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전봉석 2024. 4. 16. 05:0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시 37:3

 

 

주어진 날을 사는 동안 어떤 기준, 그 중심을 두고 사는 것에 속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엄청난 사명은 사는 일로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우리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하는 고백을 하게 하신 이가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그러므로 우리가 각자 교회인 것을,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그러니 주어진 이 몸을 가지고 사는 동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하심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이 막중하고 엄청난 일, 돌이켜보니 어느 것 하나 주의 은혜가 아니었던 것이 없다.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겪고 무슨 일로 씨름하고 살아왔던 날들에 있어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3).”

 

그러므로 이와 같은 생각하기, 무엇으로 열심을 다하기 등 주의 영이 하시는 일이었다. 친구와 통화하면서 서로가 주를 바라고 그에 따른 성경암송이나 성경공부에 대해 격려하고 축복하는 것은 주관적인 체험으로만이 아니라 서로가 알게 하시는 공통의 하나님을 사모하는 일이었다. 하여 어느 훗날에는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곧 우리가 열심히 하는 어떤 노력으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 모든 일은 이루어져 왔고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안다. 같이 어떤 일을 두고 대화하고, 누구의 일을 놓고 주 앞에서 자신을 비춰보는 일,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요이 1:8).” 이를 위하여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9).” 그러므로 이제 분별한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10).”

 

주의 길을 간다는 것은 주신 날을 사는 것으로 곁에 두신 이와 함께 동행하며 가는 것이었다. 서로는 주를 경험하고 각자의 경험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나아간다. 그러할 때 진리가 아닌 것을 분별하여 멀리할 수 있고, 설령 내 뜻 같지 않다 해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하나님이 우릴 도우실 것이란 믿음. 그러나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어제는 우연처럼 누구와 통화하며 저를 격려하고 나는 일부러라도 선을 그었다. 더는 뭐라 관여하는 게 옳지 않은 듯하여 같은 말로 서로가 소비적인 대화를 굳이 할 게 없었다. 받아들이지 않는 일에 대하여는 내 몫이 아니고, 설령 받아들였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주가 하신다. 주로 하시게끔 주를 인정할 때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그러니 어떤 때는 뜨겁게 사랑하고 어떤 때는 차갑게 절제하는 것이 지혜였다. 곧 여호와를 경외함이란 주가 이루실 것을 아는 것이다. 내가 어찌 하려하는 모든 수고와 노력이 헛되었고 우상을 필요로 하였다. 어떤 이가 아이 일로 전전긍긍하는 것 같은데 실은 자신의 불안과 염려를 그리 투영하고 있던 것이다. 이를 말하면 저도 안다. 알면서도 그리 아니할 수가 없다. 하나님을 경외함이란 모험이다. 끝나지 않을 길이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도 가야 하는 길과 같이, 그러나 분명한 진리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 37:23-24).

 

나의 가는 길이 그러할 것은 내가 걸어온 길이 그러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알았다 하는 것은 전엔 그게 우연인 줄 알았고, 더러는 내가 수고하고 애쓴 것이라고 고집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이 놀라운 사실을 알면서 내 안에 두신 이 믿음보다 확실히 귀한 게 또 있을까? 하는. 왜 나로 믿게 하시는지 알 수 없으나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5-17).”

 

이런 대화를 친구와 나누고 서로 그 경험을 말하며 주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사이라는 게 얼마나 귀하고 큰 축복인지…. 점심 때 아이가 오고 같이 중국음식을 시켜 먹었다. 요즘은 배달문화가 다양해서 편리하기는 한데, 일일이 그것을 치우고 씻고, 버리기 아까워서 다시 쓰려고 빈 그릇을 말려두었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음악을 듣거나 무슨 말을 걸기는 했는데 반은 알아듣고 반은 못 알아듣는 말이었다.

