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

전봉석 2025. 2. 6. 05:05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

수 13:1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시 24:9-10

 

 

우리 인생은 정한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하시다.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었다. 일찍이 가데스 바네아의 거역으로 시내 광야에서 계수된 사람들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이 둘만이 노인이었다. 당시 갈렙의 나이가 85세였고 여호수아는 100세가 가까웠다. 젊은 시절 행군과 전투로 생을 살아온 여호수아도 이제 기력이 쇠하여 일선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할 수는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직 정복되지 않은 나머지 가나안 땅의 정복은 각 지파에게 미루어 놓도록 하고, 이제 그 땅을 분배할 것을 명하신다. 곧 남은 땅은 분배 받은 족속들이 자력으로 정복하고 다스려야 한다. 그 ‘얻을 땅의 남은 것’으로 실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지만, 그래도 정복해야 할 땅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었다. 이 남은 땅에 대하여 여호수아가 직접 정복하기보다 분배 받은 지파가 중심이 되어 다른 지파와 협력하여 정복해야 할 몫으로 남겨졌다. 각 지파는 정착과 정복을 병행해야만 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 3:14).”

 

곧 우리가 현실적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이에 준하여 사는 일이 지혜롭다. 이 땅의 모든 생명은 다 때가 있고 그러한 가운데 허락하신 날을 사는 데 있어 주의 말씀은 영원하심을 명심하는 것이 복이다. 즉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 14:27).” 그런 가운데 우리에게는 아직도 남은 일이 있다. 곧 성도의 삶에는 은퇴가 없다. 뒤로 물러나기는 하나 기력이 다하는 날까지는 주의 말씀을 준행하며 살아야 한다.

 

곧 아직도 남은 땅이 많다. 여전히 우리가 정복해야 할 평생의 숙원은 주를 바라는 데 있어 내 안에 이는 나의 아집과 교만이다. 안이함과 무력함이다. 어제는 모처럼 친구가 전화를 했다. 스스로도 말하기를 성경공부를 안 하니까 성경을 안 읽고, 성경을 안 읽으니까 궁금한 것도 없고, 그러다 새벽예배도 안 하니까 아침에 묵상하던 것도 안 하고, 그러고 보니 하는 게 없다며 스스로도 그렇게 된 것에 대하여 허탄해했다. 나는 그에게 바울이 왜 늙어서도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하였을까? 하고 물었다. 저는 왜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을까? 그렇게 말할 때 저는 이미 노인이었고, 갇힌 몸으로 서신을 쓰거나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자신을 쳐서 복종시킬 정도로 무엇을 위해 그처럼 끝없이 정복하고 또 다스렸던 것일까?

 

친구에게 물었던 말은 고스란히 내게도 온다. 우리가 소망을 잃지 않는 데는 환난이 필연적이다. 자양분 같아서 우리 삶의 역경이 우리로 더 간절하게 주를 바라며 근신하고 깨어있게 한다. 차마 그런 뜻으로 친구에게 말하기는 어려웠으나 살만하다고 여길 때가 죽었거나 잠들어 있는 영혼으로였다. 하여 바울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소망이 없다면 어쩌겠나?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5:13).” 하는 바울의 심경은 그대로 자신의 삶에도 적용되어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때 저는 노인으로 기력이 다하였고 곧 있어 순교를 당하여 죽을 것이었다. 늘 스스로 자신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이 우리 믿음의 성화다.

 

믿음은 거저 주셨으나 믿음의 삶은 거저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이로써 나는 하루 일과 중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 일을 두었는데, 이처럼 묵상을 글로 쓰는 것으로 나를 붙들어 앉혀 말씀으로 이끄는 일이다. 교회에서 잘 때는 저녁에 이를 행하였다가 오늘도 어제와 같이 이른 아침 눈을 뜨면 교회로 올라온다. 추워진 날씨에 꾀도 나고 몸도 찌뿌듯하다. 그러나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시간으로 일체 타협할 수 없다. 아플 때나 슬플 때나 어떠하든지… 어제 아침 7시 반, 아이와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당부하였다.

 

너의 인생에 스스로도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것을 붙들어야 한다. 이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심과 같이 언제나 매순간 ‘먼저와 나중’의 원리가 여기에 살았다. 아이들과 수업할 때도 항상 해야 할 것을 먼저 하라고 이르곤 했다. 하기 싫어서도 먼저하고 나중으로 미루지 말 것을 누차 강조하였다. 나에게 있어 묵상 글쓰기는 햇수로 17년째가 된다. 처음에는 아이들과 글방에서 같이 교회를 시작하고 예배를 드리면서였다. 하루에 한 장, 한 줄이라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그 의미를 글로 쓰자, 하고 우리가 같이 사용하던 카페에 글을 올리게 했다.

 

