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건설하고 거기 거주하였더라
수 19:50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 30:4-5
가나안에서 땅을 분배하는 작업이 끝났다. 르우벤, 갓, 므낫세의 반 지파는 요단 동편에 남아 땅을 할당 받았다. 유다 지파와 요셉 자손인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에 이어 베냐민 지파가 차례로 요단 강 서편의 가나안 땅을 할당받았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다섯 지파가 앞서 땅을 분배받았다. 레위 지파는 차지할 기업이 없다. 이제 남은 여섯 지파인 시므온과 스불론과 잇사갈과 아셀과 납달리와 단 지파가 차례로 기업을 분배받았다.
그 가운데 여호수아가 기업을 분배받았다. 처음 기업을 분배받은 사람은 갈렙이었다. 그리고 기업을 마지막으로 분배 받은 사람은 여호수아이다. 이로써 이스라엘 각 지파에 대한 가나안 땅 분배가 끝났다. 그리고 차지할 기업이 없는 레위 지파는 그들에게 거주할 수 있는 성읍이 주어져야 했다. 때문에 이스라엘 각 지파는 자신의 성읍들 중 일부를 모아 레위 지파에게 나누어 준다(21장).
곧 저들이 가나안을 들어왔으나 이제 각각 분배 받은 땅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한다. 그렇게 ‘이스라엘 자손이 각 기업의 땅을 나누고’ 비로소 가나안 정복은 일단락된다. 여호수아 1-12장은 가나안 정복에 관한 기록이다. 13-19장까지는 정복한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기록이다. 이 모든 일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이루어졌다.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신 1:36).” 여호수아도 가데스 바네아에서 성실히 정탐하여 보고한 대가로 그가 요구하는 기업을 우선적으로 분배받을 권리를 하나님께 약속받았다. 그렇게 여호수아의 구한 성읍을 주셨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니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건설하고 거기 거주하였더라(수 19:49-50).”
이렇게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기업 분배가 끝나자, 이제 마지막으로 여호수아가 기업을 분배받는 사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맨 마지막에 여호수아가 기업을 분배받았다는 사실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 사실은 여호수아가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한 지도자였음을 보여준다. 일련의 사태와 그에 따른 헌재재판에서의 자기변호를 보면서 한 나라의 지도자란 사람이 어떠한가? 하는, 오늘 우리나라의 실태와 대조적이다.
흔히 지도자들은 공적을 쌓으면 먼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기에 바쁘다. 저는 심지어 자신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고 입건되어 곧 그 죄를 물어 무거운 형을 살아야 할 텐데, 최소한의 양심과 미안함이 있다면 자신의 잘못으로 인정하고 저들의 형에 대한 선처를 부탁해도 모자랄 것 같은데… 하긴 저마다 자기 살 궁리를 하느라 진술이 엇갈리고 그러는 가운데서 눈치껏 거짓으로 덧대려 하는 것을 보면 서로가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기업을 받은 후 자신의 기업을 얻었다. 이러한 모습은 참으로 훌륭하고 귀하다. 저는 앞서 백성들이 기업을 받기 전 자신의 사적인 이익에 우선하여 먼저 구하였어도 된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맨 나중에 분배받은 ‘딤낫 세라’ 성읍이 완전히 파괴되어 새로 건축해야 할 성읍이었다는 사실도 인상적이다.
이에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건설하고 거기 거주하였더라(50).”
저는 기꺼이 ‘그 성읍을 건설하고 거기 거주하였다.’ 이는 새로 짓는 것과 같이 재건하였다는 뜻이다. 딤낫 세라 성읍은 다시 건축하여야 할 정도로 파손되었다.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는 자신이 속한 지파의 산지 중 하나로 여호수아는 딤낫 세라 성읍을 분배받았다. 이 성읍은 단 지파에 속한 딤나와 구별된다. 여호수아가 받은 딤낫 세라는 ‘딤낫 헤레스’라고도 불린다. 가아스 산 북편 이곳은 세겜에서 서남쪽으로 11.2km,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7시간 거리에 위치한 곳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엘르아살 제사장과 여호수아와 족장들이 땅을 나누는 일을 마쳤다. 이들은 가나안을 정복하고 각 지파의 기업 분배를 책임 맡은 자들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받은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니라(14:1).” 그들은 가나안 정복이 끝난 후 곧바로 가나안 땅의 분배작업에 착수하여 이 막중한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이 일을 마치고 얼마 후에 여호수아는 죽고, 엘르아살도 죽는다.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이었더라(24:29-30).”
