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전봉석 2024. 3. 10. 03:18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10, 13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 150:6

 

 

우리의 찬양은 주를 부르는 것이다.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는 것으로,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4-15).” 하고 바울은 오늘 본문으로 전한다. 믿지 않으면 어찌 부르고, 듣지 못한 이를 어찌 믿으며, 전하는 자가 있어 들었고, 보내심을 받았으므로 전한다고 한다.

 

오늘 나의 이 글쓰기를 사랑하는 이유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서로가 인정할 수 있어서 기쁘다. 그게 어려워지면서 가까웠던 친구도 좋아했던 사람도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그러므로 나의 이 열심이 억지가 아님을. 눈을 뜨기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교회로 나아오는 일, 누구의 어떤 일을 두고 같이 주 앞에 아뢰는 것. 내 곁을 같이하는 이의 구원을 위한 애타는 마음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이에 “내가 어찌 내 민족이 화 당함을 차마 보며 내 친척의 멸망함을 차마 보리이까 하니(에 8:6).”

 

이는 종교적인 열심으로가 아니다. 기독교는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이지 않다. 곧 우리가 바라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러므로 바울이 되어 사울이었던 시절을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6).” 하고 회상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하는데 이는 이제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7-9).”

 

오늘 내 안의 이 소망, 이 진리도 그러하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의다. 내가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찾으셨다. 노아를 찾으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모세를 보내신 그 하나님이 나를 끝내 붙들어 세우신 것으로 안다. 그러므로 나의 의를 세우려는 열심이라면 이 이른 아침의 시간은 허사다. 하나님의 의를 알 수 없다. 내가 선택한 하나님으로 내가 찾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주를 대신하는 다른 필요를 따라간다.

 

내가 교회 안에서 정치와 다단계를 반대하는 이유는 그래서다. 정치는 언제든 명분에 따라 바뀌고, 다단계는 이익을 우선하여 좇게 돼 있다. 그것으로 성도가 하나 된들 언제든지 나뉠 수 있고 갈릴 수 있다. 좌우지간 나는 사람의 모임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하는 말씀 앞에 서는 것이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죄인인 것을 알 뿐이다. 그럼에도 행함이 있는 믿음을 위해 길라잡이가 된다. 곧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그러므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곧 자신의 어떤 열심, 그 자신의 선을 추구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알 수 없다. 내가 아는 한 그 누구도 하나님을 정의할 수 없고, 말씀이 아니면 길이 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신 30:11-14).”

 

이는,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14).”

 

나는 이 놀라운 신비를 증명하지 못한다. 내 안의 믿음을 나는 설명할 수 없다. 왜 내가 주를 믿는지, 그 하나님을 어찌 전하고자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오늘 바울과 같이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그냥 그리 되는 것. 나는 저 사람이 싫은데 그를 가까이 하고, 주의 사랑으로 대할 수밖에 없는 어떤 마음으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9).” 오늘 이 복음이 참 신기할 따름이다.

 

하여,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

 

하심과 같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

 

하시는 것은 이 일이 우리의 뜻과 나의 신념에 따른 게 아니라는 증거다. 믿음과 신념을 굳이 구분하려는 이유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요 4:41-42).” 고로 내가 누구에게 전함이 되는 것은 ‘광야의 외치는 소리’ 같이 들렸다가 사라져도 된다. 나는 없고 말씀만 남는 일.

 

그런 점에서 나는 교회가 어느 사람을 기리고, 기념하는 것을 경계한다. 저는 없고 말씀만 남아서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15).” 그뿐이다. 나를 잊지 말라는 게 우습다. 서로를 기념하는 게 그릇되다. 자칫 그 사람을 신격화하여 저의 신전이 따로 있는 몰골과 같다. 그런 델 찾아가 유적지로 삼는 게 어리석다. 예수님은 그 때문에도 일체 남기시지 않았다. 그런 것을 굳이 저가 입으셨던 옷이나 작은 단서 하나라도 찾아내어 이를 기념하느라 기리는 것을 볼 때면 우상화, 신격화란 게 그처럼 무서운 것을 알겠다. 하여 나는 사람을 두고 성인으로 추대하는 일을 멀리한다.

 

우린 다만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이에 오늘 본문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그 자체로 이미 다한 것임을 강조한다. 베드로와 같이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하는 고백이 중요하지 베드로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그러므로 내가 이 글을 쓰나 나는 없고 말씀만이 드러나기를. 나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만 들려지기를.

 

도마의 고백도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저의 고백으로 처음 예수를 하나님이라 하기 시작했다. 그런 도마가 중요한 게 아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 그것이 핵심인데 그저 사람들이란 서로를 추대하고 추앙하여 기념하고 기억하기를 좋아하니…. 어쩌면 우리의 한계는 거기가 아닐까? 가령 누가 나의 뜻을 몰라줄 때 더는 서운해 하지 않을 것은 나를 기억하게 하려함이 아니요 주의 뜻이 전달되기를 바랄 뿐이어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그저 우리는 감사함으로 족하였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우리 믿음의 출처이고 전부이다. 더는 내가 나서거나 기억되는 것은 옳지 않다. 즉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그러므로 예수가 전부이고 다른 무엇도 필요치 않다. 사람에게 서운해 하다 굳이 그럴 게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람이란 본래 좋았을 때나 좋은 것이다. 지나는 바람 같아서 그것으로 족하다. 이에 세례요한은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하신 이 사명으로 다하였다.

 

누가 글을 쓰고 나는 저의 근황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아이가 연락이 닿지 않아 우려하다 어디 있는 것을 알고 안심한다. ‘아픈 아이’, ‘상한 심령’이라 해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 대하여 나는 어찌 설득시킬 수 없다. 다만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왜 그러지 하고 저를 이상히 여길 것 없다. 우린 모두 상한 심령으로 주 앞에 선다. 서로가 이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할 게 아니라, 그럴 수 있어서 우리는 주가 항상 필요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하고 이어지는 말씀과 같이 믿음으로 부를 수 있고, 들음으로 믿게 된 것이며, 들은 것을 전파하는 것이고, 보내심을 받았음으로 그리한다. ‘아,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그러므로 나의 하루를 사랑한다. 내 곁의 한 영혼을 귀히 여긴다. 저로 인하여 내가 산다. 이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7).” 이 당연하고 놀라운 진리 앞에서 아멘이다. 이를 바울은 성경으로 근거를 삼아 논증한다.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20-21).”

 

나의 글쓰기는 물론 말하기도 이와 같아서 말씀으로 근거를 삼아 전하여지기를 소원한다.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시 34:5).

 

곧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하여 나의 날은 지금으로 전부가 아니라, 그날을 위해 지금은 준비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7-10).”

 

하여,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1-14).”

 

나는 이제 살면서 나의 남은 날 동안에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14).” 하시는 말씀으로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란다. 그러할 때에,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150:1-2).

 

오늘도 이른 아침 교회에서 말씀을 앞에 놓고,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3-5).

 

이는 내가 사는 동안에,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