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전봉석 2024. 2. 15. 05:33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행 14:15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시 126:3

 

 

우리의 변덕과 즉흥적인 사고와 행동이 스스로를 부끄럽게 한다. 이럴 때는 좋았다가 이럴 때는 나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했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오늘 말씀에서 이러한 우리의 속성을 마주하게 된다. 누구는 믿고,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1).” 누구는 악감정을 품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2).”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부화뇌동하다가는 주를 온전히 바랄 수 없다. 그저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3).” 무던함으로 담대할 수 있고, 자기 은혜가 있을 때 증언할 수 있다. 한 영혼을 대하고 저와 함께 한다는 일은 관용으로 가능하다. 저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그 잘못을 용서하는 힘이 관용이다. 주가 주시는 마음으로 우린 이에 순종할 뿐이다. 사람은 언제든 변하고 처음과 끝이 다르다. 무리 지으면 나뉘고 서로가 어느 쪽이냐고 다툰다.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4).” 이에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바울은 오늘의 이러한 일을 겪으면서 깨달은 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 하며 우리의 생각보다 가까우신 주를 바라보게 한다. 그러할 때 우린 기뻐할 수 없는 데도 기뻐할 수 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 이 놀라운 권능으로 ‘오래’ 꾸준히 주를 전할 수 있다. 요즘은 뭐든지 너무 쉬워서 사람이고 사물이고 오래 간직하지를 못한다. 그런 가운데 당시 시대적으로 다급하고 급변하는 때에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2년 동안,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 19:10).” 고린도교회를 1년 반 동안,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18:11).” 꾸준하게 가르쳤다. 수리아 안디옥의 경우 이방인들인 저희를 바라바와 바울은 1년이 넘게 양육하고 지도하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곧 우리가 진득하니 흔들리지 않고 맡기신 자리에서 그 일을 감당한다는 것은 능력이다. 주의 능력으로 하는 일이다. 사람을 보내고 안 보내고, 어떤 일을 맡기시고 안 맡기시고는 그 다음의 일이다. 나는 종종 이 일을 다짐하듯 생각한다. 노아의 120년 방주 짓는 일이나, 아브라함의 25년 약속의 씨를 기다리며,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걸어갔던 길이나, 모세의 막연하였을 미디안 광야 40년의 세월이나… 그런 가운데서도 주를 바란다는 것은,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렘 33:2).”

 

비록 더딜지라도 반드시 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주의 약속이 자신들의 살아생전에 이뤄지지 않는데도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무던할 수 있다. 내가 늘 되새기는 구절로, 욥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죽이실지라도 살리시려는 것을 믿었다.

 

오늘 바울과 바라바는 그런 가운데서 사람들의 나뉨과 분열, 이분오열을 알면서도 참았다. 금세 바뀌어 변덕이 악감정이 되어 돌로 쳐 죽이려는 데도 멈추지 않았다.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15).” 또한 즉흥적이어서 걷지 못하는 자를,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10).” 이에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11-12).”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13-15).”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부끄러움과 동시에 실망스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나 역시 다를 바 없다는 데서 혹은 누굴 신뢰하다 얼토당토않을 때, 우린 그저 기적을 바랄 뿐 정작 하나님을 바라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행 2:22).” 이를 아무리 알린다 해도,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히 2:4).” 과연 우린 하나님을 바라는지, 하나님의 은혜? 축복? 넘치는 은총만을 구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천국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함께 누림으로 천국이다. 지옥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하나님이 그곳에 함께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가끔은 하나님이 아니라, ‘~의 하나님’을 원하고 바라는 것은 아닌지?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그러므로 복을 주실 것이라 생각하고, 이에 일갈하시길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2:51).” 어쩌면 사람들의 모임에서 분열이 생기고 갈등이 속출하는 일은 당연하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바울과 바라바가 옷을 찢으며 분개했던 것도 사람의 어리석음으로 탄식하여 자신들을 신이라 여겨 우상을 섬기듯 하려 할 때였는데, 실제 요즘은 어떠한지? 소위 유명한 목사님이나 저의 설교, 책자 들을 사고팔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흩어지길 반복한다. 곧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17).” 누가 아무리 훌륭하여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저의 희생이든지, 헌신이든지, 업적이든지 그것을 우선하여 위하고 따를 때 이는 모두 우상이다. 바울이 절규한 까닭은 자신들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예수님도 이를 경계하시며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막 5:18-20).”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의 한계를 느낀다. 그럴 수 있겠으나 그럴 수밖에 없는 어리석음을 두고 나는 무던하기를. 진득하여서 오직 주를 바람으로 말씀만으로, 주의 사랑으로만…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6-9).”

 

혼자 있다가, 때론 이렇게 있어도 되나 싶어질 때에 말씀 앞에 앉는다. 노아와 아브라함과 그 외 성경의 사람들을 생각한다. 에녹이 함께 하였을 3백 년 동안의 하나님과의 동행을 생각한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친구는 결국 다음 주 토요일에 아픈 모녀와 함께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인천으로 오기로 했다. 무엇을 어찌 해야 할지 우리는 알지 못하면서도 그러자고 하였다. 어제는 아이와 앉아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데, 이어지다 끊어지고 끊어지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는 내용으로 웃었다. 나의 웃음은 우리의 일반적인 대화나 생각과 일상과는 별개로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에 있느니라(잠 15:31).” 그러할 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33).” 주를 대하듯 아이를 대한다.

 

어떤 일을 두고 그리 두시는 이를 생각한다. 믿음으로가 아니면 우리는 갈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러할 때에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믿음으로가 아니면 행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시 101:6).

 

어쩌면 우리의 홀로서기는 믿음의 기본이다. 주를 바람으로 외로운 싸움도 마다하지 않고 무모한 결행도 감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 16:13).” 그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28).” 하루 동안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 그 증거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러므로 낮아진다. 결코 자신들을 높이지 않는다.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행 10:26).” 또한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14:14-15).” 사람들이 높이려 할 때 이를 마다할 수 있는 용기, 나는 가끔 아무도 내게 인사가 없고 어떤 대우가 서운할 때 오히려 안도한다. 이런 말이 여기에 어울리는가 모르겠으나, 그래서도 가급적이면 없는 듯 있는 듯 존재감 없는 대상으로 족해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를 알면 알수록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행 14:19).” 사람을 의지하거나 신뢰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것도 없다. 다만 주를 전하고 주와 함께 할 뿐, 사람은 사람이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126:1-2).

 

주를 사랑하고 찬송할 수 있는 것으로,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이는 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내가 영원히 살리라 하였노라(신 32:39-40).” 오직 주를 바란다는 일,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3).

 

내게 향하신 주의 큰 일을 나는 기뻐한다. 나로 이 자리를 지키게 하심으로, 말씀 앞에 앉히심으로 족하였다.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저를 어찌할 수 있는 몫은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다만 나는 전하고 듣고 같이 주를 찬송하며 바랄 뿐, 그리하여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