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전봉석 2025. 2. 10. 04:39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수 17:18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 28:7

 

 

요셉의 장자는 므낫세이나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앞세우셨다. 에브라임 지파가 먼저 가나안 서편 땅을 기업으로 받은 데 이어(16:5-10), 오늘은 므낫세 반 지파가 기업을 얻는 과정이다(17:1-6). 그들이 얻은 기업의 경계(7-13)에 대해 그들이 기업을 더 요구하자 스스로 개척하게 한다.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18).”

 

마길 자손이 중심이 된 므낫세 지파의 반은 이미 요단 동편에서 기업을 할당받았다(13:29-31). 따라서 이제 남은 므낫세 반 지파의 자손들이 요단 서편에서 기업을 할당받고 있다. 그런데 므낫세 지파는 에브라임 지파와 더불어 그들을 두 지파인데도 한 분깃의 기업만 받은 것에 불만을 표하며 땅을 더 달라고 요구한다.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14).”

 

이러한 요구가 지나친 욕심에서 나온 것으로 조용히 그들을 타이르고 그들에게 이미 주어진 기업 내의 미개간지를 개척해 나가라고 지시하는 것이다(15-18). 곧 하나님께서 요셉 자손에게 주신 기업은 저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다만 필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기업 내에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대적들이고, 정복하여 취할 땅을 개간하여 옥토로 만드는 노력이다.

 

이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신 각각의 상황과 여건이 주어진 달란트이다. 더러는 많고, 적고, 좋고, 나쁘고 서로의 요구가 다를 수 있으나 그것으로 수고하여 두 배 혹은 다섯 배의 달란트를 남기는 것이 우리의 삶이고 맡기신 사명이 된다. 그런데 나름의 노력은 없고 주어진 달란트만 탓하여 ‘땅에 묻어 둔 채’ 다른 달란트를 요구한다면 이는 ‘악한 종’이다(마 25:14-30). 이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30).” 하시는 주의 음성이 두렵게 들린다.

 

한때는 그러해서 늘 누구 탓을 하고 주어진 상황이나 ‘나만 다른 것’ 같은 여건으로 씨름하기도 했다. 저마다 그렇듯 이를 악 물고 살다보니, 가령 누구는 현재 자신이 이룬 것에 대하여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다는 자긍함이 있다. 저의 부모는 가난했고 형제들은 많았다. 좀 더 배웠더라면, 하는 말로 시작하지만 현재의 건물주로 또한 사업가로 살아가는 자신에 대해 긍지가 있다. 그것이 완고함이 되고 남을 이해할 수 없는 벽이 되었다. 저의 말끝에는 항상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하는 방어와 공격의 무기가 장착되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을 싸잡아 욕하거나 교회를 비난하기도 한다. 일견 저의 성공에 수고하였다 싶은데 그것이 방어기제가 되어 남을 비난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여기서 우린 천국을 침노하는 일, 곧 오늘 우리의 수고와 노력이 그와 같이 이 땅의 것으로 가름되는 게 아님을 묵상한다. 예수님이 이르셨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이는 마치 가나안을 차지하는 이스라엘 각 지파의 경우와 같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당당히 요구하였다.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의 종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받게 하되 그들의 아버지의 기업을 그들에게 돌릴지니라(민 27:4, 6-7).” 하여 저들은 자신들의 몫을 받았고 하나님은 이를 인정하셨다. 이와 같이 ‘천국을 침노하여 빼앗는 자’와 같이 우리는 주의 나라를 바랄 뿐 아니라 당당히 요구할 수 있다.

 

이는 마치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을 얻은 진주 장사와 같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 13:45-46).” 이는 또한 밭에 감추인 보화를 알고, 이를 사는 일과 같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44).”

 

곧 우리가 각자가 저마다 예수를 믿고 천국 갈 자녀임을 안다고 하나 그래서도 누구는 더욱 수고하여 애씀을 각각의 영광을 더한다. 곧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이 아님을,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고전 15:39).” 이와 같아서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40).” 이와 같은 ‘다름의 원리’는 우리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한다. 하여,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41).”