나는 그렇게 아이들을 위해서 시작하게 된 것인데, 내 기억으로는 거의 하루도 빠진 날이 없다. 심지어는 밤낚시를 가서도, 여행을 가서도, 위경련으로 응급실에 갈 때도 나는 이것을 멈추지 않았다. 어제도 친구와 잠깐 얘기할 때 이는 내가 잘났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내가 나를 안다. 한 번 예외가 주어지면 그것이 또 한 번 이어지고 그러다 어느 순간 흐지부지 될 것을 나는 안다. 또한 이 글을 쓰는 데 있어서도 A4 용지로 열 장 정도의 분량으로 쓴다. 이는 아이들을 가르칠 때 생긴 습관이다. 일정하게 하루 한 장 혹은 세 장 스스로 정한 분량으로 꾸준하기를 요구하곤 했던 것이 나의 습관이 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나는 내 몸을 쳐 복종시키듯 나의 하루가 이 시간을 위시하여 정복당한다. 오늘 나의 미정복한 시간의 한 날을 두고 묵상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곧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하는 그와 같은 심정으로,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오늘 이 한 구절의 말씀, 여호수아도 늙었다. 그럼에도 아직 남은 미정복의 땅이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또한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 나이들고 병들어 더는 기력이 없어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하여 나는 주께 기도하기를 이 손을 쓰지 못할 때까지, 눈이 보지 못할 때까지, 책상에 앉을 수 없을 때까지… 나에게 주신 이 모든 날들이 다하기까지 나의 이 묵상과 묵상글쓰기는 계속되기를. 이는 누구를 위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정복하고 다스리기 위함이다. 가장 어려운 적은 내 안에 있다. 내가 아는 나를 나는 이길 수 없다. 하여 나는 일체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 무던한 것이다. 하여,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나의 정복은 그때까지이다. 하여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8-9).” 나의 속성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자 하는, 내심 나의 안위와 편안을 위한 마음이 게으름이나 나태함으로 나를 다스리려 한다.

 

소비나 욕구나 허황된 생각이나 남을 시샘하는 마음이나 기타 등등. 나의 나 된 것을 내가 앎으로 나는 필히 나를 정복하고 다스려야 한다. 이에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로 나의 약함이 나로 간절하게 한다. 늘 어디가 아프거나 때론 심리적인 불안과 우울이 나를 엄습할 때도 이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곧 내가 받은 은혜가 크다. 나 같은 이가 어찌 주의 은혜로 오늘까지 살아왔는지를 알 때, 이 은혜에 대한 감복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오늘도 졸리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교회로 온다. 책상에 앉히고 말씀을 본다. 억지로라도 그리 붙들어둔다. 그리하여,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시 109:4, 26).

 

그러할 때, 하나님이 하신다. 이를 나로 알게 하신다. 내가 하는 것 같은데 실은 하나님이시었다. 가령 저절로 눈을 뜨면 새벽 두시 반 언저리다. 몸이 알아서 나를 일으키고 나는 찬물로 세수를 한다. 옷을 입고 운전을 하고 교회로 오는 동안 주가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이 아신다. “네가 어찌하여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네가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사 37:26).” 하여 오늘의 나의 일과는 단조롭고 일정하다. 예전처럼 사람을 만나거나 좋아하는 일에서도 정으로 끌려하지 않는다. 서로 나누는 대화에서도 쓸데없는 말을 삼간다.

 

그러다보니 점점 혼자인 것 같으나 그때마다 주가 곁에 두시는 ‘한 영혼’이 있다. 때론 직접적이고 때론 간접적으로나 누구의 일을 두고 같이 주 앞에 나란히 서게 하신다. 글을 쓰거나 통화를 하거나 만나거나… 그러는 동안 주가 함께 하심으로 주도하시는 일이어서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렘 33:2).” 이는 곧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3).”

 

이 놀라운 은혜로 사는 일은 모든 게 감사하다. 어제는 점심께 아내와 산책을 하면서 저기 멀리 있는 빵집까지 걸었다. 나의 걸음은 느리다보니 아내는 더러 한참을 앞서 갔다가 돌아오고는 한다. 다음은 저 앞에 있는 재래시장까지 가보자고 했다. 대충 그 거리가 온 만큼은 더 가야 한다. 그럼 다시 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어진다. 엄두가 나지 않아 선뜻 대답하지 못하였다. 남들에게는 별 거 아닌 일이 나에게는 도전이 필요하다. 먼저는 힘든 것도 힘든 것이지만 순간 어떤 불안이 엄습하면 겁이 난다. 이를 병적이라 하든 강박이라 하든 나에게는 이것으로 은혜이다. 이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잠깐 막힌 길 위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는 간절하다. 어느 길 위에서 더는 걸음을 옮기지 못할 것 같을 때 호흡은 가빠지고 별의 별 생각이 엄습할 때는 식은땀이 난다. 나의 이와 같은 약함으로 나는 그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을 가졌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오늘도 그와 같은 심정으로 새벽에 주 앞에 나와 글을 쓴다. 설교원고를 다듬고 다시 채우며 한 주간을 보낸다. 이러함으로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5-6).” 이 은혜를 알면서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의 기업이 되셨다.”고 하심 같이, “그들이 그들의 형제 중에서 기업을 가지지 않을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니 그들에게 말씀하심 같으니라(신 18:2).” 나의 한 날은 이것으로 족하였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다 늙었다. 아직도 정복하지 못한 곳이 남았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가나안을 분배하게 명하신다. 아직 정복해야 할 가나안 지경을 일러 주신다(1-6). 이스라엘의 아홉 지파 반에게 분배토록 명하신다(7). 두 지파 반은 앞서 요단 동편 땅을 기업으로 받았다(8-14).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이다. 레위 지파에겐 기업이 분배되지 않았다. 정복하는 것도 중요하나 다스려야 한다. 그 땅에 정착할 기반을 마련하였고, 여전히 정착과 정복을 병행하도록 남은 미정복지를 하나님이 일일이 나누어주신다.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에게는 기업을 주지 않은 것은 생업에 분주함으로 오직 하나님을 위한 봉사에 전념하지 못할까 하여서이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생계를 위해 백성들의 십일조를 분깃으로 돌려주셨다.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민 18:21).” 이를 나는 오늘의 일과에서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원고를 쓰고 누구와 성경공부를 하고… 이와 같은 일에 나의 일과를 맞춘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오늘 이 한 날의 수고로 족하였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 24:1).

 

그러므로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