 

아이가 돌아가고 얼마 후 우연처럼 어떤 이가 전화를 걸었다. 잘못 눌렀다고 하는데, 덕분에 아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현과 우울과 지적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아이의 이야기로 늘 우리의 대화는 제자리걸음 같다. 어제는 앞서 다녀간 아이 이야기로 얼마나 좋아지고 나아졌는지, 그러기까지 여러 번 시행착오가 있었고 그럼에도 오늘에 와서는 일반적인 사회활동이 가능한 것을 두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애도 그 정도만 됐으면 좋겠어요.’하는 저이의 말에 그러기까지 엄마가 문제인 것을 말해주었다. 이런 말은 하는 이나 듣는 이가 모두 껄끄러운 이야기다. 그러나 또 서로가 사실인 걸 안다.

 

늘 같은 일상이라며 그나마 글쓰기가 시들하여 몇 차례 격려하다 더는 말을 않던 것인데, 어제는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엄마가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정신 차리시라, 하고 대놓고 말했다. 우울인데 언제까지 그렇다며 그냥 있을 것인지. 그러면서 아이 일로 남을 부러워하면서 정작 자신은 늘어져서 아무 것도 않고 가라앉은 채 늘어져 일어날 생각을 않고 있으니… 어쩌면 또 했던 말이었을 것을 나는 이제 그만하려는 듯 알아서 하시라는 듯 정면으로 표현하였다. 늘 같은 소리란 몰라서가 아니다. 의지의 문제도 아니다. 오늘 그 날, 주신 한 날의 사는 일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지를….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전 12:24-25).”

 

부모로서 혹은 친구로 성도로 우리가 한 지체가 되어 산다는 일은 나를 위해서도 물론이고 너를 위하여도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 2:1).” 나는 아이가 와서 이런저런 말을 한참 할 때 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같이 응대하고 저가 머물다 가는 것으로 족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또한 누구와의 통화를 끝내고 저의 다음 이야기는 저의 몫으로 나는 그 다음에 어디에서 어떻게 등장할지 혹은 그만일지 알 수 없으나 주가 하실 것임은 분명하였다. 주가 이루셔야 한다.

 

우리의 다양함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갈 2:6, 8).” 이때에 우리가 주의할 것은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4).” 내 안에는 물론 우리 사이에서 그의 역할은 분쟁이고 다툼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5).”

 

결국,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4-5).”

 

서로가 살아온 날이 다르고 사는 환경도 다르지만 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두고 한 몸을 이루며 사는 일에서는… 이런저런 일로 연결이 여러 사연을 두고 나는 저들을 주께 아뢴다. 곧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늘 하나마나 한 소리 같으나 다시 권면하고 위하여 격려하는 데 있어 지치지 않기를. 그러면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3-4).”

 

때론 이러는 게 맞나? 싶다가도 맞고 틀리고, 내가 관여하지 않을 것은 나로 하게 하신 이가 내가 알지 못하는 때가 포기하지 않고 일하고 계신다는 거였다. 나는 권했을 뿐이고, 누군 이끌어서 앞서 저이가 지난 주일부터 무슨 성경공부를 참여하고 있는데 아이도 그 시간 갈 데가 없기도 해서 같이 하는가? 좀이 쑤셔 들락거린다는 말을 하면서도 서로가 기뻐하고 응원하였다. 이걸 어찌 설명할 길 없으나 마치 서로 맞물린 기계처럼 복잡한 것 같으나 길은 하나였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내가 하는 것도, 아는 것으로 이룰 없는 믿음으로 그리 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 이 놀라운 고백과 함께 그와 같은 삶을 사는 일로 하나가 될 때,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37:3).

 

주께서 행하시는 일이었다. 내가 하는 줄 알았던 것도 해야 할 일도 주께서 우연이라는 놀라운 익명의 손길과 환경으로 필연을 이루고 계시는 것이었는데,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5-6).

 

그리하여,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7).

 

어려우나 어려워 할 거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그들의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18).

 

주가 이루시는 것을,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23-24).

 

이를 붙들고,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