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참 빛

전봉석 2024. 1. 12. 05:38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9-13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94:14

 

 

앞서 세 공관복음에서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를 진술하였다. 요한복음은 하나님 곧 신성을 지니신 메시야 곧 말씀을 강조한다. 마태는 예수를 구약의 메시아로 그 혈통에 따라 다윗의 자손임을 드러내었다. 마가는 특히 예수님을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 것을 진술하며 예수의 인자되심을 고증하고 이에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까지 그 족보를 연관 지었다. 요한은 이 모든 역사를 초월하시는 만유의 주재되심을 시작으로 하고 있다. 예수의 신성 곧 선재성을 강조하며 태초 그 이전의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 곧 말씀으로 특정하여 역사를 초월하는 선재하심을 강조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 하는 선언은 성육신 이전부터 하나님으로 사람 사이에 중재자로 구속의 역사를 선행하고 계셨음을 알게 한다. 이는 구약에서도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예언하고 있었던 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 7:3).” 하시는 바로 그 이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이를 우리는 그 어떤 지식으로도 정의할 수 없다. 이해와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범주의 세계다. 이를 요한은 “계시니라.” 하고 선언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에 따른 선재성은 모든 것의 시작 그 이전의 시작에서부터 존재하심을 강조한다. 모든 존재의 존재 이전부터 존재하셨던 그 영원무궁하심을 우리는 추측할 수도 없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요 3:31-32).” 그 어떤 증거도 필요치 않은 증거로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 이와 같이 말씀을 묵상할 때에 머리로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이해의 범주에까지 믿음은 맞닿아서 어찌 설명할 수 없다 해도 믿어지고 안도하게 되는 일이다. 그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언제나 늘 계셨고, 계시며, 계실 것이어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하실 때 이 영화를 우리에게도 더하시려고,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2).”

 

이를 오늘 요한은 선재적으로 접근하면서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2-3).” 고로 나는 오늘 그의 것으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4-5).” 나로 사는 동안 내가 알지 못하였던 순간에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2-13).”

 

아, 이 놀라운….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5-6).”

 

세상은 온통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우리로는 그들로부터 벗어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이 확신, 그 놀라운 내 안의 믿음에 대하여는 나 또한 설명할 수 없다. 이는 내 의지로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어서,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하신 데 대해 불가항력적으로 나는 붙들린다. 곧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어릴 적에 나는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아 힘들었다. 그것은 내게 두려움이어서 종종 죽음을 꿈꿀 때에도 그 너머 이 사실 앞에서 늘 망설여야 했다. 곧 어린 나로서는 모든 게 믿기지가 않는데, 지옥이 두려웠고 그 두려움의 근원은 ‘영원’이라는 시간의 범주 너머의 시작도 끝도 없는 계속됨이 두려웠다. 주일학교 시절인가? 중학생 때 나는 교회 선생님에게 이러한 나의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솔직히 하나님이나 성경은 믿어지지 않고, 그 내용은 이해도 할 수 없었지만 ‘어떤 두려움’ 곧 불신자로 가야 할 영생과 지옥에 대한 공포를 호소하였던 것 같다. 그때 저는 그 마음 자체가 믿음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신하게 해주었다. 믿음이 없다면 그러한 사실조차 두려워할 리 없다는 논리였다. 결국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훗날에 주 앞에 붙들렸을 때 내가 이미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하신 바 된 자였음을 확신하게 되면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2-13).” 하시는 오늘의 말씀 앞에 안도하면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분명한 사실 앞에서 나는 ‘참 다행이다!’ 하며 긴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한다.

