,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 56:3).

 

그럴 수 있는 신앙으로, 오직 주께만 나의 사정을 아뢰는 일.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사 31:1, 3).” 수시로 이를 체험한다. 가족이어서 또는 친구여서… 더욱이 저가 주를 믿지 않는 자인데도 위로받기를 바랄 때가 있다. 이를 하나님이 경계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나를 치는 그들의 모든 생각은 사악이라

그들이 내 생명을 엿보았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발자취를 지켜보나이다

(5-6).

 

오죽하니 예수님의 친족들도 예수를 미쳤다 여겨 끌고 가려 했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하여,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4).

 

주만 바란다는 것,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10-11).

 

이는,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