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전봉석 2024. 1. 5. 05:36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눅 18:41-43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시 87:6

 

 

우리는 하나님을 알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낙심할 때에도 이길 수 있는 힘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1). 이어 불의한 재판장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7).” 하고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약속하신다.

 

우리의 낙심은 죄 때문에 온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그러므로 환난과 고난이 올 때 이를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다만 이것이 오는 것이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12).” 교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를 돌아본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어떤 어려움도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그때의 모든 어려움은 메시지다.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내포한다. 이를 믿고 감사함으로 인내하는 것으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과연 오늘의 어려움이 하나님을 우러르며 섬기어 나타내는가, 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11-12).” 고로 이와 같은 고난까지도 모두가 주의 뜻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

 

말씀을 묵상하는 일은 일상을 돌아보며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다. 늘 같은 날의 연속인 것 같으나 그런 가운데 우리의 삶은 드러나서 드러내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13).” 소금과 같이 그 쓰임이 뚜렷하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14-15).” 빛과 같이 그 용도가 분명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 한데,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8-10).”

 

곧 우리의 고난은 주를 바라게 한다. 고난의 역설은 감사와 영광이다. 늘 우리 일상은 누구와 연관이 있고 나는 이를 기술하는 데 있어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 설마, 이 글을 누가 보겠나? 하고 함부로 쓸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이 보시고 내가 안다. 가령 어제는 뜬금없이 아이가 묵상글을 잘 읽었다며 문자를 했다. 순간 머리가 쭈뼛해졌다. 전날에 있었던 아이와의 내용을 글로 쓴 것 같은데, 어떻게 썼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덕분에 다시 읽었고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언젠가 주 앞에 섰을 때 드러나게 될 나의 소상한 일상이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던 마음이 혹은 행동이 낱낱이 드러날 터인데, 내가 누구를 생각하고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까맣게 잊고 있다가 드러날 것을 생각하면 낯 뜨겁다.

 

언어의 순화와 사건의 은유화가 필요하다. 상대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표현으로 일상을 기록하듯 살아야겠다. 분명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그때에,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시 87:5-7).

 

곧 우리의 생각도 행동도 그 출처가 분명하여서 사람 앞에서는 어떤 핑계로 변명이 통할지 모르겠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어림없다. 지금 나 혼자 있는 이 모든 시간도 마치 <트루먼쇼>와 같이 기록이 되고 방송이 되듯 드러날 것이다. 그때에 나는 송구하여 고개를 들지도 못하는 세리와 같은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의 대언자가 되심으로 허물도 죄를 가리워주신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뜬금없는 아이의 문자, 이어지는 ‘감사합니다’ 하는 인사에 나는 적잖이 당황하였고 나의 이 글을 볼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지 못했다는 데서 순간 가슴이 철렁했던 것 같다. 언어란 말과 달라서 읽는 이의 시선에 따라 좌우된다. 말은 그때의 환경과 분위기에 따라 전달의 확장이 달라질 수 있으나 글이란 오롯이 진정성으로 전달된다. 순간 왜 말씀으로, 언어로 우리에게 남기셨나? 하는 데 따른 어떤 깨달음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사도의 시대를 살지 않는다. 예수와 함께 동행 하나 예수의 말씀뿐이다. 또한 선지자의 시대를 사는 것도 아니어서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시거나 음성이나 형상으로 마주할 수도 없다. 지금도 누가 보았다, 들었다 할 때 사뭇 주의해야 할 것은 이것이 일종의 영상이나 음향을 가지는 게 아니어서이다. 곧 우리는 성경의 시대를 산다.

 

얼마 전 친구와의 긴 대화에서 성경 읽기와 묵상하기에 대해 설명하였던 것처럼 묵상은 일종의 물고 뜯고 씹어 삼켜서 소화하는 일이다. 이는 마치 사자가 먹잇감을 물고 절대 놓지 않고 빼앗기지 않는 것과 같아서,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곧 우리는 언어의 시대, 성경의 날을 산다.

