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전봉석 2025. 2. 19. 05:13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삿 2:2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시 37:5-6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기쁨의 사람들이다. 이 기쁨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시고 조성하심으로 주와 함께 영생을 누리게 하려하심이다. 이에 시인은 노래하기를,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 37:23-24).

 

하여 오늘의 이런저런 고통도 그에 따른 원인은 각각이겠으나 그것까지도 우리가 인정하고 주를 바랄 수 있다. 이것은 욥의 놀라운 고백과 같아서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이를 풀어보면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그 손길 또한 주의 인자하심이란 것이다. 하여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63:3).

 

이와 같은 찬송으로 귀결된다. 오늘을 사는 동안 나의 생명과 그에 따른 고통까지도 주를 인정함으로 무의미하다. 오늘의 형편과 사정에 그렇듯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은 이 모든 게 주의 손길에 의한 것임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보김은 눈물이다. 애통하는 자리다. 돌이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곳이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우리가 알듯이 ‘여호와의 사자’는 곧 여호와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내가, 내가’ 하시면서 이 모든 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신다.

 

이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말 3:1).”

 

여기서 ‘언약의 사자’는 예수 곧 성자 하나님이신 것 같이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이에 대하여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우리로 예수를 보게 한다. 저는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다.

 

오늘 여기 ‘길갈’은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가나안 산악을 정복할 동안 머물렀던 근거지다. 보김은 벧엘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오늘 4-5절,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저들이 돌이키게 된 것은 고통이다. 자신들이 소홀히 여긴 ‘그 땅의 주민’들이 저들의 가시가 되어 옆구리를 찌른 까닭이다.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삿 20:26-27).”

 

저들은 돌이켜 주의 이름을 부를 때면 보김 곧 벧엘에 모여 울었다. 그러면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라고 하신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길갈’은 이스라엘 민족이 할례를 행한 곳이다(수 5:9, 13-15). 거기에서부터 이제 ‘보김’에 이르렀다. 주 앞에 돌이켜 회심하고 회개하여서 주의 사람으로 살면서 우리는 간혹 말씀을 경홀히 여기며 함부로 세상에 산다.

 

세상 사람처럼 저들과 다르지 않게 사고하고 판단하면서 저들처럼 산다. 그러다보면 그와 삶이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되어 우리로 고통 가운데 처하게 한다. 누구는 그 자식이 대기업에 들어가려 2년 가까이 취업준비생으로 살았다. 고생 끝에 결국 모 기업에 들어갔을 때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지금도 어느 부서 무슨 파트에서 근무하는데, 그의 업무 특성상 매일 술이다. 싫든 좋든 그런 일로 쳇바퀴 돌며 산다. 지난 명절에 보니 술살이 올라서 거구가 되었고, 말끝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으로 힘들어하였다.

 

우린 모두 그런 식이다. 좋은 고등학교에서 좋은 대학만 가면 좋을 것 같다. 좋은 대학에서 좋은 직장으로 취업만 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런 식으로 살다 신앙은 사라지고 이 땅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사고와 생활 방식으로 산다. 그러는 자식을 두둔하듯 다 그렇지, 하고 예사로운 듯 신앙의 부모들도 그냥 넘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땅의 삶을 주신 이유가 있다. 먼저는 그의 진실하심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다음은 그의 구원의 능력을 실증하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의 사랑을 보여주시려 하심이다. 이를 이사야는 증명한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이는 우리의 존재이며 우리 생의 기본명제이다. 이에 하나님의 언약은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2).” 하고 주가 함께 하심을 약속하셨다. 이는,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3).”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데 따른 증명이다. 이에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4).” 하고 오늘도 이와 같은 말씀을 실현하시는데 있어,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5-6).” 하고 주가 우리를 인도하심을 알게 하신다. 곧 이를 위하여 오늘 우리로 이 땅에서의 또 하루를 살게 하시는 것이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7).”

 

고로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자’이다. 그럼에도 스스로는 이를 자주 잊거나 부정하고 산다. 사느라 사는 일에 급급하여 사는 게 지옥 같을 때에야 보김에서 운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때 우리는 다시 ‘나는 누구인가?’ 하는 데 따른 답을 얻는다. 곧 우리 자신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어떠하든지,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하시는 주의 음성에 귀가 열린다. 하여,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일 것이며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사 32:3-4).”

 

우리로 다시 주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다. 이는 우리가 오늘도 주의 긍휼하심으로 산다. 살아서 우리의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으로, 우리의 고통도 하나님의 기쁨으로 인도되는 자리가 보김이요, 벧엘이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하여 오늘 말씀은 묻는다.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삿 2:2).”

