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전봉석 2025. 3. 11. 04:39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 1:16-1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 57:7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의 일이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는 명백한 사실임을 알린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교훈을 주기 위한 ‘허구’가 아니다. 예를 드는 어떤 꾸며낸 이야기도 아니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 왕정 시대를 앞두고, 다윗의 출생과도 맥이 닿아 있다.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룻 4:16-17).”

 

이 일은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의 일이다. 앞서 사사 시대를 거쳐 말씀을 묵상한 바, 여호수아가 죽고 난 뒤 그때마다 하나님은 종들을 세워 사용하셨다. 첫 사사로는 옷니엘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삿 3:9).” 죄를 범하고, 주께 회개하고, 사사를 세우시는 과정이 매번 되풀이 되는 것을 보았다. 때는 주전 1367년 경의 일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등장할 때까지 이어졌다.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삼상 10:1).” 이때는 주전 1025년 경이다. 그렇게 보면 사사시대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대략 342년간의 기간이다.

 

오늘 룻기의 배경은 사사 드보라가 활약하는 시기로 이스라엘이 40년간 평화를 누리고 있던 때를 지나,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삿 5:31).” 다시 미디안 족속의 압제를 받던 12세기 후반 경으로 사사 기드온의 시대로 추정된다. 이는 주전 1010년으로 헤브론에서 통치를 시작한 다윗이 바로 룻의 증손(曾孫)이라는 사실로 미뤄 알 수 있다.

 

결국 사사들이 재판하던 날들에 있던 이야기로 다윗의 증조모인 룻의 이야기이다. 당시 사사들이 하는 일은 문자 그대로 주로 백성들의 소송을 ‘재판하는 일’이었다. 이름 하여 사사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서두에서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하고 그 의미를 분명히 하면서 시작한다. 그때에 하필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생에 있어 피할 수 없는 흉년의 때가 온다. “유다 베들레헴에”도 그러한 시절이 있었고, 그때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흉년을 피하려고 “거류하였”다(룻 1:1).

 

가나안에 정착한 후 농사는 필수적이었다. 광야 40년의 길에서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이에 흉년은 드문 일도 아니고, 그 성격은 대부분 하나님의 징계로 볼 수 있다. 곧 우리에게 가해지는 고통은 모든 게 선할 리 없고 악하나, 고통은 악의 의미이면서 동시에 선을 이루시는 수단이 된다. 흔히 ‘고통은 축복의 통로’라고 하는 것도 이를 바로 수용할 때 풍랑 중에 배가 빨리 더 멀리 갈 수 있듯이 우리의 신앙도 돌이켜 더욱 가파르게 성장할 수 있다. 물론 그렇지 못하고 추락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도식적으로도 그 의미는 단순하다. 곧 우리에게 인생은 ‘언약의 땅’이다. 우리로 소망을 갖게 하셨다. 이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기만 하면 ‘풍성한 소출이 약속된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내가 너희에게 철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레 26:3-4).” 이는 단순하게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다.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도 충분하다.

 

우린 하나님의 뜻을 알기 전에는 ‘오래 된 묵은 곡식’과 같은 관습과 문화에 젖어 살았다. 그러나 주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약속의 땅’으로 이 땅을 살게 되면서는 ‘묵은 곡식’ 같은, 단지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벗어났다. 이를 치우고 새 곡식을 취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 마음이 하나님을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 나아가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알고, 같은 듯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이를 성경은 이어서,

 

“너희는 오래 두었던 묵은 곡식을 먹다가 새 곡식으로 말미암아 묵은 곡식을 치우게 될 것이며 내가 내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0-12).”

 

이를 알면서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로 다시 살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오늘도 성경을 붙들고, 룻의 이야기에서 나의 미래를 유추한다. 성경의 목적은 일관되게,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신 28:1).” 하는 데서 이를 향해 오늘 아침에도 일찍 눈을 뜨고 주의 전으로 왔다. 이어지는 말씀과 같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2-6).”

 

하신 ‘약속의 땅’에서 산다. 다들 저마다의 불투명한 희망과 그 약속을 붙들고서라도 죽어라 하고 공부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열심을 다해 사는 것이 아니겠나? 그렇게 판검사 의사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를 쓰고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일 텐데, 저들의 약속은 일시적인 현실에서의 잠깐의 보장된 삶일 수는 있겠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그렇듯 취하였던 ‘묵은 곡식’을 버리고 ‘새 곡식’을 먹으면서 알았다.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7).” 하나님이 나의 생에 함께 하셨고, 함께 하심으로 오늘도 나를 치러 들어오는 ‘적군’을 물리치신다. 오늘에 대한 불안과 혹시나 하고 기대하며 사는 막연한 추론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8-9).”

 

그리하여 나의 날들이 남들의 관점과 다른, 세상의 이치와 동떨어진 가치와 그 기준으로 살고 있음을. 이러한 나의 남다른 삶을 두고, “땅의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이 너를 위하여 불리는 것을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10).” 즉 때로는 나의 평안이 저들 눈에는 기이하다. 또는 나의 환난이 저들로 그 본성에 죽어있던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사랑하게 하는 마음을 일깨운다. 이를 이해하는 데는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까 97학번으로 신학교로 다시 학부생으로 편입할 때도 내가 내 돈 주고 내가 깨달은 바, 나의 수고와 노력으로 이루었던 일이 아니어서 말이다. 그땐 참 어렵고 힘든 시절이어서, 나의 부친은 개척교회를 끝내고 자력으로 교회를 짓고 교회가 교인들과 함께 무난할 줄 알았는데 그 지경의 흉년이 닥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교회 건축으로 부채가 늘고, 설상가상 건축을 담당하던 재정집사가 사고를 쳤고, 그로 인해 자고 일어나면 이자가 늘고 원금은 쌓여가면서 하나둘 교인들은 추풍낙엽처럼 떠나갔다. 고작 몇 가정 남지 않은 상태로 예닐곱 해를 견디는 동안… 나는 그때 덩달아서 고통을 당하였고, 생에 가장 악한 길로 치달았던 것 같다. 그런 가운데 뜬금없이 편입을 하고, 신학을 하다니!

