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저편 해 돋는 쪽 곧 아르논 골짜기에서 헤르몬 산까지의 동쪽 온 아라바를 차지하고 그 땅에서 쳐죽인 왕들은 이러하니라
수 12: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1
아직 우리의 가야할 길은 남았다. 그 길은 험하고 거칠다. 오늘 본문에서 여러 족속과 그 지역의 왕들을 보면서 우리의 남은 길에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생각하게 된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하신 것을 되새기게 된다. 같은 말씀을 두고 마태가 진술한 것과 누가가 기록한 것을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누가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였고, 마태는 건조하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가는 인생을 길로 놓고, 이에 ‘좁은 길’과 ‘넓은 길’이 있음을 확실히 알겠다. 이를 문맥적으로 읽어 고행주의로 해석하여 더러는 수도원을 짓고 세상과 동떨어져 사는 사람들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과는 별개다. 곧 우리가 육체의 소욕대로 살면 그 길은 방종하게 되어, 넓은 길은 하나님의 복음 진리대로 따라 사는 성령의 소욕대로 사는 길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하고 정의하였다. 곧 우리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7).” 그러므로 이는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9:8). 하면 오늘을 걸어가는 우리가 어찌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금 묵상하게 된다.
이때 누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심을 주의하여 들었다. 그 이유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언젠가 저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 힘쓸 때가 올 텐데, 그렇듯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란 말씀이다. 나름의 수고와 노력이 따르고 저마다의 마음으로 그 애씀을 다한다 해도,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9).”
오늘 날 저마다의 믿음으로 신념을 갖고 열심이다. 그렇게 거리로 나가고 광장에 모여 구호를 외치고 누군가를 지지하기도 한다. 누구는 자신의 전부를 포기하고 선교사로 나가거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다한다. 이에 대하여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하시는 말씀 앞에서 주춤, 하고 서게 된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유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오늘 본문에서 저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을 정복하였다. 정복한 땅과 진멸한 족속의 왕을 열거하여 우리를 주목하게 하신다. 이와 같은 성경 여러 곳에서 오늘 우리의 가는 길을 ‘싸움’으로 표현하는 것을 자주 본다. 하여 계시록에 기록한 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먼저는 말씀을 들을 귀가 있어야 하고, 이에 따라 싸움으로 이기는 삶이 되었을 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신다고 한다. 이어서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11).” 또한 이김으로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흰 돌을 둘 터’ 우리의 이름이 ‘흰 돌’ 위에 기록된다고 하신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17).”
결국 우리는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하고, 반드시 이기는 삶일 것인데 요한계시록에서 이어 보면,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3:5).” 우리에게 ‘흰 옷’을 입히시고,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12).” 그러므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21).”
이와 같은 영광의 길을 따라 오늘도 가야 할 길을 간다. 이에 성경은 이르시길,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이는 일련의 사태를 보며 교회와 우리 성도의 역할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우리는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한다. 안 믿는 가족과 내 곁의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말씀을 전하고 함께 예배할 수 있기를 구한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세상 사람들의 선동과 다를 게 없는 말씀 선포와 설교는 지양돼야 한다. 우린 결코 단 한 영혼도 변화시키거나 구원 받게 할 수 없다. 우리가 하는 게 아닌 것이다.
오늘 본문이 왜 이처럼 일일이 그 정복한 족속과 왕들을 열거하였을까? 생각할 때 그리하여 이 일을 이루신 이가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이는 여호수아의 업적이 아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룩한 결실이 아니다. 우리가 자칫 스스로를 자축하거나 자책하는 것은 경솔하다. 주 앞에 옳지 않음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실 때,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7).” 하신 이와 같은 말씀을 먼저 묵상해야 한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 함은 이와 같겠다. 결국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자국주의니 애국이니 하는 것이 모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스스로는 순결할 수 없어서 누구라도 주 앞에 바로 선다는 일은 자력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게 아니다. 자기 열심에 빠져 자기합리화로 무장한 목사는 무섭다. 이를 따라 순종하는 성도는 무섭다. 두루두루 묵인하여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하는 교단이나 교계의 회피도 무섭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따라 산다는 길은 이 땅을 이롭게 하고 우리가 사는 이 나라의 애국과 애족을 위한 길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데 있어 허락하신 나라이고 사람들이고 권세들이라, 이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이지 ‘여기’를 위한 삶이 아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9).” 이는 곧 죽었던 우리를 살게 하심으로,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7).”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좁은 길은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구원의 길로 장차 누리게 될 영원한 세계, 생명의 나무의 실과를 먹는 길이고, 의의 흰 옷을 덧입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선지자는 이르기를, 사탄이 우릴 정죄하나 하나님은 오히려 사탄을 정죄하실 것이다. 우리의 허물과 죄는 부지깽이 같이 더러우나 이와 같은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히시었다.