 

오늘 날 우리 사회의 현상을 지켜보며 믿는 자들로서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 되짚어야 한다. 우리도 어느 쪽에 편승하여 서로의 총구를 겨누고 서있지는 아니한가? 결국은 내가 겨누고 있는 총구가 실상은 나의 이마를 겨누고 있는 형국임을 알지 못하는지? 오늘 말씀은 그런 의미에서 ‘너희는 이 땅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곧 우리가 살면서 ‘남들처럼’ 사는 데 급급한 날이었다면 이와 같은 말씀이 절절하게 다가올 것이다. 어느새 서른 후반, 예전에 좋은 대학에 가려고 기를 쓰고 살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려고 애를 쓰며 살았는데, 채 10년도 안 돼 ‘죽지 못해 사는 인생’으로 지겹다는 말이 그 입에 달렸다. 사는 게 지옥이 되었다. 다들 예전에 믿었던 그 믿음은 찾을 수가 없다. 이에 하나님은 고통을 주신다. 그 고통은 하나님이 가하시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말씀을 저버리고 ‘이 땅의 주민과 같이 언약을 세우며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누누이 말씀하셨다. “너는 그들과 그들의 신들과 언약하지 말라…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까 하노라(출 23:32, 34:12).” 이를 더 구체적으로 명하시길,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3-4).”

 

이와 같은 말씀은 이제는 다들 허투루 듣는다. 갖은 이유와 타협과 자기합리화로 ‘그럴 수 있는 일’들로 치부해버렸다. 나는 이를 지키려고 우리 아이들에게 그 배우자를 선택할 때 다른 것은 바라지 않고 ‘믿는 자’를 부탁한다. 딸애와는 그 일로 심하게 다투며 서로 운 일도 있다. 그렇게 다들 나이가 들어 서른이 넘고부터 나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는다. 저들은 내 뜻을 충분히 알았을 터, 딸애는 그 일을 마음에 둔 것 같은데 아들은 모르겠다. 하여튼 우리는 살면서 살다보니 ‘길갈’의 은혜는 온데간데없이 살다, 기어이 고통으로 인하여 ‘보김’에서 운다. 돌이켜 벧엘에 모인 것으로도 은혜이겠다.

 

우리가 현재 사는 이 ‘땅의 주민들’ 역시 저마다의 제단과 그 우상과 섬기는 신들이 있어 더러는 맘몬으로 돈이 최고이고, 더러는 출세와 성공으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평범함이라 한다. 과연 우리의 평범함은 남들처럼 사는 일일까? 그런데 왜 성경은 우리에게 ‘피 흘리기까지 대적해야 된다’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일까?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4-5).”

 

이를 잊거나 소홀히 여겨 허투루 살다 어느 날 고통 가운데서 깨닫는다. 이를 C. S. 루이스는 ‘고통의 의미’에서 차분하게 변증하였다.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로 우리에게 위험을 알리시는 주의 큰 음성이라 하였다. 실제로 아니 그러한가? 우리가 생겨먹은 게 그래서 그런가? 다들 평온하고 아직 살만할 때는 이를 잊는다. 무시하고 대수롭지 않아 한다. 그러다 평온한 일상이 깨지고, 느닷없는 고통으로 신음하다 깨닫는다. 거기, 그 자리가 ‘보김’이다. 오늘 본문을 나는 그리 읽는다. 우리는 평소, 우리 주변의 죄를 이기기 위해 때로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용기를 내야 한다. 결단이 필요하다. 남들보다 수고해야 한다.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마치 우리의 생은 심각한 전투 같다. 사는 게 전쟁이다. 이에 오늘 말씀은 우리로 다시금 경고를 듣게 한다.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삿 2:3).”

 

언약을 주신 데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계는 하나님의 통치가 있고 언약이 섰다. 이에 따른 경고다.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가까이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서로 왕래하면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수 23:12-13).” 하면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가령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 ‘옆구리에 가시’가 무엇으로 인한 것인가? 혹시 죄를 용납한 결과는 아닐까? ‘에이, 설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일 때문은 아닌가? 나는 오늘도 이른 새벽에 일어나 주 앞에 앉았다. 그리고 여러 기도제목들을 떠올리며 이 글을 쓰면서 묵상한다. 문득 떠오르는 어떤 일이나 누구를 생각한다. 일련의 사회현상을 보면서 사람들, ‘이 땅의 주민들’과 왜 언약을 맺어서는 안 되는가를 새삼 깨닫는다. 이에 오늘 시편은 외치며 가르친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시 37:1).

 

세상은 본래 그렇다. 어떠하다고 서로를 겨눈 총구를 당길 수는 없다. 우리는 저들을 비판할 게 아니라, 보는 눈이 열리고 듣는 귀가 밝아져야 한다. 일련의 사태는 암시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이 날의 징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7-8).” 그러므로 저들 때문에 불평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으로 우선하지 않는 세계는 모두 그러하다. 그렇다면 더욱,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3-4).

 

하여,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5-7).

 

이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23-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