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그들과 그들의 신들과 언약하지 말라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은 그들이 너를 내게 범죄하게 할까 두려움이라 네가 그 신들을 섬기면 그것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
출 23:32-33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시 52:9
우리 곁에 항상 거짓이 있다. 내 안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하다. 마치 죄가 들어왔을 때 아담도 하와도 거짓으로 탓을 다른 이에게 돌린 것처럼, 거짓은 또한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더 큰 거짓으로 앞에 거짓을 덮으려하듯,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거짓과 거짓을 다하여 수레를 끌 정도인데,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사 5:18-19).” 자가당착에 빠진 사람이 그러하다.
오늘 본문은 그와 같이 허황된 풍설에 기대거나 전파하지 말라고 한다.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출 23:1).” 풍설이란 떠도는 말로 더욱이 요즘같이 온갖 미디어가 난무한 때에 가짜뉴스가 진짜보다 진짜 같은 법이어서 서로는 그 말을 뱉고 본다. 근거가 있고 사실에 따른 것인지 어떤지 확인도 않고 누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가보다 하며 여기저기에 말을 보태서 전파한다. 그뿐인가? 소위 민주주의라 하는 데 있어, 민심이란 오락가락하는 바람 같고 다수에 의한 정의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같다.
하여,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2).” 하고 오늘 말씀은 일갈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짓말한 것을 기억하고 계신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잠 19:5).” 이에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12:22).” 그러므로 “너희는 도둑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1-12).”
이에 주를 의지한다는 것은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주를 의식하며 사는 것이다. 더욱이 다수주의에 따른 악행이 얼마나 더 두려운 것인지, 그렇게 하여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요구했고 아론은 그에 따라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이라 하였다(출 32:1-6). 오늘 날에도 우리 사회를 좀먹는 우상이란 다수의 욕구에 따른 거짓 실체의 위선이다. 후에 저들의 변명이란 게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한지,
“아론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출 32:22-24).”
우린 항상 서로를 탓하느라 화해와 타협의 기회를 잃는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다짐하기를, “너희는 들을지어다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잠 8:6-7).” 우리가 미워할 권리는 진리를 말하기 위함이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지난 주일(사 17장) 에 다메섹에 대한 경고를 하시며, ‘보라’ 하고 외치신 것과 같이 이번 주일에는 구스에 대한 충고와 권면의 말씀이다. 곧 지난 주일에는 남유다의 북쪽에 위치한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선포한 것이고, 이번에는 유다의 인근 사방 주변국 가운데 여섯 번째로 남쪽에 위치한 구스에 대한 예언을 선포한다. 앞서 바벨론을 위시하여 다섯 번의 예언에서는 주로 책망과 저주와 멸망에 대한 선포였다면 이어지는 이사야 18장에서의 구스에 대한 예언은 ‘유다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돌이켜서 저들도 믿음을 갖도록 권면하고 있다.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사 18:1).” 하고 시작하여, “그 때에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이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르리라(7).” 하는 말씀을 짧고도 굵게 이 예언의 말씀을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구스’에 대한 충고(1-2)와 덧붙여 ‘앗수르의 파멸에 대한 예언’으로 이어지면서(3-6), 곧 있을 ‘여호와 앞에 굴복하게 될 구스의 미래’를 살피고 있다(7).
말씀과 말씀은 연관이 있고 서로 연결되어 오늘 말씀에서와 같이 서로 한 곳에 두신 것은 우리 안의 다중적인 의미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사랑의 빛을 추구하게 한다. 오늘 본문에서도 설령 저가 원수라 해도,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출 23:4-5).” 그런데 오늘 날 우리 사회 현상을 보면 모두가 그 속에 화가 가득한 것 같다. 탓을 하다못해 자신의 죄를 저에게 전가시키듯 보복과 보복으로 전쟁이 이어지고, 그 실체는 점점 더 악랄하고 폭압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르시길,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어찌 그럴 수 있는지, 바울 사도의 설교에서 드러난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2-13).”
