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전봉석 2024. 2. 17. 04:48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행 16:14-15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 128:1

 

 

전날에 자신의 신앙을 두고 의구심이 들던 친구가 마침 이해가 안 간다면 보내온 본문이 누가복음 13장의 일부였다. 당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 몇을 죽여 제물로 바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저들이 그 일에 대해 묻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2).” 하시고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3).” 하셨다. 이어서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4-5).” 하시는 부분이었다.

 

저들이 회개하지 않아서 그리 제물로 죽어지고, 망대가 무너져 죽었는가? 하는 것인데, 우린 흔히 어떤 불행이나 원치 않는 일을 겪을 때 이를 두고 죄 때문이라고 여긴다. 즉 죄로 인해서 벌 받는 것이라 여기는 경우가 강한데 그렇지 않다. ‘무슨 일로’ 혹은 ‘무엇 때문에’ 하는 어떤 원인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른 어떤 이유와 목적을 염두에 두고 살펴야 한다. 곧 어떤 끔찍한 결과가 저의 죄 때문이라 한다면 성경의 여러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듯 말도 안 되는 고통 가운데 살았던 게 된다. 특히 경건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는 설명할 길이 없다.

 

욥의 경우와 같이 저가 당한 고난은 죄나 회개의 이유 때문이 아니다. 성경이 소개하듯이 저는 누구보다 경건하였고, 때마다 회개의 제단을 쌓아 자식들로 혹시 모르고 지은 죄에 이르기까지 경계하였다. 특히 우린 누구의 어떤 어려움을 두고 죄와 그 결과를 운운하며 비판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에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이어서 마침 과원지기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두고 주인의 결정을 미루는 내용에 대해 물었다(눅 13:6-9). 여기서 주가 주시는 지혜로는 전날에 친구가 자신은 그 마음에 열의가 없는 것 같고 남들처럼(?) 어떤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것 같아 답답하였던 심정에 답을 더할 수 있었다.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7-9).”

 

곧 포도원지기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의미한다. 이를 찍어버리라, 하시는 주인은 하나님의 공의로 여전히 어떤 열매도 없이 사는 자들을 두고 행하시는 결단이다. 오늘 우리가 이처럼 이 시간에 서로 전화로나마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자 하는 것, 새벽예배와 성가대 등 예배와 교회 봉사에 열심을 다하는 오늘 저의 변화되는 모습을 나는 열매로 놓고 설명하였다. 이성적으로는 아직 뚜렷하게 모르겠다 하나 이미 저는 그에 따른 결실로 주일을 지키고, 말씀을 더욱 사모하며, 주가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덩달아서 마음이 어려워져 저를 위해 기도하던 차에 저가 궁금해 하는 본문의 말씀으로 저의 어지러운 마음이 답이 되었다. 카톡으로 본문을 보내왔을 때 나는 주께서 이처럼 연관 지어 이루어가고 계시는 사실을 알 것 같았다.

 

오늘 본문에서 마침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행 16:14-15).” 이와 같은 만남과 그 연관성을 우연으로 놓을 수 없다.

 

또한 여러 날을 귀신 드린 자들로 인해 힘들어하다,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18).” 하고 귀신을 쫓아냄으로 귀신 들려 돈벌이를 하던 여종의 주인들이 고소하여 옥에 갇혔다. 그때에 매를 맞고, 옥에 갇혀 묶여 있을 때,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25).” 이에 옥문이 열리자 저들을 지키던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27).” 그런 그들을 살리자,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30-31).” 이에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32).”

 

이와 같은 연관과 그 연속성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자연스러움이다. 앞서 바울은 디모데를 세워 믿음의 아들로 삼았다. 저는 헬라인이었고 이에 유대인으로 그리스도인 된 자들이 할례를 요구하자 바울은 이 또한 서슴지 않고 시행하였다. 구원의 조건으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곧 어떤 일의 연결의 연관성은 자연스러워서 어려움이 겹치는가 했더니 그것으로 복음의 통로를 삼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0-13).”

 

어떻게 이런 일이 이와 같이 연결되어 서로가 하나 되게 하시는지 때로는 이해가 따라가질 못한다. 다만 우리는 그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데 전심을 다해야 한다. 어제 친구와도 그 시각 말미에 예전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고 교회도 믿는 일도 그만둘 수 있겠는지? 하고 물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그럴 수 있는 일을 그러지 않는 것이고, 그 어떤 경우에도 예전에 주를 모르고 살았던 일을 혐오한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당대의 바울과 같은 인물이 이와 같이 고백하는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저는 더해서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11:30).” 그 신분은 로마인으로 유대인이었으니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을 때리고 옥에 가두고 하였던 이들이 무서워했던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를 저는 이제 해로 여김은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더는 필요치 않고 더 중하지 않은 것을 위하여 우리는 정진한다.

 

친구는 애쓴다. 전날에도 한 시까지 성경공부를 준비하다 잠들었고, 새벽예배를 갔다가 출근을 했다. 나는 대단하다며 놀라워했고 실제 저의 열심을 그 안에 두신 것에 대하여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바울 또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 놀라운 고백이 오늘 저의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게 아니겠나? 비록 주 없이 살았던 날들로 너무 먼 길을 돌아온 듯하나 그 심령은 앞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6-8).”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일은 어떤 느낌이나 확신의 정도로 가늠할 수 없다. 혹은 당장의 어떤 결과로 증명할 수도 없다. 세상은 오늘의 성과를 결과로 여기지만 우리의 결과는 죽음 너머에서 주 앞에 설 때에 선명하여진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1-33).”

 

그런즉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시 19:9-11).

 

우리가 사는 시간은 이 땅의 것으로 한정된 게 아니다. 영생을 두고 볼 때 오늘을 보내는 시간은 미세한 먼지와도 같다. 그러므로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 16:13).” 하여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14).” 이에 사랑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우리의 우선이 무엇인지를 보면 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우선의 경우로 사랑을 짐작하듯이 주를 바라는 일에 있어서도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골 1:23).”

 

나는 종종 저가 친구여서 더욱 신기하다. 저도 나를 잘 알지만 나 역시 저를 잘 아는 터에 ‘저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하는 어떤 선입견에서 나의 놀라움은 두 배다. 이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 오늘 저의 속에 혹은 점심시간을 이용한 우리의 짧은 말씀의 시간이 귀하다. 끙, 하고 어디가 아픈데도… 또는 그 마음에 의구심이 여전하면서도 묵묵히 또 하루를 주 앞에 서게 되는 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나는 축복한다. 우리의 시간과 그 마음을 두고, 주가 함께 하심으로 서로가 알던 예전을 모습을 떠나 말씀으로 하나 되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물론 서로가 잘 아는 사이였든지, 전혀 모르는 가운데 말씀으로 하나 된 사이이든지… 이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12).”

 

믿음의 뿌리 위에 잘 자란 디모데였든지, 우연처럼 만난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라든지, 옥을 지키던 간수장과 그의 가족이었는지… 주 안에서 우리가 하나 되는 일, 이 모든 것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4-6).” 하여 나는 친구에게 또는 누구에게든지 자신 있게 권한다.

 

이 모든 일과 우리의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고,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그 목적은 분명하였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6).” 이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128:1).

 

다른 더 귀한 일은 없다. 하여,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2).

 

이에 따른 복은,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6).”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