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02 주일
이사야 30장
패역한 자식들에 대한 은혜
사 30: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패역한 자식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죄에 죄를 더하도다
…
사 30:7 애굽의 도움은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
…
사 30: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들어가는 말
“…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수 3:15-16).”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사이에 두고 모압 땅 이편 요단강 앞에 섰다. 요단은 밀과 보리를 수확하는 4, 5월에 강이 언덕에 넘칠 정도로 수위가 높아진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그것은 겨울동안 북쪽 헬몬산에 쌓였던 눈이 녹아서 흘러들고, 봄비가 잦아 갈릴리의 수위도 높아질 때다. 요단은 3-4미터로 깊고 폭은 30미터로 불어난다.
하필 ‘범람한 요단강’을 하나님은 건너가라고 하신다. 우리가 살면서 이와 같은 갈등은 자주 찾아온다. 하필 이럴 때… 하는 난감한 처지에 놓인다. 그럴 때 하나님은 먼저 요단을 마르게 하시면 좋을 텐데, 하나님은 우리더러 먼저 요단으로 들어가라 하신다.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8).”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 장정만 60만이라 아이와 여자, 노인들을 합치면 족히 200만은 넘는다. 성경은 늘 이런 식이다. 일흔다섯에 노인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길’로 가라는 말씀을 받았다. 살인자로 도망쳐 40년을 미디안 광야에서 은둔자로 살던 모세에게 애굽으로 다시 가서 이스라엘을 데리고 나오라고 하신다. 하필 이럴 때… 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가뜩이나 형편이 좋지 않을 때, 지금 내 코가 석 자인 마당에, 요단은 만수로 물이 가득할 때, 가장 좁은 나루터로 해도 도강은 불가능할 일인데… 이렇듯 예수님의 비유에서 한 주인이 잔치에 초대한 일을 말씀하셨다. 하필 ‘소 다섯 겨리’를 사서 이를 훈련시켜야 할 때, 이제 금방 장가들어 집을 비울 수가 없을 때, 때마침 밭을 사서 개간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눅 14:16-17).
그럴 때 당연히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잔치에 갈 수 없다고 통보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물이 불어 3미터가 넘는 요단을 도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린 다 그럴 수 없는 사정에서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가나안에 들어가 여리고성을 함락할 때도 모두에게 함구령을 내리시고, 7일 동안 성을 한 바퀴씩 돌게 하셨다. 그럴 때 우리는 납득이 안 된다. 하나님은 대체 왜 이러시는 것일까?
순종은 철학과 몽상의 범주가 아니다. 엄두가 나지 않아도 ‘요단을 건너라.’ 하시면 이에 믿음으로 따르던가, 불순종으로 돌아서던가 둘 중에 하나다. 실제 주후 1267년 12월에 요단은 16시간 동안 순간적으로 마른 적이 있다. 1927년 7월에도 21시간 30분 동안 요단강물이 마른 적이 있다고 한다. 아담 지역에 지진이 있어 요단 위편에 바위와 토성이 무너져 순식간에 물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또한 지역적으로 바람이 역류현상을 일으켜 요단강이 거슬러 올라 바닥을 드러냈다는 기록도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처럼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오늘도 우리는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한다. 말씀을 따라 순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 어쩔 것인가?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우리는 이와 같이 시편을 살아야 한다. 또한 아침을 깨워야 한다.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수 3:1).”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하실 때,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창 22:3).” 이른 아침은 하나님 앞에 우리를 세우는 온전한 마음의 간절함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시 5:3, 88:13).”
오늘 우리는 패역한 자식들을 향한 하나님이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이때 우리의 입술은 새벽을 깨울 것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57:8, 108:2).”
본문이해
신앙은 더러 비현실적이다. 상식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중에 보는 일이다.’ 현실적으로는 무모하다. 세상은 ‘불확실한 신앙’보다 확률과 통계가 정확한 것을 선호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5).” 하고 바울은 우리의 믿음을 규정하였다. 앞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24).”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께서 친히 날 위해 기도하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
오늘 본문을 두 단락으로 나누었다. 첫 단락은 패역한 자식들에 대하여(1-17). 두 번째 단락은 ‘패역한 자식들’을 향한 하나님 긍휼하심에 대하여(18-33) 살펴볼 수 있다.
※ 1단락: 유다, 패역한 자식들에 대하여(1-17)
1. 패역함의 원인과 증상(1-9)
1) 우리의 패역함의 원인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지 않고 죄를 더하기 때문이다.
2) 바로 곧 세상의 권세 안에서 강해지려 하기 때문이다.
3) ‘애굽’ 곧 세상의 그늘로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4) 일련의 상황에서 주를 의뢰하지 않고 주께 묻지 않는다.
