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삿 3:6-7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시 38:9
단순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 아니다. 분명 가나안 모든 족속을 죽여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그로 인하여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하는 이와 같은 말씀이 우리 생활의 실상이 된다. 성경의 흐름과 같이 우리의 삶은 전개된다. ‘하나님의 기쁨’으로 우리를 창조하셨고, 그에 따른 다스림과 정복의 계명을 주셨다.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흘러들었고, 출애굽 하여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주를 찾고 돌이킬 때 출애굽의 역사가 일어났고, 끌고 나온 기질과 성품으로 광야를 떠돌았다. 가나안은 전쟁이다. 모든 성격과 나의 주장, 자유의지를 버렸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이유로 사사시대를 살게 되었다. 그러니 전쟁이 멈춘 듯하나 안일함이 우리를 덮쳤다.
이에,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 너희 안일한 여인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사 32:8-9).” 본래 우리는 존귀한 자로 존귀한 일에 서서 하나님의 기쁨이어야 한다. 그런데 안일함이 들면서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일 것이며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3-4).” 이와 같은 시점에서 오늘 본문은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삿 3:6-7).”
그러니까 단순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금지하신 이유가 있다. 우리 생각으로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우리는 사실 그렇듯 강단 있지 않다. 신념이란 얼마나 얄팍한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여기서는 옳고 저기서는 그르다. 곧 우리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믿는 것보다 어리석은 확신은 없다.
하여,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3-4).”
하는 말씀을 누차 되새기게 한 것은 그 때문이다. 곧 우리의 속성이란 게 살만하면 엉뚱한 생각이 든다. 그래서도 고통이 필요하다!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삿 3:1).” 보니 아니나 다를까, 저들과 통혼할 뿐 아니라, 저들의 신을 섬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결혼이란 게 단지 ‘너와 나’의 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문화와 관습이 합쳐지는 일이다.
지혜의 왕 솔로몬의 노후가 초라했던 것도 저가 나름 이방 여인들을 후궁으로 끌어들여 살아생전 겉으로는 평화를 유지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온 우상을 자기 민족에 퍼뜨리는 결과를 낳았다(왕상 11:1-8). 더 올라가면 노아의 때가 악했던 것도,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 6:12).”
이에 바울의 외침은 강하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그런데 이러한 말씀이 선뜻 다가오지 않는다. 사는 데 있어 어찌 안 믿는 자들과 같이 멍에를 같이 하지 않을 수 있겠나? 저마다의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들이 분배 받은 땅에서 이방인을 몰아내지 않았던 이스라엘과 같이 우리의 현실도 그와 다르지 않다. 그러다 결국 ‘그들의 신들’에 도취된다. 문화와 예술이 그러하고, 유행과 사상이 그러하여 자칫 조금만 안일하면 믿는 자가 안 믿는 자보다 더욱 죄악 중에 들어선다. 입으로는 선을 말하는 듯하나 삶으로는 악을 따른다.
실제 이스라엘에 커다란 영향을 준 ‘가나안 신들’로는 먼저 ‘신들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엘’이 있고, 그의 아들인 ‘바알’이 있고, 그의 누이이며 아내인 ‘아낫’ 신이 있다. 일명 ‘호론’으로 불리는 바알의 원수와 바다를 주관하는 ‘얌’ 또는 ‘리워야단’ 신이 있다. 또한 ‘아낫’ 신과 함께 가나안의 3대 여신이라 불리는 ‘아세라’와 ‘아스다롯’도 있다. 그 외에도 숱하다.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던 ‘다곤’ 신이 있는데, 이것은 ‘곡물의 신’으로 ‘바알’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 라스에서는 ‘바알’ 신을 ‘다곤’ 신의 아들이라 했다. 또한 ‘그모스’(삿 11:24)와 ‘몰렉’(레 18:21)과 ‘밀곰’(왕상 11:5) 등은 암몬의 신들이다.
이처럼 다양한 신들이 아내와 남편을 따라 서로 통혼하면서 뒤섞여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잊고 가나안의 신들을 섬겼다. 섬겼다는 것은 단지 생각이나 말로 따른 게 아니라, 사고와 모든 생활 습관이 그에 따라 물들었던 것이다. 본래 그렇듯 한두 번 하다보면 습관이 되고 습관은 생활이 되어 곧 저의 인격이 되고 그와 같은 인격으로 살다 운명을 달리한다. 몸과 인격은 그처럼 밀접하다. 그저 단순히 ‘그럴 수 있는’ 허용의 정도가 아니다. 우리의 판단과 기준도 바꾸어놓는다.
일련의 사태에 대해 뉴스를 보다보면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까?’ 싶지만 그것이 한두 번 연거푸 되풀이 주입되고, 빠져들면 그것이 곧 세계관이 된다. 우리가 흔히 망상이라 하는 증세도 그렇듯 처음에는 에이! 설마, 하고 접하고 생각하다 나중에는 그게 진짜가 되고 진짜가 가짜가 된다. 오늘의 여러 주장이 난무한데, 저들은 모름지기 이 땅에 배울 만큼 배운 자들이다. 판사, 검사, 교수를 하던 사람들로 내로라하는 지위의 사람들이다. 누가 말하길 자신은 청계천 노동자로 시작하여 민주화 때 몇 년의 옥살이를 할 정도로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위해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에는 김구 선생을 중국 국적이라 한다!
