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2-43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시 92:12-13
빌라도는 세 번씩이나 예수께는 죄가 없음을 언도한다. 이를 알리려 헤롯에게로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헤롯은 예수를 반기며 기뻐하였다.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8).” 하나 무리는 예수를 정죄한다. 이 일로 원수 같이 지내던 헤롯과 빌라도가 친해졌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12).” 기이한 현상이다. 그처럼 예수 앞에 몰려와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하고 외치며 주를 따르던 자들이었다.
군중심리로 사람들 속에 있을 때는 사탄의 하수인들이 된다. 바람에 쓸려 다니는 안개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닐 뿐이다. 이에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출 23:1-3).” 모든 죄에는 앞서 경고의 말씀이 있었다. 처음 살인에 앞서서도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말씀은 무시되고 우리의 어리석음은 자신의 감정을 따르고 사람들을 의식한다. 하여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 12:22).” 곧 “거짓 증인은 패망하려니와 확실히 들은 사람의 말은 힘이 있느니라(21:28).” 당장은 모를 일이다. 사탄도 광명한 천사 같다. 서로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라고 부추긴다. 마법처럼 서로는 의견을 같이한다. 결국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대속의 죽음 앞에 서셨다. 말씀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를 위하여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곧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이와 같은 사실을 군중 속에 있을 때는 알 수가 없다. 무리지어 움직이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기도 한다. 이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빌라도와 헤롯은 그저 대표적인 인물일 따름이다. 저들을 풀어 흩으면 무리가 되어 저들의 외침 속에 갇힐 것이다. 진실은 밝힐 때 당당해진다.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잠 12:19).” 서로가 죄 때문에 잠시 친구가 되기도 한다. 의기투합하여 동지를 운운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 문득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회유가 언제나 우리에게 속삭인다(행 4:18). 그러할 때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19).”
우리는 어쩌면 이와 같은 순간을 산다. 어느 쪽이 옳은가 판단해야 한다. 그럴 때,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서로가 참을 말한다는 일은 용기 이상의 실현이다. 그렇지 못하여 우리는 번번이 죄를 타인에게 전가한다. ‘너 때문에…’ 하는 식으로 ‘탓’을 한다. 이는 죄가 드러날 때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그때라도 ‘주여 제 잘못입니다.’ 하고 죄를 인정하고 주의 긍휼하심을 바랐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죄의 본질은 회피와 회유다. 스스로를 그리 여겨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는 경우도 그러해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당장 한 치의 앞도 모르면서도 자기고집을 꺾을 수 없다. 몸에 밴 습관은 무서운 것이어서, 해를 거듭할수록 그 뿌리는 더욱 견고하여진다. 그래서도 나는 이 순간의 이 시간을 지키려고 한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글로 쓰고 이를 언어화하는 이유도 그러해서다. 때로는 몸에 밴 습관을 좇아 이 새벽에 나온다. 친구가 새벽예배를 나간다고 할 때 그 첫 결심을 축복하였고, 내친걸음으로 몸에 배기까지 잘 참고 견디기를 바랐다. 누가 묵상을 결심할 때 또는 성경공부를 했으면 할 때, ‘다음에…’ 하는 마음을 슬쩍 끼워 넣어 그 순간을 우선 피하게 하는 게 사탄이다.
과연 군중 사이에 그러는 자신을 회의하고 갈등하며 수치스러워한 사람이 없었을까? 그러나 호기심은 천박하였고 침묵은 무가치하였다. 호기심의 극적인 예로는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삼상 6:19).” 사실 믿음과 호기심은 충돌하거나 일시적으로 타협한다. 심지어 서로를 부추기면서 우리 스스로 그만한 존재가 되는 것처럼 서로 격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편은 기도하였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시 119:18).
그러한 마음으로 말씀 앞에 앉힌다. 몸을 쳐 일으키고 주의 전으로 나온다. 그리스도는 인내하셨다. 항변하거나 변명하지 않으셨다. 오늘 9절,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그것이 빌미가 되었을 수도 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10).” 죄는 늘 호시탐탐 우릴 노린다. 모든 게 다 때가 있어서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1-8).”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일은 바로 그 때를 아는 일이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곧 예수님의 침묵은 회피도 무책임함도 아니다. 오히려 더 큰 책임을 지려 하심이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 3:1).” 하나님의 선고는 언제나 의외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2-3).”