5) 그에 따른 증상은 ‘바로’의 세력이 우리로 수치를 당하게 한다.
6) 애굽, 세상의 그늘로 피한 우리는 수욕을 당한다.
7) 애굽의 도움은 ‘가만히 앉은 라합’과 같다.
8) 우리 본성은 ‘거짓말 하는 자식들’과 어울린다.
9) 그러면서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한다.
2. 선견자들의 무기력함에 대하여(10-12)
1) 선견자, 곧 믿음의 어른들의 선견을 듣지 않는다.
2) 선지자들, 곧 목사들도 바른 것을 보이지 못한다.
3) 서로 친절한 타인으로 부드러운 말과 듣기 좋은 말만 한다.
4) 거짓된 것으로 꾸미기를 좋아한다.
5) 바른 길을 피하여 보기 좋은 길로 가버린다.
6) 첩경에서 궁상을 떨고 사는 것을 싫어한다.
7) 거룩한 이의 진중함을 싫어한다.
3. 말씀을 업신여김으로 생겨나는 현상에 대하여(13-17)
1) 말씀을 멀리하면 터진 담이 순식간에 무너지듯 무너진다.
2) 결국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림 같이 부수실 것이다.
3) 아궁이에 불을 붙이려 해도 그 수고가 헛될 뿐이다.
4) 물웅덩이에서 물을 얻지 못할 것이다.
5) 문제에서 도망치고 회피할 뿐이다.
6) 빠르게 도망치듯 쫓는 자들이 빠르게 쫓아올 것이다.
7)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할 것이다.
8) 다섯이 꾸짖은즉 모두가 도망할 것이다.
9) 남은 자는 산 꼭대기의 깃대 같이 드물다.
10) 남은 자는 산마루 위의 기치 같다.
※ 2단락: 패역한 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18-33)
1. 기다리시는 하나님(18-21)
1) 하나님의 기다리심은 은혜이다.
2) 하나님의 일어서심은 긍휼히 여기심이다.
3)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4) 주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을 것이다.
5) 주를 바라면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다.
6) 부르짖는 소리에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
7) 그가 들으실 때 응답하실 것이다.
8) 우리의 참 스승을 볼 것이다.
9) 좌고우면하지 않고 바른 길로 갈 수 있을 것이다.
10)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하시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2.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22-25)
1) 조각하여 우상에 입힌 은과 금을 하나님이 더럽게 하신다.
2) 불결한 물건을 던짐으로 나가라고 쫓으실 것이다.
3) 땅에 뿌린 종자에서 곡식이 풍성하고 자랄 것이다.
4)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다.
5) 밭을 가는 소와 어린 나귀도 맛있게 먹이를 먹을 것이다.
6) 크게 살륙하는 날에 망대가 무너질 것이다.
7) 고산마다 준령마다 개울과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3. 패역한 자식의 상처를 싸매시는 하나님(26-33)
1) 맞은 자리를 고치실 때 달빛은 햇빛 같이 밝다.
2) 햇빛은 일곱 배가 밝게 일곱 날의 빛과 같을 것이다.
3) 여호와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실 것이다.
4) 혁혁한 진노로 적들의 팔을 치실 것이다.
5) 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 곧 우리의 대적이 낙담할 것이다.
6) 주께서는 저들을 주의 막대기로 치실 것이다.
7) 예정하신 몽둥이로 심판하실 것이다.
8) 세상은 살육자 도벳을 세워, 세상을 불사를 것이다.
9) 여호와의 호흡이 유황 개천 같이 죄악 된 세상을 사를 것이다.
나오는 말
유다가 바로와 애굽의 힘을 의지하려 하듯 우리도 세상을 도움삼아 살려한다. 그리스도인들로 우리가 패역한 자식들이 된다. 그러한 우리를 향해 하나님의 진노가 세상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신다. 우리의 패역은 ‘거짓말하는 자식’ 같다.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 같다. ‘하나님 없이 무슨 일을 의논하고 계획한다.’ 하나님의 법을 싫어한다. 오늘 말씀은 잠잠히 의지하라 하신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것이 순종이다. 맡겨진 한 날의 ‘아침’에 주를 찾는 것이 신앙이다. 우리의 우상은 하나님을 대신하려 하는 모든 것이다. 이를 제거해야 한다. 돈과 육신의 쾌락과 자기 자신의 아집이 우상이다. 이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불가능한 것 같으나 믿음으로 순종할 때 요단이 마른다. 난공불락 같은 여리고성이 무너진다. 하나님은 선한 목자시다.
우리를 대적하는 ‘앗수르’를 멸망시키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저들을 지옥 형벌로, 우리를 영원한 복락으로 이끄신다. 이에 오늘 말씀은 우리가 패역하나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는 우리를 싸매신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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