하여 나는 종종 다음의 말씀을 상기하고 묵상한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슥 3:1-5).”
우리 안의 자축과 자책을 나는 동일하게 교만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모두가 사탄이 우릴 정죄하려 하는 것이다. 이에 우리의 죄와 허물은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같아서, 이를 정죄하는 사탄을 하나님이 책망하시고 나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 그리스도의 보혈의 옷을 덧입히심으로 내 머리에 기름으로 바르시고, 정결한 관을 씌워주셨다. 더는 그 어떤 멸망도 심판도 정죄도 우리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우리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러므로 감히 말하지만 하나님도 우리를 우리의 죄로 사망에 이르게 하시지 않는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사하심으로 죽고 부활하여 승천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이김은 주께 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하여,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오늘 본문의 열거와 그에 따른 의도를 나는 그리 묵상한다. 그리고 아이와 오늘 나눌 묵상을 덧붙인다. 이는 오늘 읽은 본문과 이를 묵상한 내용과도 연관이 있다. 결국 모든 성경은 하나로 이어져 우리의 구원과 구주의 사하심이 그 어떤 말씀 위에서도 비춰진다. 하여,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11).”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앞서 밝힌 바,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유와 같다. 이는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다. 실제 이는 모두 영의 일이나 영은 몸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어서,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우리가 죄인인 것과 그것으로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보여주신 바, 구원의 길이다. 그것은 고난을 통한 영광이다. 죽음을 통한 생명이다.
이는 단순한 육신의 죽음 외에 영원한 영벌의 죽음을 의미하고, 우리의 죄의 삯으로 영원한 죽음에 놓였으나 이를 되갚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흠 없고 티 없는 영혼’ 곧 그 몸의 죽음으로만이 대신할 수 있었다. 이에 우리의 신앙이란 ‘예수의 죽음과 같은 고난의 길’을 걸어간다. 또한 여기서의 고난은 사느라 사는 데 따른 지긋지긋한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의 흔적’으로의 고난이다.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고후 6:5).” 이 복음으로 사는 길에서,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1-13).”
살면서 우리가 자처하는 이와 같은 길 위에서,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그 어떤 고난과 역경에서도 우리는 결국 승리한다. 하여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즉 개인적으로는 나의 이 시간, 새벽에 눈을 뜨고 교회로 나와 아무도 몰라준다 해도 나로 주 앞에 엎드려 말씀으로 바로 서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더러는 억울하고 짜증스러우나 이 또한 무던히 저를 내 곁에 두신 이로 참고 인내하는 것이어서 이를 나의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다(고후 4:10-11).
즉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아이러니하지만 고난을 통해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나의 어려움이 또한 부족함이 주 앞에 더욱 주를 바랄 수 있게 한다. 있으면 있음으로 주를 찾고, 없으면 없음으로 주를 더욱 앙모하면서,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8:36).” 때로는 육신의 연약함으로 또는 정신적인 불안과 장애를 가지고,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하는 말씀으로 오늘도 이 길을 간다. 어느 훗날 주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을 사모하며,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 3:13).”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 산 자가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나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하는 말씀이 실제 우리의 걸음이 된다. 하여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 4:12).” 곧 우리의 고난이 예수의 고난과 같아서 저 한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우리의 고난과 시련을 여전히 세상적으로 편안하고 안일한 생활에 젖어있는 ‘고린도 교인’ 즉 우리 주변의 영혼들에게 생명으로 역사하기를 역설한다.
즉 이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감내하셨던 것처럼 바울이나 우리들도 자신의 고난과 시련으로 내 곁의 하나님의 자녀들, 그 한 영혼을 위하여 유익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여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와 같이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누구와의 성경공부를 준비하면서 내 영혼이 산다. 살아서 주의 은혜로 충만여진하다. 이때에 확실하고 선명한 것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1).
세상적인 기준으로가 아니라,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2-3).
이 놀라운 은혜 위의 은혜를 더하며,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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