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수 18:3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 29:11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항상 나타나야 한다. 곁에 있는 아무는 몰라도 자신만은 아는 증거가 있다. 온 이스라엘이 실로에 모여 회막을 쳤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수 18:1).” 여호수아는 요단 서편의 세 지파에 대한 기업 분배를 일단 마친 후에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을 실로에 모이게 한 것이다.
중요한 기업을 분배하는 작업을 일시 중단하고 성막부터 세운 이유는 요셉 자손의 항의가 있어서이다(17:14-18). 이후 기업 분배에 대해 남은 일곱 지파가 너무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전, 성막을 세움으로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고취시킨다. 앞으로 성막이 들어설 위치 선정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신 12:11).”
결과적으로 에브라임 지파 내에 위치한 실로에 성막을 치고 이를 기점으로 오늘 다시 재정비한다. 실로를 선정한 이유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다 모여 예배드리기에 적당한 중심부였다. 실로의 뜻은 휴식과 안식이다. 백성들이 평화롭게 안식할 장소로 합당하였다. 실로는 야곱의 예언에 따른 곳이기도 하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성막이 길갈에서부터 실로로 옮겨짐으로 향후 실로는 이스라엘의 종교, 정치, 군사에 있어 행정의 중심부가 되었다.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삿 18:31).” 당시 엘리 대제사장 시대에 언약궤가 블레셋의 손으로 넘어갈 때까지 약 350여 년 동안 이스라엘 역사의 주요 무대가 된 실로의 위치는 벧엘과 세겜의 중간 지점이다. 벧엘 북쪽 약 15km, 세겜 남쪽 약 20km 지점이라고 한다. 이 도성은 대략 주전 1050년경에 파괴되어진 것으로 보고되었다. 현재는 세일룬이라는 폐허지로 그 흔적만 겨우 찾아 볼 수 있다.
그곳에 회막을 세웠다. 회막은 일종의 ‘만남의 장막’와 같다. 이곳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셨기 때문이다. 또한 회막은 성막(출 26:1;민 9:17), 증거막(출 38:21;민 1:50), 법막(대하 24:6), 성소(출 25:8;레 10:18), 여호와의 전(출 23:19), 하나님의 집, 장막(대상 6:48), 여호와의 장막(레 17:4) 등으로도 불리운다.
성막 제도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계시대로 성막을 건축하였다(출 25:8, 21, 22). 그러한 성막의 구조는 뜰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동쪽, 입구를 들어서면 제일 먼저 성막 뜰에 번제단이 놓였고, 그 앞에 물두멍이 있다. 안쪽 내부에는 성막 본체가 있다. 서쪽 깊숙이 지성소가 있다. 그 안에 언약궤를 안치하여 지성소는 휘장을 쳐서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성소에는 진설병을 놓는 상과 금등대와 분향단이 놓였다(출 40:29-33). 성막은 제사장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기본이다.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 땅이 이미 그들의 앞에 돌아와 복종하였다’는 말씀에서 눈길이 멈춘다.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수 18:1).” 곧 여호수아가 실로에 회막을 세운 이유를 그리 설명하고 있다. 가나안 정복의 중심지는 길갈이었다. 이제 가나안의 중심부를 차지하였고, 그러므로 요단 강 건너편 길갈에서 이스라엘 본진이 실로로 옮겨졌다. 길갈은 7년 동안 이스라엘의 기지로 주요 사건을 다루었다.
오늘 이제 실로에 회막을 치고 아직도 ‘기업의 분배를 얻지 못한 일곱 지파’를 언급한다. 일곱 지파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요단 동편에서 이미 기업을 차지한 두 지과 반(13:8-33)과 요단 서편에서 기업을 얻은 두 지파 반(15:1-17:3)을 제외한 베냐민, 시므온, 스불론, 잇사갈, 아셀, 납달리, 그리고 단 지파 등이다. 이들은 아직 기업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여호수아가 외친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18:3).”
우선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이 있다. 여기서 ‘주신’은 이미 차지한 것이다. 그들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신 땅이다.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그렇듯 언약의 선물로 주신 것처럼,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1:6).” 하신 것으로 “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준비하라 사흘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차지하게 하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11).”
이와 같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땅이 저들에게 있다. 이를 ‘오직 믿음으로’ 취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저들이 지체하고 있다. 이에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하고 꾸짖으신다. ‘지체하겠느냐’는 ‘늦추다’, ‘게으름을 피우다’라는 의미다. 여호수아의 이 말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거저 주셨는데도 남은 일곱 지파가 그 땅을 취하는 데 있어 미루고 뭉개고 게으름을 피우고 있기 때문에 책망하시는 것이다. 그들로 분발하기를 촉구하는 물음이다.