 

이와 같이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42-44).” 우리가 바로 알 때 그저 막연히 천국 갈 백성인 것으로 안주하다가는 안일하고 나태하여질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저들 지파의 가나안 정복과 그 기업을 나눔에 있어 많이 가진 자가 더 많이 받는 원리를 깨닫게 된다. 이를 알고 있었던 바울은,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

 

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그렇게 바울은 죽을 때까지 자기 몸을 쳐 복종시켰고, 날마다 자신을 죽임으로 새 삶을 살았다. 결국 오늘 우리의 삶은 전투다. 죄악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우리 안의 ‘가나안인들’을 몰아내야 한다. 저들 이스라엘 지파가 각각의 분배받은 땅에서 그와 같이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지 않음으로 당장은 종으로 삼았을지 모르나 저들의 문화나 우상이 온 이스라엘을 병들게 하여 죄악 중에 살게 하였음을 우리는 잘 안다. 어제 에브라임 지파들도 그러했듯이 오늘 므낫세 지파도 그렇듯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수 17:12).” 이로 인하여 저들은 우상에 시달린다. 온갖 죄악에 물들었다.

 

성경은 일갈하시길,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이는 서머나 교회에만 전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이다. 살면서 이런저런 환난을 당하고 어려움이 겹칠 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하심은 주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관’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더욱 강한 어조로 말씀하시길,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다소 두려운 일 같으나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신다.

 

하여,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곧 우리를 죽이시는 일이 있더라도 살리신다. 우리가 이 땅에 더 살면서 물질로 혹은 그릇된 길로 그 영혼이 심히 상할 때 하나님은 이를 일찍이 거두심으로 살리시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그렇게 하여 우리가 들어가 살 영원한 나라 천국에서의 날들을 책임지신다. 이에 대해여 바울은 앞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11-12).”

 

곧 우리의 죽을 몸을 살리시고자 예수께서 죽으셨으니 고로 오늘 우리는 빚진 자로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다. 하면 죄와 싸워야 한다. 자기 안에 이는 어떤 원망과 분함을 두고 다투어야 한다. 물러서거나 스스로 자긍해서는 안 되겠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4-5).” 하여 어쩌면 오늘 우리가 겪는 어떤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으로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더 큰 영광이 있다는 것을 되새겨야 하겠다.

 

우리 안에 죄가 여전할 때 참된 평안은 없다. 누구는 늘 교회에서 열심이고 나름의 믿음과 신앙으로 산다고 살면서도 그 삶에 감사와 평안이 없다. 실은 저의 마음에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자식을 같이 놓고 살던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면서 자신과 자식들을 버렸다. 또 하나는 돌아가신 그의 부친이 살아생전 술로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에 따른 폭력과 폭언은 고스란히 저의 유년을 우울하게 하였고, 친정엄마의 삶을 무참히 짓밟았다. 또한 누구는 어릴 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친의 강요와 폭압적인 성격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일에 무의식적인 거부감이 있을 정도이다.

 

곧 우리 안에 어떤, 아직도 짊어지고 사는 서러움과 원망이 우리 영혼을 짓누른다. 현실에서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거나 불평하는 일이 고스란히 우리 영혼을 피폐하게 한다. 이에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사 64:4).” 곧 우리가 말씀으로 주 앞에 온전하게 됨은 스스로의 서러움도 원망도 모두 찬송이 되게 하심으로 그 남은 노여움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신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나는 이제 이와 같은 말씀으로 놀랍다. 내가 나의 어떤 의지와 수련으로 나를 정제한 게 아니다. 어느 날 주만 바라며 주 외에 다른 것으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되면서, 어릴 적부터 안고 살았던 서러움이 사라졌다. 어떤 원망이나 분함도 오히려 찬송이 되었다. 하여 나는 누구와 이야기 할 때 내가 그토록 감추고 싶어 하였던 나의 어두운 면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낸다. 어쩔 때는 오히려 가벼이 여기거나 자랑스러워하기도 한다. 누구를 위로할 때 나는 먼저 나의 아픔이나 그늘을 실토하면서 저의 상한 마음으로 다가간다. 곧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힘이 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여러 사연과 사정이 오히려 우리들로 하여금 주를 더욱 사랑하고 내 곁의 한 영혼을 사랑하는 일에 원동력이 된다.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48:22).” 하신 것과 같이 상대적으로 우리 믿는 자의 마음에는 그와 같은 서러웠던 시간들도 찬송이 되어 주를 사랑하는 이유가 된다. 곧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사 57:19).” 하면 상대적으로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20).”

 

이와 같은 원리로 오늘도 이 한 날의 중심은 천국을 사모함이다. 내가 가서 장차 누리게 될 천국을 사모함으로 나는 이제 나의 나 된 것으로 주께 감사한다. 곧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에,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1-12).”

 

하여 이 아침에도 시편으로 선다.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시 28:2).

 

이는,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