곧 우리로 이 땅을 살게 하신 이는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기뻐하심으로 이 기쁨이 영원하길 바라신다. 하나님은 그렇게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사람을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다. 곧 우리의 허물과 실수 또한 바로잡을 수 있는 자유의지와 선택할 능력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세계가 영원하며 온전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다. 가령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먼저 그 마음에 하나님과 같아지고자 하는 교만이 들어가서였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하고 사탄이 말할 때 벌써 그에 앞서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2-3).” ‘죽을까 하노라’ 하고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짝 비틀었다. 곧 주어진 말씀과 명령에 대해 임의로 자신이 재해석하며 판단하는 마음을 알고 사탄은 한 발 더 들어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바짝 다가온 것이다. 이를 허용하면서,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5).” 하는 말에 저들의 눈은 그동안 선험적으로 듣고 보고 느끼던 것에서 직접적인 체험적으로 이에 끌리게 된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6).”
이와 같은 선택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자기 것으로 여기면서 생긴 일이다. 실제 우리는 본래 우리 것이 없다. 우리의 몸도 마음도 영혼도 어느 것 하나 내가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럼에도 저마다 자기의 자유의지를 주장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함으로 오늘도 이와 같은 폐단은 거듭 되풀이 되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나의 모든 게 주의 것임을 인정할 때 모든 고통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이와 같은 말씀이 여호수아의 삶에서 고스란히 전달된다. 결국 내 것을 주장하고 내가 나의 것이라고 할 때 모든 고통은 그에 따라 온다. 남과 다른 자신을 두고 괴로워한다. 상대적으로 여겨져 처음 살인자가 된 가인도 동생을 죽일 정도로 고통 가운데 빠졌다. 오늘의 여러 고통은 그 근본이 자신을 자기가 어찌 하려고 하는 데서 온다. 내가 다 주의 것임을 인정할 때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숨겨져 있다. 저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이와 같은 죄의 영향력으로 우리의 모든 세계가 좌지우지된다. 이와 같은 죄로 인하여 모든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였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20).”
이 또한 주의 뜻이면 설령 오늘의 실패나 좌절도 결국은 내 것이 아니다. 주께 아뢰고 맡김으로 모든 게 다 주의 것이어서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이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세계라, 우리는 매순간을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해야 한다. 그러므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22).”
이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23).”
이를 오늘 말씀에서 특히 여호수아의 행적을 보면서 새삼 우리로 주를 향한 마음과 그 행실을 돌아보게 된다. 이에 바울은 명쾌하게 정의하길,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이를 일련의 사태와 그에 따른 소요를 보면서 여실히 느끼게 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서로가 부화뇌동하며 서로를 편 가르고 적대시하느라 정작 자신 또한 고통으로 일그러진 일에 빠져들고 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
곧 우리는 저마다 오늘을 살면서 각자의 기업을 분배 받았다. 더러는 누가 더 많고 적을 수 있고, 누가 더 좋은 쪽일 수도 나쁜 쪽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내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잠시 내게 더하신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온전히 주의 기쁨이 되는 것으로 우리가 그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임을 안다. 저마다 옳다고 여기는 일에 신념을 다하지만,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눅 18:22).”
결국은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때 이와 같은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 이내 내 것이라 여겨 자신을 위한, 자신에 의한 자기주장을 내세울 때 그만큼의 고통도 뒤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강조하신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이는 많은 것 가운데 조금 덜어주거나, 없어도 되는 것을 나누어주는 정도가 아니라 내 것이 곧 네 것임을, 우리의 것이 모두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할 때 고작 ‘개인의 취향’이나 얼어 죽을 자유의지를 운운하며 자기주장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딛 3:9).” 그럼에도 무리하지 말 것은,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10).” 백 날 얘기해도 소용없는 사람에 대하여는 그 또한 내가 어쩔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죽기 살기로 논쟁하고 설득하고 논증할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시인은 찬송하기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 23:4, 27:1).
오늘에도 그러하듯 예전에 그러했고 앞으로도 점점 더 그러할 게 당연한 게 세상이다. 이에 예수님은 일찍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4-5).” 하시며 이와 같은 현실과 그에 따른 미혹함에 대하여 주의할 것을 예언하시고, 이르시길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6).” 일련의 사태로 어지러운 중이나 그렇다고 두려워할 거 없다. 점점 더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7-8).” 이와 같이 사람도 자연도 모든 만물이 곧 재림의 때가 다가오는 것을 알릴 때,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30:1).
우린 결코 요동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2-3).
그러므로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4-5).
이에,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10-11).
곧 오늘의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님을, 이 모든 것이 주께 속한 것임을 인정할 때에,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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