 

하나님은 이미 성경으로 말씀하셨다. 성경은 들리거나 보이지 않으면서 들을 수 있고 생생하게 보이기도 하면서, 맛도 느낄 수 있어서 어떤 것은 떫고 쓰고 도로 뱉고 싶을 때도 있다. 마치 나 들으라고 하는 말씀 앞에서는 한사코 자신을 부정하지만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이 나와 싸우신다. 성경을 묵상하고 이를 일상에 적용하는 일이 때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 같기도 하다. 입에 좋은 것으로는 건강식을 할 수 없다. 때론 입이 원하지만 이를 참아야 하는 것도 있듯이… 나는 어떤 일을 두고 적용할 때 생각하는 것과 글로 표현하는 게 얼마나 다른가를 새삼 알았다. 더불어 왜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지도 알겠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것 같이 어찌 읽고 묵상하는가에 따라 그 의미는 천차만별이다. 읽기는 그저 그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라면 묵상은 이를 음미하고 멈추어 그 시선을 놓지 않는 일이다. 종종 나는 아이와의 대화에서 이를 배운다. 누구의 사연을 듣다 이를 생각하기도 한다. 가령 지금 나는 누구의 ‘어떤 기도 부탁’에 의도적으로 답을 하지 않고 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할 때 저의 요구에 앞뒤가 없어서이다. 단지 그 문제해결이 목적이면 해결을 위해 굳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될 것 같다. 아무 신이든지 상관없을 것 같은 저의 기도내용에 내가 더는 답을 할 수 없는 이유다. 우리의 문제, 어떤 고난이든지 어쩌다 그저 생기는 일은 없다. 성경은 일러,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그와 같은 어려움으로 주를 바라고 자신을 돌이켜 회개할 수 있다면…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 3:13).” 하고 이어지는 바울의 권면에 답이 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4-19).”

 

이 놀랍고 기가 막힌 진리 앞에서 아하, 하고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성경은 말씀이고, 언어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져서 성령의 감동으로가 아니면 읽을 수 없다. 성경을 보는 것과 읽는 것은 다르다. 먹을 것을 앞에 두고 눈으로 보는 것과 손으로 집어 입에 넣는 것의 차이만큼 확연하게 다르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여 그 소원을 이루었다 한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오늘 이 말씀을 어찌 씹어 삼킬 것인가? 누구는 건강을, 자식의 장래를, 집이 팔리길, 사업이 잘 되거나 기타 등등 저마다의 다급한 마음으로 믿고 구한다. 늘 부탁하는 기도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누구보다 사탄도 주를 믿는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믿는다고 하면서 구하고 바라며 사는 일에 대해,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내용과 장면을 비교하시며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4).” 하시는 말씀의 의도를 놓고 나는 자주 찔린다. 아무도 모르나 주 앞에서 송구하여 고개를 들 수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 말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17).”

 

자기 생각이 많고 뚜렷하여 그 요구가 분명하다 할 때 오히려 주의해야 할 것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심을 얼마나 주의하고 또 명심하여 기도하는지? 그저 자기 요구나 필요에 파묻혀 입만 열면 바라는 것이 사는 데 따른 지겨움이 전부이면, 굳이 그 기도를 들어줄 이가 하나님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일 아니겠나?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나머지는 주가 다 알아서 하실 것인데, 언제나 먼저 자식 일을 놓고, 자신의 건강으로, 되는 일이 없는 사는 일에 얽매여서 기도가 그 정도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심은 매우 두렵고 떨리는 경고가 된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믿는다고 하는, 소위 제자들을 상대로 하신 말씀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18:43).” 이에,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87:1-2).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임하셨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일은 이 땅에서의 남은 날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한 날을 더하며 ‘그의 터전’ 곧 ‘성산’에서 사는 일이었으니,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셀라)

(3).

 

이에,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5).

 

오늘 나의 이 한 날이 그러하여서,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