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전봉석 2024. 1. 11. 05:17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 24:48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시 93:5

 

 

우리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 선다. 각자의 상처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한다. 나의 어려운 마음을 열 때 상대는 공감한다. 서로의 사랑은 식을 줄 모르는 열정과 같이 기적이 된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자들, 상처 받고 엠마오로 가는 사람들, 서로가 놀라 당황스러워하는 사도들이 있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8-9).” ‘이 여자들은’ 안식 후 첫날 새벽 무덤으로 갔었다. 무덤 문이 열리고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4).” 저들이 이른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6).”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친구는 밑줄 그은 성경을 사진으로 보내 이해가 안 간다고 물었다. 새벽예배를 시작하고 며칠째 이를 실천하며 성경을 읽고 있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그러한 마음은 주가 주시는 것으로 자신의 의지로는 되는 게 아닐 거였다. 성경을 풀어 설명해주고 우리의 이해 그 너머의 이끄심을 의지하기를 권하였다.

 

우리 안에 있는 근심은 주를 위한 것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우리로 주를 바라고 주의 뜻을 구하게 한다. 그러므로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11).” 이는 우리로 유익하게 하는 것으로 세상이 주는 근심과 다르다. 곧 우리는 서로를 향해 근심한다.

 

자신의 상처, 그 약함을 인정하는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문다. 그것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 6:24).” 서로를 위해 빈다. 한 영혼을 안고 씨름하기는 온 천하를 얻는 일이다. 우리가 이를 귀히 여김은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나는 ‘나의 상처’로 ‘너의 상처’를 감싼다.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된다. 예수가 죽으셨다. 모두를 속량할 자로 여겨 따랐다. 순간 모두는 근심하였고 낙심하여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이러할 때 예수께서 저들에게 일일이 나타나셨다. 먹을 것을 달라하시고 이를 축사하시었다. 앞서 그들은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14).” 서로는 자기가 보고 들은 바로 사실을 말한다. 예수께서 가까이 동행하시나 알아보지 못한다. 서로가 길을 가면서 서로는 주고받는 이야기에 열중할 따름이다.

 

결국 머물러서기까지 자기 말에 열중할 따름이었다. “무슨 일이냐?” 예수가 물으신다. 느닷없고 한심한 질문이다.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한단 말인가? 저들은 의아한 마음으로 ‘나사렛 예수의 일’을 설명한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19-20).” 곧 저들은 자신이 아는 바를 말하는 동안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앞에 두고도 알지 못하고 저에 대해 말한다. 저들로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하고 탄식하신다(25).

 

스스로의 이해와 상식으로 그 열심을 낼 때는 엠마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결국 어째서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는 예수님의 설명이 따른다(26). 저들은 강권하여 예수를 모시고, 그들과 함께 유하시며 “떡을 가지사 축사”하실 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았다(31). 자기 경험, 자기 생각으로 자신들의 말을 할 때는 예수가 곁에 계셨는데도 알지 못하다 비로소 눈이 밝아져서야 깨달았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갔다(32).

 

모두는 상처 받은 영혼을 안고 산다. 어느 순간, 어디에서 우리는 ‘따귀 맞은 영혼’으로 자기 이야기 속으로 파묻힌다. 그러할 때는 예수가 곁에 계시지만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서로는 말한다.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계속한다(34). 그것으로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고,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35).” 우리는 서로 말할 때,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고 보이신다(36).

 

