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전봉석 2024. 4. 13. 05:11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12:7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시 34:9

 

 

우리로 어떤 어려움을 겪게 하시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자만하기는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이다. 순간 마음이 어지러울 때 나의 판단과 의지는 무서울 정도로 나의 영혼을 억압한다. 그럴 때 우리의 동기는 항상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뤄져야 한다.

 

가령 아이를 대하면서 능숙한 아이의 능청에 놀란다. 왜 굳이 아이를 홈스쿨링이라는 명분으로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 했는지 알 것 같다. 아이는 그만큼 산만하고 엉터리로 자기 일에 요령을 부렸다. 몰라서 틀린 단어가 아니라 아무렇게나 써서 그리 된 것을 두고 아이는 능청을 떨었다. 그 단어의 받침이나 철자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엉터리로 써놓고 마치 무엇이 문제인가? 하고 딴청을 부렸다. 나는 또래 아이들과의 어울림이 필요하다고 아이엄마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저들 모자는 왜 꼭 그래야 하는지? 되묻는 것이다.

 

한 달쯤 아이를 보면서 그 가정의 숨은 사실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능청을 떨어도 아이는 아이다. 나는 이들을 어찌 다루어야 하는지, 각각 자신들의 판단으로 단단한 것을 두고 내가 뭐라 하는 게 옳은지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꾸만 주 앞에 빈다. 뭐라 할 수 없는 이들의 사연을 두고 내가 씨름한다고 될 일이 아닐 거였다. 거기에 곧 선교여행까지 다녀와야 한다니, 중구난방 모든 게 뒤죽박죽인 듯하여 나는 어지러웠다.

 

이 일도 사역으로 주가 맡기신 것이면… 이세벨을 피해 숨었던 엘리야의 심정이 그러했을까?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9-10).”

 

우리가 어떤, 더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심정으로 숨을 곳을 찾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4-5).” 주의 보살피심이 있기를.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 2:17).”

 

컵라면에 김밥을 먹고 보냈는데, 저들이 벌여놓고 간 곳을 치우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아이나 아이엄마나 저들의 부산스러움과 과한 행동은 나의 정신을 쏙, 빼놓고 간 것 같았다. 아, 하고 느껴지는 어떤 어려움. 서로가 서로로 인하여 참 많이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왜들 그렇게 부산하고 어지러운지 알 것 같았다. 자신들도 아는 듯 조증은 아닌지? 하고 너무 과한 몸짓과 말투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런저런 이유로 통화를 좀 할까 하다 생각을 더 두기로 하였다.

 

우리 영혼을 가꾼다는 것,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34:17-18).

 

나로 주께 아뢰어 주를 의지하게 하시려고 일련의 일들을 맡겨두시는 것을 안다. 깊은 물과 무거운 짐수레는 오히려 소리가 나지 않는다. 얕은 물과 가벼운 수레가 요란하다. 수선을 떨고 있는 아이와 보란 듯 통화를 하며 선교를 준비하며 서로 통화하는 아이엄마의 각자 모습에서 나는 어떤 증상과 그 원인을 알 것 같았다. 누구의 어떤 잘못이 아니라 그게 일상이다. 보다 못해 정신없다고 하자 집에 밥그릇이 다 깨지고 서너 개밖에 안 남았다는 말에 저들의 어지러운 현실을 알아들을 것 같았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49:6-8).

 

스스로들 자신들이 하려는 것에는 거듭되는 오차의 범위가 넓다. 아이의 조증 같은 흥분과 엄마의 두서없는 행동을 지켜보면서 서로가 겪을 난간함을 추측할 수 있었다. 저들이 돌아가고, 친구와 통화로 말씀을 나누고, 난장판이 된 식탁을 치우고 바닥을 닦고 나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순간 드는 생각은 못하겠다, 하는 심정뿐이었다. 천국과 지옥은 현실이다.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4:10).”