사탄은 우리를 참소하나 하나님은 그런 사탄을 꾸짖으신다. 이는 우리에게 예수의 보혈의 피, 곧 정죄함이 없는 ‘아름다운 옷’이 있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4-5).” 더하여 우리에게 관을 씌우시니,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 이에,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34:13-15).
주를 의식하고 산다는 일은 날마다 깨어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일’과 같다. 몸은 죄를 원하고 마음은 저 혼자 들쑤시기 일쑤다. 그런 자신을 나는 잘 안다. 그래서도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 이에 어차피 습관의 싸움이라면 ‘좋은 습관’을 잃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친구에게 그리 권하자, 뭘 또 그렇게까지… 하고 자신에게 여지를 둔다. 글쎄, 나 같으면 영락없다. 내가 아는 나는 오늘만, 하고 하루를 허용하면 이틀이 되고 일상이 되기 십상이다. 한 번 만이라고 했는데 어느 순간 늘 그리 행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중에는 그러는 자신에 대한 자각능력도 잃는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겠으나 우린 늘 허망한 일에 타협한다. 빌라도와 헤롯이 예수의 일로 친구가 되었다!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26:4-5).
이를 위해,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6-7).
그저 ‘나중에…’ 하는 마음은 사탄이 가장 자주 쓰는 방법이다. 그러면 스스로는 허용하고 ‘그럴 수 있지 뭐…’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사탄 곧 삼촌 스크루테이프는 조카 곧 마귀 웸워드에게 자주 안심시켰다. 환자 곧 신자들이 굳은 결심을 할 때, 혹은 자책하여 회개하려할 때 그 속에 슬그머니 밀어 넣은 마음은 ‘다음에…’였다. 나는 숱하게 이를 당했다. 내가 나를 잘 아는 것 중에 ‘그럴 수 있지!’ 하고 하나를 허용하면 나머지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이런 점을 잘 알기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이는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하시는 말씀에 자주 머문다.
성경의 이와 같은 말씀은 언제나 우리가 죄를 짓기 전에 한 발 앞에 서서 들려진다. 그러므로 누구도 후에 이르러 몰랐다고 할 수 없다. 하면 이를 어찌 할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을 봐도, 십자가에 같이 참여하는 일로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26).” 얼결에, 어쩌다 새벽예배도 나갔고, 예배 중에 눈물을 흘리며 회개도 나왔다. 즉흥적이었든지 감정적이었든지 이에 ‘억지로라도’ 그리 끝까지 행하였을 때 복이 온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이를 위하여 자신은 자기 육체에 채우는 것이 있는데,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러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얼까?
나는 친구에게 우리가 교회를 섬긴다는 것은 지체로 산다는 일인데, 나는 저들 곁의 ‘그 모녀’가 저들의 아픈 손가락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교회를 뿔쭐나게 다니고 서로는 지체라고 하면서 정작 ‘남의 일’에 끼어들려 하지 않고, ‘내 일’을 남이 알까 하여 피한다면 이건 그 믿음이 거짓이란 증거다. 하다못해 발가락의 티눈 하나 때문에 다리를 절고 온 몸이 쩔쩔매면서 아픈 데 자꾸 손이 가고 마음이 쓰이기 마련인데… 교회에 헌신하는 일을 자기만족에 겨워하던 사람들이 오늘은 군중이 되었다. 무리는 한사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오죽하니 빌라도도 헤롯도 예수의 죄 없음을 인정하려 하는데도 말이다.
우리 스스로 얼마나 간사한가?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다고 해서 하나는 같이 비난하고 조롱할 때,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하고 하나는 예수를 믿으며 아뢰었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2-43).” 둘 그 이상의 무리였다가 결국은 혼자서 예수 앞에 서야 한다. 더러는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27).” 그러자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8).” 하신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29).” 그 후회가 또 탄식이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30).” 차라리 산에 깔려 죽기를 바랄 정도로 괴롭고 수치스러울 것이다. 곧 이르러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31).”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92:2-3).
이 아침, 나는 고백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4-5).
주신 상황 속에서 무던히 주를 바란다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이나 그것으로 ‘습관을 따라’ 주 앞에 아뢸 수 있는 일이었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13-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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