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삿 8:2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3:5
에브라임 사람들은 이스라엘 12지파 중 가장 불평이 잦은 지파였다. 이들은 여호수아 당시에도 므낫세 지파와 더불어 자기들이 기업으로 받은 영토가 다른 지파에 비해 좁다고 불평했었다. 오늘은 기드온을 상대로 자신들을 끼어주지 않았다고 불평한다. 훗날에 그들은 사사 입다와도 다투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12:1).”
오늘은 기드온을 상대로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8:1).” 꼭 이렇듯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고질적으로 이스라엘 왕국을 분열시키는 족속이다. 여로보암 때, “솔로몬의 신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또한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였으니 그는 에브라임 족속인 스레다 사람이요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스루아이니 과부더라(왕상 11:26).”
저들의 불평은 이런 식이다.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이 어찌 됨이냐?” 하는 것인데, 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비단 에브라임만이 아니라 여러 지파들이 용사로 나서지 않았고, 뽑히지 않았다. “기드온이 또 사자들을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따르고 또 사자들을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 그를 영접하더라(6:35).” 더구나 에브라임 지파는 전쟁 말기에나 참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을 비난하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전체 지파 중에서 자신들이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드온이 에브라임 사람들을 높여 주면서 그들의 노를 풀어주는 것을 본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니라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2-3).”
오늘 날에도 다르지 않게 어딜 가나 ‘에브라임 사람들’ 같은 이들이 있다. 실제 자신들을 헌신하지도 않으면서 대접은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 나서서 목소리는 큰데 그러면서 교회를 위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듯하나 속내는 자신들의 위신을 높이고 존중받으려는 속셈이 빤히 보인다.
당시 미디안 연합군으로 인해 시달릴 때 납달리 지파와 스블론 지파와 아셀 지파 사람들이 나서서 기드온이 속한 므낫세 지파를 도왔다. 그런데 뒤늦게 에브라임 지파가 자신들을 처음부터 참여시켜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평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속성이 우리 속에 있고, 실제 우리 교회 공동체에 있고, 사회와 어디 모임에도 꼭 있다. 부지런히 자신을 살펴 열심을 다하는 헌신은 없고 순전히 그 속에서 인정받고 대접받고 싶어 하는 속성이다. 그런 무리를 보면 불편하고 마음이 어려운 것은 우리도 또한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설령 내가 주인공은 아니라 해도 저를 축복하고 축하는 것도 실력이다. 마치 세례요한의 자세와 같이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29-30).” 물론 이게 그렇듯 말처럼 쉽지 않다. 사람들이 현재 자신을 주목하고 따른다. 그런데 그 시선을 주께 돌리고 주를 향하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말로는 주를 인정하는 듯하나 실제 그 속에서 이득을 챙기고 실속을 꾸리려는 에브라임 같은 사람들을 여럿 본다.
일련의 사태에서도 정치인은 물론 종교인들까지 나서는데 가만히 그 작태를 보면 저마다 자신들의 실속을 우선한다. 하물며 요즘은 저마다 개인방송을 띄워 조회 수나 회원 수로 돈이 되는 터라, 이득이 될 것 같으면 서로를 띄워 같이 연합하는 듯하다 막상 어려울 때는 남을 헐뜯고 자신들끼리도 졸지에 총구를 겨누며 적대시하는 것을 본다. 그런 거 보면 오늘 이 ‘에브라임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공존하고 있다. 이에 성경은 이르시되,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4-15).”
그럴 수 있는 게 은혜이고 능력이다. 이것이 권위이고 덕이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일 수 있는 게 품격이다. 이에 바울은,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3-25).” 결국 오늘의 우리 수고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이르시길,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2).” 주가 다 아신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5).” 그러므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 하신다. 우리가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바라지 않는 것은,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히 4:3).”
우리로서는 이 땅의 결과가 전부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안식에 들어갔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본향에서의 복락이 있다. 고작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그에 따른 대접으로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더러는 아무도 몰라준다 해도 상관없다. 이 모든 것을 아시는 이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 자신보다 상대를 높여줄 줄 안다. 상대를 높임으로 오히려 자신이 인정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로 원수의 발등상에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시 110:1).
그러므로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6-27).”
이는 미덕이 아니라 각고의 노력에 따른 인내이고 수고이다. 결국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하는 지혜의 말씀으로 정의된다. 사람이 그렇듯 겸손하기란 쉽지가 않다. 어디서 내 안에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누가 알아줄 때 기쁨이 온다. 저들이 나를 환대할 대 스스로의 성공여부를 판단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환호란 물거품과 같아서 허공을 조금 날다 순식간에 터져버리는 비눗방울 같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에 공을 들이고 사력을 다하는 것은 일순간에 그것이 돈이 되고 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하여 더러는 살짝 손댄 것이 중독이 되어 성형괴물이 되고, 대중의 사랑을 희구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이런 기사가 우리를 허무하게 하는 것은 순간 저의 선택이 더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나라가 자살률 세계 1위라 하는데 그만큼 너무 남의 인정과 기준에 기대어 살아야 하는 풍습 때문이다. 남들처럼 되려고 기를 쓰고 살다가 남들보다 조금 더 낫기를 추구하고, 이는 마치 도미노처럼 기껏 쌓아왔는데 하나가 무너지면 삽시간에 모든 게 도로아미타불이라, 이에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것이다.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나 이와 같은 ‘에브라임 증후군’이 우리 속성에 있다.