 

아이는 글에 언급된 내용 이상으로 아빠가 TV를 덜 보고, 게임 좀 그만하고 살 좀 뺐으면 좋겠어요, 하는 말이 가슴 저리게 다가왔다. 다 안다. 지켜보고 있고 이를 염려하고 있으며 두려우면서도 잘못이란 사실을 아이도 알고 있는 거였다. 네가 그렇게 말씀드려 그럼, 하고 슬그머니 거들자 아이는 대뜸, 혼나요! 하고 그 상황을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외면하였다. 그럼 엄마하고 이야기를 해봐! 하고 나는 슬쩍, 아이를 떠보았다. 그러자 아이는 소용없어요! 하고 체념한 듯 엄마를 안타까워하는 것인지 한심하게 여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열한 살 아이의 눈에 아빠 엄마의 한계를 이미 간파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리 비춰지고 있는 듯하였다. 아이의 원고는 엉터리였고 그 말은 두서없었으나 속내는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저의 생활은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바울이 체험하였을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 12:2, 3).” 반복적인 저의 언급을 되새기게 한다. 관찰자로 놓고 자신을 통찰하듯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4).” 하고 두려움 섞인 서술 앞에서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여러 모양의 삶의 형태를 우려하다 주께 아뢴다.

 

아내와 잠시 그 일을 말하였더니 아내 역시 맡고 있는 아이들이 죄다 그래서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 하고 서로가 마음이 답답할 뿐이었다. 아이들이 지고 사는 세상의 무게가 엄마들의 착각의 범주에 비례한다. 부모들은 괜찮다고 하니 거기다 대고 자꾸 뭐라 말해줘야 하는지… 그저 그러려니 하고 놓아두어야 하는지… 회피하고 돌아서야 하는지… 어제는 종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으로만 하기 싫어하였다. 아,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전 15:53-54).”

 

주가 아니시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어서… 오후께 동생의 전화를 받고 억울하나 빚을 내서라도 돈을 돌려주고, 부당하나 저에게 오히려 사과하며 마음을 다독이려 하는 오늘의 노력이 눈물겨웠다. 우리가 주의 사역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같이 죽기 살기로 진흙탕 싸움을 벌여도 시원찮을 문젠데! 마땅히 여기는 저들의 피해망상과 과대망상은 답이 없다. 자신들이 그려놓은 허상으로 저들은 이미 그 세계가 구축되었다. 사는 게 지옥이라, 이를 불쌍히 여기며 주의 이름으로 호소할 뿐이어서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 20:10, 14).”

 

사는 게 지옥인 듯 저들의 삶을 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길은 더욱 더 주를 경외함이었으니,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고후 12:6).” 이는 곧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7).” 오늘 우리의 어려움은 우리를 자제하게 하고 단련시켜서 천국의 자녀로 양육하시는 일이었다.

 

하여,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8-9).”

 

내 육신의 어려움으로 또는 오늘 맡기신 이런저런 일을 두고 주께 아뢸 때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고 주가 이루시는 놀라우신 뜻을 살피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10).” 차마 기뻐하기까지는 아직 수련이 덜 돼서 모르겠으나 참고 또 인내하게 하시는 이의 뜻은 알 것 같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만둬야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오늘은 이 아침, 하는 데까지 해보자, 하는 마음을 더하시는 걸 보면….

 

내가 하는 게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아직은 내게 힘이 들어가 있는 걸 보면 아직 주께 다 맡기지를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어지럽히고 간 자리를 치우고 설거지를 하면서, 그래도 또 살아야 하고 감당해야 하는 저들의 몫을 생각하며 안타까움이 들기도 하였다. 오후께는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 저의 글쓰기를 핑계로 근황을 묻고 들었어야 하는데 거기까지는 못할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갔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는 일, 주의 마음으로 저들을 마주하고 섬긴다는 것은 여간 진이 빠지는 일이 아니다. 그저 친절한 타인으로라면 그러려니 하고 말면 상관없겠는데,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4:1-2).

 

주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데 있어 나의 삶은 표본이 되고 스스로에게도 거름종이가 돼야 한다. 이처럼 말씀 앞에 앉추시고 있었던 일을 돌아보며 주를 바라게 하시는 것으로 나의 간절함은 주를 송축하는 일이 되는 것이겠거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그러므로 내가 하려 하지 말자. 주께 맡기고 또 맡겨서 주로 하시게 하자.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다만 나는 저의 소리로 흩어져도 좋고, 그저 같이 있는 증인으로 족하였던 것이어서, 그러므로 주 안에서 거듭난 삶이란 이로써 주를 경외하는 일이었으니,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6, 8).

 

이에,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9).

 

오늘도 내일도 내게 필요한 단 한 가지, 주를 경외함이었으니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