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눅 17:3-4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시 86:17
은혜로 산다는 것은 은혜를 입은 자 같이 은혜를 베풀 줄도 안다. 받은 자가 줄줄도 아는 것처럼, 내가 은총을 구할 때에 또한 누구를 위하여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게 된다. 심고 거둠의 원리와 같이 용서도 같다. 우리의 어떤 추함도 회개함으로 용서하심을 받는 것처럼 주께로 가까이 갈 수 있는 거리만큼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도 그 거리를 좁힌다. 자신을 어렵게 하던 사람이며 환경이며 어떤 조건에 대하여도, 오늘 주님은 이르시되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3-4).”
이는 사람에게 뿐 아니라 자신의 일상을 두고서도 같다. 다윗은 아뢰기를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시 86:1-3).
곧 우리가 주께 아룀은 일곱 번을 일흔 번을 더한다 해도, 그것이 나를 괴롭게 하는 연약함으로 ‘나의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신다.’ 오늘 본문에서 열 명의 문둥병자가 낫기를 청한다. 저들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지대에 살던 이방인들이다. 예수에 대해 들었고, 그가 지나실 때에 외쳤다.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13)” 그러자 예수님은 당시의 전통에 따라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14).”
제사장이 보고 이를 판단하였다. 그런데 열 명의 문둥병자는 이를 듣고 말씀을 따라 가던 길에 이미 나음을 입은 것을 알았고, 그 가운데 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돌아와 예수 앞에 엎드렸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15-16).” 우리의 필요, 이 땅에서의 도우심 곧 일시적인 구원이 있고 영원한 영생의 구원이 있다. 한데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18-19).”
같은 자리에서 같은 것을 바라고 같은 결과를 얻었는데, 하나는 데려가심을 받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는 일에 대해,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34:18).
이는 어디까지나 산 자들의 복이다. 결국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전 9:4).”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이는 산 자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막 12:27).”
하여 나는 죽었다,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다 할 때에 가슴이 서늘하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0).” 이는 모두 산 자들의 복이다. 열에 아홉은 살았으나 죽은 것과 같고 그 가운데 하나만이 그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가 사는 동안 매순간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는 것은
첫째, 매순간 말씀을 지키는 일이다.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 1:5).”
둘째, 매순간 회개하는 삶이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셋째, 매순간 주의 도우심을 구하되 환난 중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들이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버려 두사 원수들에게 지배를 당하게 하시다가 그들이 돌이켜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주의 긍휼로 건져내시고(느 9:28).”
말씀이 있어야 회개도 할 수 있다. 회개는 말씀을 기초로 하고 주께 도우심을 구하는 일도 말씀을 토대로 한다. 그저 내 요구와 간구로 구하고 도우심을 바란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비로소 누군가를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될 수 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하여 우리는 주께 기도하기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6:12-13).” 이는 마치 심음과 거둠의 원리가 같이 용서의 원리로서 용서 받은 자는 용서하고, 용서하는 자는 용서하심을 받는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14-15).”
누구를 내 안에 품고 저를 미워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다. 자신의 자기됨을 두고 감사할 수 없을 때 자기 안의 노여움으로 자신이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가령 어제 아이가 와서 같이 점심을 먹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다. 말을 빙빙 돌리자, 말해! 하고 풋, 하고 웃었더니 녀석도 알아챘다. 기다렸다는 듯 사진을 보여주며 누나, 누나는요, 누나가요, 하면서 어수선하게 말을 이어냈다. 스케이트를 같이 타다 만났고 운동을 좋아해서 엊그제는 자기가 다니는 헬스장에서 같이 운동을 했다며 한껏 들떠 있었다. 나는 한참을 아이 손에 들린 ‘누나’의 얼굴을 보고 여러 마음으로 덤벼드는 염려를 물리치고 같이 좋아라, 하고 축하하였다. 아직은 ‘썸’ 정도라며 싱겁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으면서 걱정도 앞섰다.
자신을 노여워하지 않을 때 남을 사랑할 수도 있다. 남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일은 자기를 사랑하는 일만큼 정당하다. 자기 안에 노여움이 있을 때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다. 연애폭력이니 사랑싸움이니 하는 말은 저마다 그 속에 갇힌 자아의 일이다. 나는 슬그머니 아이에게 그것을 말해주었다. 그럴수록 자신을 더 위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에 대하여…. 서로가 잘 지내며 그 ‘누나’가 같이 예수 앞으로 나오기를 바라며 아이의 다소 격앙된 말을 들었다. 이런저런 묻지도 않은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이다. 그러고 싶은 것이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40:11).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은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고, 자신을 용서하면서 비로소 사랑을 배워가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123:1-2).
이와 같은 간절함으로,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3-4).
아이는 마음이 급한지 같이 점심만 먹고 갔다. 다른 때 같으면 같이 올라와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갔을 텐데, 여섯 시에 ‘누나’가 퇴근하고 스케이트를 타러 오려는지… 들떠 있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두 시도 안 돼 돌아갔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나는 다만 주의 긍휼하심을 바란다. 아직 어떤 이인지 알지 못하지만 아이와 그렇듯 몇 번 만나고 같이 식사도 하고 운동도 한다고 하니 이래저래 마음부터 쓰였다.
어쩌면 우리의 믿음은 무모한 모험이다. 우리의 이해와 상식으로 우리 안의 믿음,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 은혜를 인정할 수는 없다. 누가 논리적으로 따지면서 믿음을 운운할 때 나는 저를 논리로써 반박할 수 없다. 서로의 대화는 불가능한 것이 모험이란 그 자체로 무모함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신지? 나는 용서가 필요한 영원한 죄인인지? 회개함으로 용서가 가능하기는 한지? 우리 안의 죄책이 과거로부터 미래의 것까지 해결받을 수 있기는 한지? 어느 것 하나 믿음으로가 아니면 믿음은 불가해하다.
곧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4:18).” 미치지 않고서야 말씀으로만 저의 나이 일흔다섯에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버리고 갈 바도 알지 못하는 곳을 향해 길을 떠날 수 있겠나? ‘나를 따르라’ 하실 때 베드로나 안드레와 요한까지도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아비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니…. 우리는 믿음 외에 달리 믿음을 받을 길이 없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나는 아이가 ‘누나’를 만나게 되고 이성적인 감정으로 들뜨는 사랑을 응원한다. 주 앞에 아뢰기를 주의 긍휼하심으로 ‘좋은 사이’로 발전하고 성장하기를 응원한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기를. 나는 우리 ‘아이들’이 누군가를 만날 때 부디 그 마음의 중심이 그러하기를 두고 주께 간구한다. ‘나머지 아홉을 찾으시는 주님의 심정’으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누구나 저마다의 마음에 있을 노여움을 주게 찬송으로 승화시킬 때 사랑도 풍성하였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일은 자신을 용서하기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하는 일이다. 곧 사랑은 자기와의 투쟁이다. 그저 좋고, 달콤하기만 한 것은 사랑이 아니다. 좋은 건 얼마든지 있다. 그럴 수 있고, 누구라도 무엇이든지 좋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3b-7).”
고로 우리가 서로 사랑함은,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4-5).
사랑은 언제나 용서의 자리에서 꽃이 핀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
(7, 10).
믿음도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듯 사랑도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있어 사랑이 먼저다. 주의 사랑을 입은 자만이 사랑을 한다. 사람의 사랑은 좋아하는 정도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어서, 좋은 것은 좋다가도 얼마든지 싫어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12-13).
항상 주의 사랑이 먼저여서,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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