우린 이미 정하신 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알 때에,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말씀을 근거로 우리는 믿음에 따라 전진할 수 있다. 곧 우리의 추진력은 신앙 안에서이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로 우리는 강하고 담대할 수 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오늘 저들 일곱 지파의 지체함에 대하여는 우리도 자주 경험한다. 해야 하는데,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먼저 주저하고 망설이게 되는 일이 교회 일이다. 주를 섬기는 게 우선일 줄 알았는데 조금 어려워지면 혹은 삶이 원활하지 못할 때는 먼저 헌금을 줄이고 교회보다 우선하게 되는 일이 따로 있다. 그렇게 누구는 선교사로 나갔다가 사업가가 되어 살고, 누구는 아이들 조금 크면 하겠다던 목회를 여전히 미루면서 나이만 들어간다.
우리 안의 게으름은 영적 전쟁의 휴지기다. 실제 내면의 적은 나태와 게으름으로 안주하려 하는 미뤄둠이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우리가 힘에 부칠 때 사탄은 기다렸다는 듯 우릴 무시한다.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행 19:13-16).”
내 가까운 누구는 실제 선교사로 떠났다가 사업가로 살아가고 있다. 저는 물론 하나님을 자주 입에 올리면서 나름의 신앙적인 신념과 믿음으로 산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보면 사업을 위해 접대를 하고, 서로 만날 때면 술집으로 부른다. 안 믿는 자들과 다른 신을 믿는 자들과도 허심탄회하게 잘 어울린다. 목사가 된 나를 축하한다며 부른 곳도 술집에 모인 옛날 대학 때의 동기들과 같이한 자리였다. 우린 그럴 때 ‘그럴 수 있지’ 하고 서로 허용하게 되는데 나로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렇듯 누구는 다원주의가 되어 여러 신들과 두루두루 교류하며 심지어는 모두가 같은 하나님이란 소리를 하는 자리에까지 갔다. 이런 경우가 우리 곁에 상당하다. 요즘은 마치 모든 게 허용되는 시대로 술 담배는 물론 성소수자나 개인적인 취향에 따른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시험하려 드는 것 같다. 허용이 아닌 포용으로 우린 모두 죄인인 것을 앎으로 주를 의뢰할 수 있다. 누가 대놓고 물은 적이 있다. 자신은 동성애자로 교회에서 죄인이라 낙인찍은 존재인데 그래도 받아주겠나? 하고 시험하듯 물었다. 나는 저에게 나 역시 죄인임을 설명하고, 우리가 주 앞에 이를 인정할 때, 그러한 개인적인 취향이니 다양성이니 하는 따위가 무의미한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또 누구는 그렇게 자유의지를 운운하며 그런 가운데 자신의 결정권을 우선하여 교회를 오고 안 오고, 예수를 믿고 안 믿고를 운운한다. 이에 나는 우리 나름이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께 바치는 일, 이로써 주께 돌려드림으로 나는 나로 사는 게 아님을 설명하곤 한다. 동성애자로 교회에 오든지, 창녀로 살인자로 교회에 오든지 우리는 모두가 죄인임을… 이를 인정할 때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사라진다. 그래서도 동성애자로 창녀로 살겠다는 그리스도인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곧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러한데 내가 누구이다, 하는 문제가 여전할 수 있겠나? 동성애자가 죄인이면 이성애자는 죄인이 아니겠나? 살인자라고 죄인이면 미워하고 욕하는 자도 살인한 것이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쩌면 좋겠나? 결국은 내가 나로 여전한 것이 모두 죄다. 저들 일곱 지파가 지체하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 다를 게 없는 게으르고, 미루고, 뭉그적거리고, 혹시나 하는 지체함이다. 이에 우리는 누구라도 성령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1-12).”
이에,
“너희 안일한 여인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사 32:9).”
오늘도 이처럼 주 앞에 나아와 말씀 앞에 나를 두고 주를 의뢰함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개인의 성향이나 특성 따위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7-48).” 차라리 몰라서 그러는 거면 그래서도 어르고 달래며 우리의 수고가 가치 있을 텐데, 알면서도 자신의 앎을 우선하여 주장하는 자는 당할 수 없다. 나의 선생이 그렇고 나의 가까운 친구가 그러하다. 차라리 안 믿는 자면 수월하겠다. 자신들이 믿는다는 믿음으로 사는 일에 대하여는, 먼지를 털 뿐이다.
우리의 결정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이를 인정할 때 스스로를 동성애자니 이성애자니, 자유의지가 어떠니 개인의 취향이 어떠하니 하는 따위로 씨름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우린 하나님의 결정권을 인정함으로 순종한다.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4).” 즉 오늘을 내 의지로, 내가 사는 일이 내 결정에 따른 것이라 여길 때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수 없다. 하여 바울은 이를 알면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
하여 오늘도 오직 주를 바람으로,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시 29:1-2).
우리로 주를 인정하기까지 하나님은 다만 참고 또 기다리신다.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3).
이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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