 

우리 주 안에만 생명이 있음을,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 오늘 요한은 거두절미하고 말씀의 선재성을 들고 나왔다. ‘생명’ 곧 ‘영생’이란 단어를 요한은 유별나게 자주 사용하면서 그의 의도하는 바, ‘예수 안에 생명이 있다.’는 대명제를 잃지 않는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이로써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6:51).” 하면서 생명, 영생을 연거푸 드러내고 있다. 이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나는 가끔 감사하는 내용 가운데 우리가 서로 그렇겠지만 전혀 그럴 리 없는 친구 몇몇이 어느 순간 주의 말씀 가운데서 하나 된 것으로 신기하고 감사하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는데 서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았다. 속된 말로 할 짓 못할 짓 같이 하면서 겁 없이 하나님을 우롱하듯 살았는데, 오늘에 이르러는 서로가 어떻게 그처럼 주께 붙들려 말씀으로 씨름하고 말씀을 사모하며 주를 바라고 섬기려 하는지… 때론 나의 가장 난해하고 불가해한 일 중에 하나이다. 몇몇 읽지도 않는 나의 묵상글을 저들은 누구보다 꼼꼼하게 읽는다. 가끔 통화할 때 나는 나의 근황을 말하지 않아도 내가 어찌 살고 있는지 저들이 더 잘 안다. 오늘도 이 글을 어디선가 읽을 것이라 섣불리 말을 하기가 어려우나, 나는 저들의 기도로 오늘도 주신 사역을 감당한다. 이러한 나보다 더 복 있는 자가 있을까?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2).”

 

오늘의 나로 더러는 기운 빠지고, 이 길이 맞나? 싶은 회의와 갈등이 들다가도 저들을 생각하면 기이할 뿐이어서…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이 놀라운 사실, 더러는 서로가 모르는 사이여서 보이는 것으로만 서로를 아는 것과 달리 나는 나의 믿음의 친구들 앞에서 나의 그 어떤 치부나 죄악 된 모습도 감추지 못한다. 서로가 이를 즐겼고 그것으로 옳은 줄 알고 살았던 때도 있었다. 그래서 늘 만나면 서로 대화하다 문득 오늘 우리가 그러고 있는, 그럴 수 있는 이 놀라운 사실 앞에 감격하여 서로 울기도 한다. 아,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94:14).

 

오늘 시편의 이 한 구절이 가슴을 쿵, 하고 때리는 것 같다. 저가 오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우리로 은혜와 진리 가운데서 충만하게 하심이란, “은혜 위에 은혜러라(16).” 하여 나는 늘 혼자이고 교회는 아무런 성과나 부흥도 없다 해도, 그저 다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족하였다(23). 소리로 흩어져 남는 게 없다 해도, 어디쯤에서 혹은 누군가에게 들려질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 하는 외침으로 족한 것이었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말씀,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34).” 나는 이 외에 다른 것은 전할 게 없다. 그러므로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그것이 더러는 나를 모르는 이가 오늘의 나를 보고 좋게 여겨주는 것이야 그럴 수 있는 일이겠으나, 누구보다 나의 추함과 더러움을 다 보고 겪었으면서도, 우리는 만나 자신이 안고 씨름하는 일을 놓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어느 친구는 성경을 묻고 이를 더 알기 원한다. 어느 친구는 글방에서 예배를 시작하면서 오늘까지 교회를 이루어오는 동안 한결같이 헌금을 한다. 저의 후원은 나를 보고 하는 게 아니라, 나 같은 자를 이처럼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비롯된다. 더러는 내가 저의 형편을 잘 알아서 당장 어떤 일로 쪼들리며 힘에 겨운 것을 아는데도 저는 변함이 없고, 나는 송구하고 고마우나 말은 못하고 주께 아뢴다. 또 누구는 항상 날 위해 기도한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가 서로 그럴 사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같이 놀던 시절,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였으나…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누가 나만큼 주의 긍휼하심과 은혜로만 살았을까? 나는 한 게 없어서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6:19-20).” 비록 그럴 자격도 지혜도 없으나 나로 이제 남은 생애 동안에는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다른 무엇을 바랄 수 있겠나?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

(94:1).

 

여전히 죄악이 나의 마음을 휘젓고 여러 갈등이 나를 붙들려 할 때, 주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나를 붙들어 주소서. 그리하여 알게 하시길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8-9, 11).

 

하나,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14).

 

고로,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17-19).

 

그러므로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