‘상처 입은 자’의 말에는 간곡함이 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롬 9:1).” 이것으로 서로가 증인이 된다. 어떤 갈등 또는 오해를 통하여 서로를 이해한다. 단절된 말에서는 막연한 기억뿐이다. 추억은 감정을 휘저어 부유물을 일으킬 뿐이다. ‘자신의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용기다. 거기에는 자정능력이 있다. 우리 몸이 스스로의 복원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상처 입은 자의 말에는 진실성이 있다. 이를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하는 근심’이라 하였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나는 친구의 새벽기도와 제자훈련을 그리 이해한다. 자신의 머리로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을 뒤로하고 순종한다. 순종은 믿음의 지름길이다. 때론 무모하고 어처구니없는 듯하나 그것으로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 자신을 인정할 때 부끄러움도 상처도 수치도 더는 숨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늘 우리 곁의 예수는 죽으셨다 부활하신 예수시다. 저는 죽음을 이기셨고 곧 다시 오실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 20:20).” 몸소 자신의 수치와 수모를 가리지 않으시고 내어 보이셨다. 하나님의 아들로 그의 당하신 십자가는 멸시였고, 수치였으며, 조롱과 부끄러움이었다. 그러한 상처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고, 오히려 이를 보고 우리는 비로소 기뻐할 수 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고전 15:15).”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 하는 일은 거짓이다. 그러나 부활은 죽어야 가능하다. 누가 어떤 상처로 심히 곤고하여서 죽은 자로 산다. 시선은 흐리멍덩하고 행동은 굼뜨고 의욕은 상실했다. 저의 ‘따귀 맞은 영혼’을 우리 곁에 두셨다. 가령 누군 자주 화가 난다. 저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내가 얼마나 애쓰는데…’ 하는 피해의식이 있다. 저가 자주 휘두르는 칼날은 ‘너를 위하여’다. 가족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다. 교회를 위하여 자신은 헌신한다. 애써 수고한 것이 무시당한 것 같을 때 화가 올라온다. 서운함이 영혼을 짓누른다. 나는 저의 희생으로 족하였다고 말해준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요 7:3).”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의 행하심이 답답하였다. 실은 누가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 영혼은 상처 받는다. 아주 사소한 일인 것 같으나 저마다의 상처는 위로 받기를 원하고, 이를 거절당할 때 의기소침하여 안으로 감긴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아이엄마도 ‘이혼’이라는 표면적인 상처를 안고 산다. 아이는 두 사람 사이에서 말할 수 없는 충격으로 입을 다물고 <양철북>에서의 오스카와 같이 성장을 멈추었다. 친구는 저들 모녀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이에 제자훈련과 새벽예배로까지 이어져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우리가 서로 말할 때 상처는 드러나고, 드러낸 상처는 남을 돕고 위로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일은 상처다. 부끄러움이고 수치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활을 증거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엄연히 말도 안 되는 말을 두고 우리더러 ‘믿느냐?’ 하고 물으신다. 어쩔 것인가?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

 

상처 입은 영혼은 힘이 있다. 상한 영혼으로 우리는 주 앞에 나아갈 수 있다. 놀라운 사실은 이를 인정할 때, 하나님은 다른 그 어떤 제사보다 이를 기뻐하신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 4:14).” 이를 믿느냐? 하고 우리를 참고 기다리신다. 엠마오로까지 동행하셨다. 자신의 못 박히셨던 손과 발, 옆구리를 내어 보이셨다. 상처는 부끄러운 것이고 실패의 증거이다. 우리는 이를 감추지 못해 안달을 하며 산다. 유한마담으로 교회를 다닌다. 적당한 무리 속에서 교양 있게 섞여 있다. 사교적인 만남으로는 서로의 ‘따귀 맞은 영혼’은 보려하지도 말하고 싶지도 않다. 아무도 몰랐으면 하고 바라는 동안에는 경건의 모양은 있고 거룩은 없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신 4:23).”

 

그럼에도 오늘도 우린 우상을 조각하듯 자신을 꾸민다. 적당함으로 치장하고 그 정도에서 ‘친절한 타인’의 자리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남이 나의 상처를 볼까 하여 가린다. 덧입혀서 경건으로 모양을 낸다. 우리가 약속 받은 말씀을 잊었을 때 먼 길을 돌아 엠마오로 간다. 서로가 골방에 모여 두려움으로 웅성거린다. 서로는 쉬쉬하며 믿음이 약한 자를 멀리한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롬 14:1).” 그러니 자신의 생색으로 자기만족에 겨워, 이게 다 ‘너를 위하여’ 하고 상처의 칼을 휘두른다. 그 안에 두려움 때문이다. 사람들의 거절과 외면을, 혹은 자기 자신의 만족과 위로로부터 설마 그것이 허상일까 하여… 실은 능청을 떨고 위선 가운데서 스스로가 우상이 되어 산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38-39).”

 

오늘 우리에게 일러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곧 우리가 우리 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상처는 더 이상 부끄러움도 수치도 아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일로 힘에 겨워하는 영혼에게 위로자가 된다. ‘보는 바와 같이 나는 나다.’ 굳이 가릴 것도 꾸밀 것도 없다.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예수님은 숨기지 않으셨다(44). 그 이유가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48).” 곧 오늘을 사는 데 있어 나의 상처가 노래가 되게 하신다. 우리의 노여움이 찬송이 되게 하신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나는 이 말씀을 자주 음미하고 더는 나의 노여움을 숨기지 않는다. 상처 뒤로 숨지 않는다. 그러기를 위해 기도한다. 대놓고 나의 부끄러움을 내보이기도 하는 이유는 상처를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 주를 바람을 나타내고자 하는 거였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이와 같이 ‘상처 입은 치유자’로 산다는 일이다(49).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그러할 때,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50-53).”

 

그렇게 저는 다시 오실 것이다. 이미 오셔서 내 안에 계시는 이가 저이시다. 성자로 올려지시고 성령으로 같이하시다, 다시 오실 때에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이를 나는 상처 입은 영혼으로 알게 되었고, 상한 영혼을 가까이 하며 우리가 함께 주를 바라게 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 7:24-25).” 더는 흔들리지 않을 것을.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93:1).

 

하여 오늘을 사는 동안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곧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