 

다시 생각해도 그때 그 일을 내가 주를 갈망하고, 주도적으로 열심을 다한 것이면 할 말이 많았겠다. 그때 나는 최악이라, 교회도 하나님도 징글징글했던 때이다. 그런 와중에 사람을 보내시고, 저의 강권함으로 신학까지 하게 하신 일은 늘 생각해도 희한하다. 그 사람과 나의 관계란 그럴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슨 대단한 인연도 아닌데, 나를 설득하고 학비를 전액 지원하면서 그땐 그렇게 나를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였다. 즉 나의 ‘어처구니없는 환난’이 저의 어떤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는지, 나는 지금도 다 알지 못한다. 당시로 이천오백? 아니 삼천? 어쩌면 족히 그 이상의 금액을 기꺼이 더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학부를 마치고 신학대학원을 시작했다가 한 학기 만에 포기하기까지였으니… 그때 이후 나는 저의 소식을 모른다. 그렇게 도로 퇴보인 듯 나의 생은 10년을 넘겨 09학번으로 다시 붙들려서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라, 그때마다 6학기 동안의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학비를 나는 나의 이해와 상식으로는 어찌 다 설명이 안 된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하신 나의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실제 체험하고 살았던 것이다. 그뿐인가? 나는 부족할 뿐이지만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여태껏 사는 동안 누가 함부로 나를 대한 적 없고, 어디 가서 굽신거리며 살게 하지도 않으셨다(12).

 

이를 앎으로 오늘도 기를 쓰고 이처럼 새벽에 깨워 주 앞에 나아오게 하심인데, 곧 날이 좀 더 풀리면 다시 또 교회에 나와 잘 생각으로 부풀어서,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12-14).” 나는 이제 이와 같은 ‘약속의 땅’에서 더러는 환난을 당하나, 나의 환난이 또한 누구에게 선을 이루는 줄 알고 기꺼운 마음으로 주를 바란다. 고작 열 명도 안 되는 이 작은 교회로 전전긍긍하는 처지에도…….

 

우리를 엄습하여 찾아오는 온갖 재앙과 기근과 흉년이 고통을 가하나 동시에 더욱 주를 바라게 하는 일이다. 오늘 엘리멜렉이 그 가족을 이끌고 흉년을 피하려 약속의 땅을 떠나 이방의 땅 모압으로 들어간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 결과 얼마 후에 자신은 이방의 땅에서 죽고 그 두 아들은 모압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자식을 보지 못하고 둘 다 죽었다. 당시 모압은 요단 동편에 위치하며, 사사 시대 아르논 강 경계로 르우벤 지파와 인접해 있었다. 곧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에서 이 지방까지도 그렇게 멀지 않았으므로 엘리멜렉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씀의 원칙은 ‘약속의 땅’을 지켜야 했다. “그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게 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 지파가 각각 자기 기업을 지키리라(민 36:9).” 나는 나의 87학번에서 97학번 사이, 97에서 09학번 사이, 각각의 십 수 년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열거할 수 없다. 눈물로 다 고하여도 용서함을 받을 수 없는 죄악 된 길에서 살았다. 물론 나름은 옳다고 여겼고,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이라 내 곁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이들과는 어느 때보다 잘 어울려서, 더러는 내게 인복이 많다고도 하였다. 과분한 스승과 나름 사회적으로도 훌륭한 사람들이라, 저들과 어울리면서 나 역시 뭐라도 되는 줄 알았다.

 

오늘 이 가정은 그렇게 모압 땅에서 10년 동안을 우거했다.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4).” 그렇듯 단지 흉년을 피해 모압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아예 그곳에 정착한 셈인데, ‘엘리멜렉’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왕이시라.’ 하는 것으로, 그는 자신의 이름 값도 못한 셈이다. ‘나오미’의 뜻은 ‘감미로운 자’, ‘은혜스런 자’, ‘사랑스러운 자’로 후에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고 난 뒤에야 그 이름을 깨달으며 부끄러움을 회복하였다.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룻 1:19-20).”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로 주목하게 하는 인물은 이방 땅의 모압의 딸 룻이다. 저의 고백은 가히 그 중심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셨음을 알린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16-17).”

 

그러니 같은 흉년의 때라도 누구는 어떠하고 누구는 어떠할지, 나는 오늘 이와 같은 말씀에서 주목하게 된다. 룻에게 있어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하는 것은 진실로 룻이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 되신다는 올바른 신앙에서 근거한다. 비록 이방 나라 우상의 땅에서 온 여인이었으나 저는 ‘묵은 곡식’을 버리고 ‘새 곡식’을 취하였다. 저는 일찍이 섬기고 살았을 보고 듣고 느끼던 나라에서, 전혀 새로운 ‘약속의 땅’으로 옮겨졌다. 이는,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이에 오늘도 우리는 이처럼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묻는 세상에서 분명히 그 입장을 정해야 한다. 이를 시편의 시선으로 보면,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시 57:1).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2).

 

이에,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5-6).

 

늘 그렇듯 흉년은 찾아와 우리에게 환난과 고통을 당하게 하나,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7).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니,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