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눅 20:38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셀라)
시 89:47-48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우리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영원하시다. 오늘 시인은,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시 89:1).
하고 찬송하였다. 그 주가 우리에게 임하셨다. 앞서 주의 종들을 보내시고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신 7:9-10).”
이를 우리가 앎으로 오늘을 산다. 살면서 산 자들로 주의 은혜를 구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103:17-18).
이에 우리는,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132-2).
이를 알 때에 나를 인정하게 된다. 나의 나 된 것을 숨기지 않는다. 나의 약한 데서 주의 은혜가 머무심을 알게 한다. 늘 마음으로 생각하는 어느 집사 내외의 경우 아이가 벌써 열다섯이 되어 갈 동안 희귀병을 앓는 아이로 인해 그 아빠는 자신의 모든 꿈과 낭만을 바쳤다. 종일 아이를 돌보고 씨름하며 산다. 주 안에서 주가 주신 삶으로 충성하는 일이다. 저는 몇 개 국어를 하고 나름 장교출신의 사람이었다. 주 안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허락하신 날을 인정하며 산다는 일, 나는 모든 은혜의 첫 발은 자신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이 불변의 모든 우주가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에서 비롯되었음을 아는 일이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9:6).” 하물며 오늘의 나의 모든 처지와 상황을 누구보다 더 잘 아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할 때, 사람을 피해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저가 나를 알까 하여 경계하지도 않는다. 흔히 간증이란 남다른 특이함을 떠들며 자신의 독특함으로 우월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상황을 인정함으로 주는 성실하시고 공평하심을,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
오늘 본문의 사람들은 주를 시험하는 데 급급하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눅 20:2).” 하고 다그친다. 예수께서는 대답할 이유가 없으시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하고 되물으신다(6). 그러나 저들은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답을 회피한다(7). 하니 예수께서도 일러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8).”
대답할 가치가 없는 말에 대하여, 포도원을 비유로 들으시며 아들까지 죽인 저들을 어찌할지 말씀하신다.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15-16).” 이는 자신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으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17-18).”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주께서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이고, 이를 믿음으로 아는 까닭이다. 오늘 시편 3, 4절,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셀라)
(89:3-4).
이를 우리에게 향하신 말씀으로 받을 수 있을 때,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그러므로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3-14).”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오늘을 살 때, 남모를 아픔과 스스로 비극적이라 여기는 일에 대하여 덤덤할 수 있다. 자신을 인정하는 일은 주의 긍휼하심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이다. 나는 누구의 글쓰기를 도울 때 자신의 이야기를 끌어내길 유도한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고 서로가 신뢰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다. 먼저는 자신에 대한 용서와 인정이 따라야 가능하다. 실제 어느 훌륭한 이를 가르친 적이 있다. 저는 모 학원의 원장으로 수재 소리를 들으며 학창시절을 보냈고 좋은 혼처와 적당한 상대로 두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었다. 스스로 말하길 늘 자신은 배움에 갈급하다. 여러 나라 언어를 하면서도 새로운 어학을 공부하고, 철학, 요가, 호신술에 이르기까지 자기관리가 그야말로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런 틈을 내어 글쓰기를 배우고자 왔다. 이 모든 것을 말로 구사하기보다 글로 언어화하고 싶은데 자신의 생각에 어떤 매뉴얼이 없으면 자유로운 글쓰기가 불가능하다는 거였다. 단지 ‘기록이 아닌 자기 글쓰기’를 바랐고, 나는 앞서 자신을 대면하는 일에서 글의 소재가 나온다고 하였다. 이론적으로는 저도 인정하였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일주일에 매일 오기를 바라는 것을 두 번 정도면 충분하다고 설득하여 그리 시작하였다. 일상을 쓴다는 일, 흔히 일기라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은 것은 단지 시간의 나열이 아니고 사건이나 상황의 보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의 글은 짜임새 있었고 기록지나 보고서로는 빠지지 않았다. 문장력도 좋았다.
한 달쯤 지났을 때, 그래서요? 하는 나의 물음에 저는 당황스러워하였다. 그 정도는 굳이 여기 와서 배우지 않아도 쓸 수 있는 것인데 무엇을 위해 글을 쓰려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저는 한두 주 더 혼란스러워하였다. 글쓰기를 멈추고 말로 듣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은 어떠했는지. 요즘 사춘기를 겪는 딸애와 어떤 사이로 힘에 겨운지. 실은 그게 자신의 모습이어서 불편하다는 것까지. 나는 그러한 부대낌, 껄끄러운 부분을 말하듯 글로 쓰게 하였다. 구어체라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저의 전개는 더뎠다. 세 번째 달을 시작하고 얼마 후 핑계 같지 않은 핑계로 수업을 빠지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그만두었다. 어떤 이유인지 나는 묻지 않았다. 저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은, 자신을 마주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더하신 자신을 두고 그 자체로 주를 인정하는 일이다. 그럴 수 있다면,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3).” 나는 현재 어느 아이엄마의 ‘자신은 괜찮다’는 말과 아이도 ‘그럴 필요는 없다’는 거절의 의미를 이해한다. 또한 누구의 말, ‘아이를 맡겼는데 뭘 또 나까지…’ 하는 식의 회피도 이해한다. 사람은 본디 가장 약한 부분이 수치다. 아무리 거지같은 인생이라 해도 수치심과 모멸감으로 괴로워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를 인정할 때,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
(119:137-138).
오늘의 나를 두고 이와 같은 고백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나는 나를 믿을 수 없어도 나로 이러한 삶을 살게 하신 이를 믿을 수 있다. 나로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을 견딜 수 있는 길은 나의 나 된 것이 내가 아님을 바로 알 때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와 같은 고백은 어디까지나 산 자의 것이다.
오늘 주님은 이르시되,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눅 20:37-38).” 곧 죽은 자나 산 자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았다! 우리에겐 죽음의 경계가 단절의 의미로 모든 것과 가르는 것 같지만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슥 8:7-8).”
누군들 주가 지으신 게 아니겠나? 스스로 이를 인정하지 않을 때 저는 하나님 없는 자로 살 뿐이다. 하여 우리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곧 오늘의 나로 감사와 영광을 올릴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사 51:12-13).”
하여,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89:1).
오늘 시인의 찬송을 되뇐다. 오늘의 나에게서,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5).
주는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심으로 나의 오늘이 더러는 힘에 겨워 마음은 요동할 때에도,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모임 가운데에서
매우 무서워할 이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이시니이다
(7).
그리하여,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21).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것은,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33-34).
하신 말씀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오늘 이 땅에서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셀라)
(47-48).
그리하여,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전의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49, 5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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