이에 주님은 부르시고 이르시되,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내가 나를 낮춘다는 것은 하나님만 바라볼 때 가능하다. 주가 아심으로 됐다. 결과도 성과도 없이 남들의 경멸과 멸시의 눈초리가 따갑다가도 주가 아신다는 믿음으로 사는 일, 그리하여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3-4).”
굳이 싸울 거 없다. 다투며 내 몫의 인정을 요구할 것도 아니다. 가끔은 나의 유년의 기억이 긍정적인 해설서가 된다. 가령 어릴 때는 왕따를 당하면서 내 탓이라 여겼는데, 그때도 은연중에 저들이 몰라주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고 내가 저들을 이해하려 했던 것 같다. 설마 그 정도까지 성숙했다는 소리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나는 아이들이 어떤 나의 외모나 결과로 조소와 조롱의 눈길을 보낼 때 알고 있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저들은 나의 실정을 알 수 없는 것을 말이다. 내가 아무리 설명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을 바랐을까?
더 어릴 때 아버지는 내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땐 그런 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지만… 오늘 본문에서 에브라임의 불평과 그것이 실은 내 속에도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가령 누가 이 글을 읽어주든지, 인정하든지, 신경 안 쓴다고 하면서도 아쉽고 서운할 때가 왜 없겠나? 어제는 친구가 요즘은 성경도 안 읽고 교회에서도 여타 성경공부가 없다고 해서 그럼 당분간 나와 같이 어떤 주제나 성경 본문을 정해 같이 나눌까? 하고 권하였다가 거절당했다.
지난 주일에는 아이에게 주중에 이렇게 하자, 하고 무얼 권하였다가 싫은 듯 엉뚱한 소리로 변명하는 것을 듣고 서운하였다. 내 안에 드는 이와 같은 서운함 내지는 불편함이 온당하다. 친구가 선뜻 그러자고 했다며 오히려 고마워하였다면 내 안에 우쭐해하는 마음이 들었겠지? 아이가 좋아하며 고마워했다면 나는 또 어떤 보람을 느꼈을까? 이렇듯 내 속에 인정받고 싶은, 나는 이것을 ‘에브라임 증후군’이라 여긴다. 우리 안에 내재된 사실로 이를 거절당했을 때 우린 불평이 나온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도 다르지 않다.
이때 오늘 본문에서 기드온의 유순한 말이 큰 위로가 되고 교훈을 더한다.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니라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삿 8:3).” 그러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겉으로는 알 수 없는 그 속의 여러 감정들을 어찌 다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결국 이 모든 일의 해결책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가능하겠다. 하여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이는 모든 일에 키워드이다. 하여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25:15).” 우리가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함과 비례한다. 남들이 무시하고, 자식들이 몰라준다 해도 묵묵히 주와 함께 할 때 나 자신조차도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괜찮을 수 없는데 괜찮을 것 같은 것은,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낫지 아니하냐?” 하는 오늘 기드온의 지혜로 알게 된다. ‘끝물 포도’는 ‘맏물 포도’를 거둔 후 남은 포도를 의미한다. “세계 민족 중에 이러한 일이 있으리니 곧 감람나무를 흔듦 같고 포도를 거둔 후에 그 남은 것을 주움 같을 것이니라(사 24:13).” 이는 은혜의 결정적인 논리다. 실제 에브라임 산지의 ‘끝물 포도’가 자기 고향에서 생산되는 ‘맏물 포도’보다 훨씬 좋다. 이는 에브라임을 위로하는 말이지만 미디안과의 전투에서 기드온 집안사람들인 아비에셀(6:11)이 처음부터 끝까지 세운 공로보다, 전쟁의 막바지에 참여한 에브라임 지파의 공로가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풍자한 것이다.
성경에서 우리의 은혜에 대해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하심과 같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그리할 것은 내가 받은 은혜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롬 4:6).” 이 말은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곧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 4:20).”
하여 오늘 내 안의 ‘에브라임 증후군’을 깨닫고 주께 고할 때,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요이 1:8).” 주 앞에 고개 숙여 고하기를,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43:3-4).
이에 오늘도 누가 알아주든지 어쩌든지, 나의 마음에 어떤 불편함이나 서러움까지도 주께 내어놓으면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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