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수 14:12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시 25:14
벌써 45년이 되었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갈렙과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음을 아신다. 하여 ‘그 땅을’ 그에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 14:24).” 이는 갈렙이 가나안 땅을 정탐할 때 보았던 헤브론의 산악 지대를 가리킨다. “또 네겝으로 올라가서 헤브론에 이르렀으니 헤브론은 애굽 소안보다 칠 년 전에 세운 곳이라 그 곳에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13:22).”
거기에는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헤브론을 중심으로 하여 가나안 남부 산간 지대에 주로 거주하였다. 유난히 키가 크고 거대하며 힘이 세서 ‘거인족’이라 하였다. 당시에도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크고 많은 백성은 네가 아는 아낙 자손이라 그에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신 9:2).”
오늘 갈렙은 이를 두고 구한다.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갈렙은 알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그들에 대한 두려움이나 실상이 모두 허상일 뿐 ‘그들을 쫓아내리라.’ 하고 단정한다. 이는 ‘정녕’, ‘필시’ 그러함을 믿는 확신이다. 갈렙은 가데스 바네아의 정탐 사건 이후, 38년 동안을 광야에서 생활하며 여호와를 알았다! 모두 같이 겪은 하나님이라 해도 누구에게 하나님은 친밀하시다. 오늘 시편에서 다윗은 이를 찬송한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시 25:14).
같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 같은 광야에서 생활하는데 각자의 하나님이 다른 것은 무엇일까? 그런 뒤 갈렙은 7년 동안의 가나안 정복으로 그 기간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함께 하시는가’를 누구보다 앞에서 겪었다. 이에 저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에게 하나님은 친밀하신 분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살면서 누구에게는 친밀하신 하나님으로, 누구에게는 두렵고 어려운 하나님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각자의 경험이 다르고 그 가운데 하나님을 의뢰하고 의지하는 정도가 다르다. 누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산다. 개인적으로 나의 삶을 돌아볼 때 나는 이제 친밀하고 친숙하다. 앞서 내가 젊을 때 하나님을 외면하고 무시하며 주를 멀리 떠나 살았던 시절에도 하나님은 그때도 나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또렷하게 증명할 수 있다.
이에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안다. 나를 보면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저들이 인정한다. 가령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는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창 21:22).” 또한 이삭의 하나님으로는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26:28).”
이어서 야곱의 하나님으로는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28:20-22).”
이와 같이 우리의 하나님은 각자의 경험과 주변의 증언으로 확증된다. 그저 막연한 고마움이 아니고, 친밀한 관계로서 여호수아에게 있어서는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 1:5-6).” 하셨다.
이를 오늘 갈렙도 알고 있던 터, 저는 저의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해서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그 어떤 땅이라도, 저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였다. 이와 같은 ‘임마누엘’은 모세의 기도에서도 드러났다.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출 33:16).” 고로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민 23:21).”
이에 또한 오늘 다윗의 시는 간구한다.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25:7).
하면서,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14).
하고 저는 잘 알고 있었다. 곧 오늘 우리의 임마누엘도 다르지 않다. 이른 아침 눈을 뜨고 교회로 나아오는 것도, 이와 같은 말씀으로 저들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확신하면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시기로(신 2:7).” 나의 살아온 날과 나의 남은 날들을 두고 주와 함께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결코 나를 저버리시거나 방치해 두시지 않으실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여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신 31:6).” 또한 내 앞의 어떤 어려움이나 현재의 곤란한 사정들 앞에서도 절망할 필요가 없음을 안다.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8).”
곧 나의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나로 하여금 강하고 담대할 수 있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여 내가 그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시니라(23).” 그게 설령 어떠한 상황이라도 늘 그러셨던 것처럼 여전히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을 안다.
하여 오늘 여호수아는 갈렙을 축복한다. 그리고 헤브론을 그에게 준다. 서로는 서로의 신실한 신앙을 알고 있다. 서로의 요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조건도 없이 축복하고 흔쾌히 응원하며 함께 바란다. 여호수아는 갈렙이 받아야 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믿음의 용사 갈렙이 능히 ‘아낙 족속’을 쫓아낼 것을 확신하며 헤브론을 그에게 주었다.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수 14:13).”
우리가 ‘함께 하는 사이’로 주를 알고 신뢰함은 복되다. 저가 어떤 처지에 놓이고 어떤 환경으로 힘에 겨워할 때도 함께 주를 바랄 것은,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1-13).” 이 놀라운 고백이 내 곁에 함께 하게 하신 이들의 손길과 기도와 기대를 받으며 용기를 낼 수 있다.
늘 말없이 날 위해 기도해주는 이와 무심히 매달 그런 듯 아니 그런 듯 티도 내지 않고 후원하는 이와 서로의 사소함으로 일상을 나누면서도 주의 뜻을 함께 구하는 이의 신뢰가 나로 주 앞에 바로 서게 한다. 그러므로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 우린 같이 안다. 있는 듯 없는 듯 서로가 일심(一心)으로 주를 바란다. 더러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저의 사정을 주께 아뢰고, 더러는 저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저절로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 자기 길을 삼가서 네가 내 앞에서 행한 것 같이 내 앞에서 행하기만 하면 네게서 나서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사오니 이제 다윗을 위하여 그 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왕상 8:25).”
오늘 이 어지러운 시국을 지켜보면서도 서로의 다른 시선으로 부딪치는 증오와 갈등을 두렵게 여긴다. 남북전쟁이 괜히 벌어진 게 아니었겠다. 지금도 서로의 손에 총 칼을 들려주면 마구 쏘고 마구 찌를 기세로 각자의 옳고 그름으로 서로를 저주한다. 그러할 때 우리의 판단은 다수결의 원칙을 운운하지만 그것으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음을 우린 잘 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마 27:22).”
우리가 나름 선진화된 제도로 정착하고 산다는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허울뿐인가를 새삼 경험하면서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 10:5).” 결국 우리 개인의, 나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바로 확신하고 붙들어야 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이에 오늘을 살면서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59:16-17).
이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그러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오늘 말씀은 이로써 소망을 더한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수 14:14-15).” 이를 보면서,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25:1-2).
오늘도 주를 부른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4-5).
이에,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14-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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