우리가 주를 섬긴다는 일에서 그와 같은 자신들의 판단과 기준을 우선하면서 섬김의 농도가 달라졌다. 섬김은 ‘예배하다’의 다른 이름이다. 이에 하나님은 고통을 주신다. 그러면 우리는 ‘부르짖는다.’ 힘을 다해 외치는 것이다. 이것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것을 의미한다. 출애굽 후에도 이스라엘은 틈만 나면 애굽을 그리워하고 바로의 압제를 미화하여 망상하고 그때가 좋았다고 원망했다. 그 지난한 광야의 시기가 지나 치열한 전투의 가나안에서 결국 저들은 이방인을 모두 쫓아내지 못했다. 결국 오늘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자처한 것이다.
고통은 결국 하나님께 부르짖게 한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출 2:23).” 우린 모두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우리가 사는 동안 이 땅에 살면서는 의연하게, 무던하게, 온전히 주만 바람으로 일정하기란 불가능하다. 치열한 가나안으로 조금은 평안의 시절인가 했더니, 오늘 본문만 해도 세 명의 사사가 등장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삿 3:9).” 옷니엘을 시작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15).” 에훗과 삼갈이 뒤를 이은다. “에훗 후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31).” 그만큼 우리의 이율배반적인 삶은 연거푸 되풀이 되어 악을 행한다.
이방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지고, 그로 인하여 고통이 가해지고, 주의 이름을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이스라엘의 회개에 귀를 기울이시고 다시 또 다시 구원의 손길을 베푸신다. 그럴 때면 항상 ‘한 구원자를 세워’ 주의 일을 맡기셨다. 여기서 구원자는 ‘사사’를 의미한다. 사사들을 구원자라 하는 것은 단순히 재판을 하는 게 아니라,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4:5).” 직접 현장에 나아가 고통의 원인을 처리하는 용사의 사명도 수행하는 것이었다. “에훗이 왼손을 뻗쳐 그의 오른쪽 허벅지 위에서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찌르매(3:21).”
중요한 것은 그때마다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다.’ 여기서 ‘여호와의 신’은 성령을 가리킨다. 곧 창세기 1장 2절에서 시작되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이 한 구절의 말씀이 오늘 본문의 사사시대를 함축하지만 오늘 우리 생활에서의 역사 또한 포함한다. 이 땅은 끝 날까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의 영’이 그 위에 운행하심으로 다스리고 통치하신다.
이렇게 성령이 옷니엘에게 임하셨다.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과 능력이 그에게 주어졌다. 여기서 특별한 소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산 리사다임의 압제로부터 구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송사를 맡아 지혜롭게 다스리는 것까지 포함한다. 이러한 능력이란, 소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힘이다. 주의 권능이다. ‘주의 영이 우리의 수면 위로 운행하심이다.’ 내가 오늘도 이른 새벽에 눈을 뜨고 주 앞에 올라와 이처럼 말씀 묵상을 할 수 있게 하시는 권능이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시 8:2).
이 땅에서 뭔가 능력 있고 나름의 입지를 굳히고 자신의 권능을 행사하는 사람으로가 아니다. 비록 나는 쓸모없고 보잘것없다 해도,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시더라(겔 3:14).” 주가 행하신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37:1).” 말도 안 되고 불가능한 것 같은 상황에서 주가 보이신다. 주의 권능을 행사하신다. 이는 우리로 오늘을 살게 하시는 목적이다.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21:13, 29:1).
이와 같은 권능으로 우리는 산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시절을 살아가지만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1).” 주의 권능을 알지 못하고 이로써 회개하지 않을 때에 화 있을진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26:64).”
오늘도 이에 따른 권능으로 옷니엘이 되고 에훗이 되어 주 앞에 세우심을 받았다. ‘왼손잡이 에훗’과 같이 우리는 남들보다 못하고 부족하여 ‘오른 손을 쓰지 못하는 자’라 할지라도 주의 권능으로 주의 부르심에 합한 자로 산다. 이어 ‘삼갈’은 ‘돌라, 야일, 입산, 엘론, 압돈’과 <6인의 소사사>로 불리우는 자이다. 에홋의 뒤를 잇는 사사로는 드보라의 활동이 이어진다. 에홋 당시 이스라엘은 80년을 태평하였다. “그 날에 모압이 이스라엘 수하에 굴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삿 3:30).” 한 사람의 온전한 쓰임으로 평온이 깃든다.
이어지는 삼갈은 에훗이 죽고 드보라가 활동하기 전 일시적인 혼란기에 ‘소 모는 막대기’로 600명의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쳤다! 결국 우리의 쓰임과 그 역할은 크고 작은 역사로 판단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오늘의 나는 비록 보잘것없다 해도 주의 능력으로 증거가 된다. 사는 동안은 이와 같은 일의 연속이겠으나 그때마다 주께 엎드려 주께 아뢰는 게 능력이다.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시 38:1-2).
힘들고 지칠 때,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9).
우리는 주께 아뢰는 것으로 주의 권능 아래 산다. 비록,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11).
그러하나,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그들이 나 때문에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스스로 교만할까 하였나이다
(15-16).
오늘도 다만 주 앞에 나아와,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21-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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