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전봉석 2024. 4. 14. 04:39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후 13:5

 

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시 35:13

 

 

말씀을 바탕으로 사실을 가지고 판단하고 분별할 수 있기를. 더욱이 누구로 인하여 마음이 어려울 때 그를 향한 나의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온다는 사실. 그로 인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하는 말씀 앞에서 하나마나 한 일은 주가 내 곁에 두지 않으신다는 확신을 한다. 이는 곧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3-5).”

 

그러므로 어떤 일로 혹은 누구로 인하여 내가 스스로 볶일 때 이는 복이었다. 어떤 이의 어떤 일을 두고 그러려니 별로 감흥이 없다면 기도도 없을 터, 안타까움으로 혹은 슬프고 또 안쓰러워서 화가 또 슬픔이 밀려들기도 할 때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세상이 말하는 상담을 하지 못한다. 나의 병적인 감정이입을 내가 이겨내질 못한다. 그저 남의 이야기로 그런가보다, 하는 마음이어서 '입바른 소리'로는 무슨 말인들 힘을 더할 수 있을까?

 

연속으로 글을 올리는 누구의 글을 읽으면서 저의 막힌 담을 생각하였다. 아이 일로 혹은 자신의 판단으로 미뤄 어려워하는 것을 두고 신경이 쓰이고 같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때 기도가 나온다.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같이 느낄 때 내가 살고자 주 앞에 구하는 일이었으니, 인내와 인애 곁에는 엄격함이 있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말씀은 스스로를 시험하라고 권한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이를 알리는 것이 오늘의 판단이다. 그리로 행함이다. 내가 어쩔 수 없는 나는 나의 통제 밖에 있다. 나의 통제 밖에 있는 나를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수밖에 없다. 주여 나를 도우사….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내가 허물이 없으나

그들이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어 살펴 주소서

 

(시 9:13, 35:22, 59:4).

 

주밖에 누구에게 도움을 구할 수 없을 때 인내와 인애는 나를 꿇린다.  주 앞에, 말씀 앞에 앉힌다.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도우심을 바라며 주께 향하는 시선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은 나로서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어서 나로 하게 하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행 5:11).” 그렇게 하여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딛 2:15).” 누구의 일을 두고 그저 뭐라 할 때 입바른 소리로는 힘이 없다. 저로 인하여 내가 못 살겠을 때,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죄에 대하여 단호해진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20).”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예수님은 단호하셨다.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24).” 그러므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13).” 이를 들으면서 행여 나는 어떠한지, 나를 돌아보게 되는 것도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15-16).” 그러므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25).”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내가 두려운 것은 '나는 아니라고 자신할 수 없어서이다.' 나는 어떠한가? 하고 돌아볼 때 누구에게 권하고 나무라던 말이 실은 내가 들어야 하는 소리였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전 5:4-5).”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할 줄 알고 이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주를 경외하는 것이었다.

 

누가 글을 쓰면 카페에서 알림이 뜨게 했다. 어제는 같은 사람의 글이 연속으로 두어 편 올라왔다. 꽤 긴 장문의 내용이어서 산책을 하다 어디 앉아서 읽었다. 화사한 봄날에 읽기에는 너무 가슴 아프고 답답한 내용이었다. 벌써 두어 주 전의 일을 두고 내심 마음을 어렵게 하고 있었는지, 뜬금없기는 하나 어느 모임의 단체 앞으로 어떤 내용을 남긴 것이었다. 그래놓고는 그것이 옳은지 혹은 옳지 않는지, 자신이 지금 잘하고 있는지 잘못하고 있는지, 그러한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마치 답을 달라는 신호 같아서 나는 전화를 했다. 그것도 벌써 꽤 시간이 지난 일을 두고 느닷없기는 하여, 무슨 일인가? 하고 물었다.

 

저는 늘 너무 자신을 잘 안다. 내가 하려는 말을 먼저 스스로에게 다 하고 있다. 그러니 알면서 그러는 것이어서 그런 저를 두고 뭐라 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이다. 나는 저를 판단하거나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자기 믿음을 시험하여 보라는 오늘 말씀처럼, 과연 우리 안에 주를 믿는 믿음이 있기는 한 것일까? 아이로 인해, 혹은 살림살이를 두고, 이도저도 아닌 자신의 엉거주춤한 우유부단함으로 행여 주의 일을 그릇되이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에게 묻다 내가 대답을 못한다. 저에게 묻던 말이 나에게로 돌아올 때면 말이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애 3:40).”

 

아,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이것이 주를 경외하는 자의 돌이킴이겠으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7-20).”

 

자기와의 싸움이 치열하였다. 그러할 때 남을 사랑할 수 있는 힘도 명분도 생겼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후 13:11).”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 이는 평안으로 서로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는 일이었다. 거룩함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다.

 

J. C. 라일의 <거룩>을 읽으면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아, 모세의 이러한 사랑으로 주는 저를 지도자로 삼으신 게 아니겠나? 곧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고후 13:3).”

 

누구를 사랑하다 나를 돌아보며 부끄러워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다 내가 부끄러워 주 앞에 고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그러니 확인하라는 것이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5).”

 

어쩌면 우린 너무 스스로를 확신하며 살고 있고, 확신을 신앙으로, 믿음으로 착각하여 신념으로 넘겨보는 것은 아닐까? 이때에 바울도 얼마나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는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그렇게 우리 주님도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약하였으나 주의 강하심으로 살리신 게 아니었던가?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고후 13:9).”

 

내가 저보다 나은 게 있고 무엇이 그래도 나아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나의 약함으로 저가 강하여져 주의 일에 온전히 자신을 드려 그 사명을 다할 수만 있다면….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밖이라 길게 통화하기가 그래서 우선은 중단하였다. 실은 다 했던 말이고 저가 더 잘 아는 자신의 이야기라 내가 굳이 더할 것도 없었다. 들어가서 전화하겠다고 해놓고 나는 하지 않았다. 나는 저가 그 일로 괴롭기를 바란다. 힘에 겨워 주 앞에 엎드러지길 바란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삼 1:3-4).”

 

그러므로 나는 저 두 부부가 주의 사명으로 바로 서서 그들 남은 생애가 온전히 주의 쓰심이 합당할 수만 있다면, 나의 오늘이 이 약함도 복이다. 저들로 민망하고 부족하기 그지없는 나의 날들이 부끄럽지 않다. 부디 오늘의 안녕이 주가 하루 더, 하루 더, 참고 기다리시는 일이었으니,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 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사 30:17-18).”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

(35:1-2).

 

주께로만 구할 수 있는 것은,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9).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