설교원고를 정리하면서 보니, 역사적 배경으로 구스는 애굽의 남쪽에 위치한 아프리카의 국가이다. 주전 20세기경에 국가를 형성하였고, 주전 715년경에 애굽을 통치할 정도로 강성하였다. 이사야가 구스를 향하여 예언하는 시기는 구스가 애굽의 제 25대 왕조를 건립하고 전역을 다스리던 중이다. 이때 앗수르의 산헤립은 북이스라엘과 다메섹을 정복한 후 1, 2차에 걸쳐 유다를 침공하건 때이다다(왕하 18:19-19:34). 이에 애굽을 지배하던 구스는 위기의식을 느끼는데 유다가 정복당하면 인접해 있는 자신들, 구스도 곧 침공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구스는 자국의 군대를 소집하고 주변국들에게 사신을 보내 동맹군을 결성하려 시도하였다. 그 일환으로 구스에서 온 사신들은 갈대배를 타고 유다를 방문하였던 것이다. “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 이르기를 민첩한 사절들아 너희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로 가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로 가라 하는도다(사 18:2).” 이는 저들이 유다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이사야는 앗수르의 멸망(왕하 19:35-37)을 예언한다. “세상의 모든 거민, 지상에 사는 너희여 산들 위에 기치를 세우거든 너희는 보고 나팔을 불거든 너희는 들을지니라(사 18:3).” 하고 이에 따른 선포를 은유적으로 전한다. 아울러 구스가 곧 유다에 예물을 바치게 될 것(대하 32:23)을 같이 알리고 있는 것이다(사 18:7).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구스를 행해 선포하는 예언의 말씀이라기보다 앗수르를 향한 철저한 심판의 경고다. 이를 구스인들이 듣고 일시적으로나마 변화하여 그 영향을 받을 것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구스에 대한 파멸의 예언은 20장에 가서 구체화된다.
한 주간 나의 일정은 설교원고를 준비하면서 매일 이처럼 순서에 따라 말씀을 묵상하고 시편을 살기를 원하는데, 그 본문이 어디에 있든지 모두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곧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이고, 저들을 또한 하나님은 공평히 대하시고 평등하게 다루신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다루시는 것도,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며 거짓 일을 멀리 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출 23:6-7).” 그러므로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신 24:17).” 우리가 그래야 이유는 분명하다.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18).” 곧 우리 또한 저들과 다를 바 없이, 우리 안의 다메섹과 구스와 심지어는 바벨론과 앗수르와 애굽과 다를 바 없이 악인이었고 죄로 물든 자로 살아서,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오늘 날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이 아니면 모든 게 다를 바 없다.
이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4).”
항상 우릴 어렵게 하는 것은 ‘뇌물의 유혹’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시길,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25-26).” 우리 또한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죄악 중에서 주의 은혜로 믿음을 받은 것이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암 2:6-8).”
악하다, 우리도 악하다. 저들과 다를 것 없이 우리도 죄악되다. 그런 가운데 이와 같은 말씀과 저들의 악행을 보며 감 놔라 배 놔라 왈가왈부할 게 아니라 나 자신을 돌이켜 주의 인자하심을 바라며 사는 게 복이다. 우리의 모든 소유는 주의 것으로 어느 것 하나 주의 것이 아닌 게 없다. 그러므로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출 23:10-11).”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법은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어서 땅이며, 사람이며, 소유에 따른 모든 것에 안식년을 주거나 저들을 풀어주어 자유하게 하지 못했다.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12).” 그러나 우리의 실상은 이방인들과 다를 게 없고, 여전하여서 내 안의 앗수르와 바벨론과 다메섹과 구스는 보란 듯이 때를 노린다. 욱, 하고 치밀어서 그 입으로 저주를 말하고 행동으로 옮겨 악행을 저지를 때는 그 어떤 악한보다도 악하다. 이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야곱의 분깃은 이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의 기업의 지파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렘 10:16).”
우리로 다른 존재인 것을,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택정하심에 따른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이라,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부디 우리 스스로가 저들과 다르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저들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사랑하심뿐이다. 그 은혜로 살 뿐이다. 이는,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5).”
하여 나는 설교에 따른 청중이 누구인지, 몇 명인지… 이 묵상글을 공감하며 읽을 이가 몇 명인지, 또는 누구인지 우선하지 않는다. 저마다 이와 같은 글을 게재하는 사람들은 떠돌이 같이 여기저기 기웃대며 자신들의 글을 알리고 서로 ‘좋아요’ 하며 구독자를 늘리려고 안달이 난 것 같은데… 외람되지만 나는 솔직히 나의 은혜가 너무 크다. 나 같이 자격도 그만한 역량도 능력도 안 되는데, 한 주간 나의 주된 업무(?)는 설교원고를 작성하는 일이다. 본문을 읽고 내용의 역사적 사실이나 신학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보고 그 자료를 성경적으로 검증하는데 주초를 쓴다. 그리고 초안을 작성하면서 오늘과 같이 그날의 묵상과 나의 일상은 별개일 수 없다. 그럴 때마다 주가 개입하시는 것을 느끼는데, 쓸 때마다, 다시 읽을 때마다 주가 더하시는 지혜가 있다.
이는 나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주가 더하시는 은혜로 이루어진다. 하실 때,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온 마음과 시간과 생각과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 나의 약한 육신과 일상의 사소한 상황과 여건이 나를 쥐고 흔들면서 마치 주가 담아주시는 되나 말이 차고 넘칠 때 흔들고 때려서 더 깊이 꽉 차게 채우시는 주의 은혜를 날마다 매주 경험한다. 그리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긴장과 두려움으로 식은땀을 흘리고도 때를 따라 주사치료를 받으면서 주께 더욱 간절하게 되는 마음과 같이,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시 52: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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