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
삿 20:48
옛부터 계시는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들을 낮추시리이다 (셀라) 그들은 변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이다
시 55:19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앞에 모였다. 앞서 레위 사람이 그의 음행한 첩을 데리러 장인의 집에 갔다 오는 길에 첩이 베냐민 기브아의 불량배들에게 농락당해 죽었다. 이를 알리려 그 첩의 몸을 열두 조각으로 나눠 이스라엘 각 지파로 보냈다.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은 오직 여호와 한 분이심을.’ 저들에게 왕이 없음으로 각기 좋을 대로 행하던 때에 벌어진 일이다.
그러한 일을 당한 이도 레위인으로 구별되어야 할 사람이 첩을 두었다가 그리 된 것이고, 같은 민족으로 음행하다 결국 사람을 죽였다. 이는 모든 일이 다 악할 뿐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이에 이스라엘 온 회중이 미스바에 모였다. 특히 오늘 본문은 저들이 ‘여호와 앞에 모인 것’을 부각시킨다.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삿 20:1).”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곧 단은 가나안 최북단의 성읍이고(18:29), 브엘세바는 최남단의 성읍이다(창 21:31). 따라서 요단 서편 가나안 땅 전역을 가리킨다. 또한 ‘길르앗 땅에서 나왔다.’ 이는 요단 동편 땅에서도 나온 것이다. ‘미스바’는 ‘망대’라는 뜻이다. 이 지명이 두 곳에 있는데 하나는 길르앗 땅의 미스바이고, 다른 한 곳은 베냐민 지파 변방에 위치하였다. 미스바는 국가적 총회 장소로 모일 때 함께 하는 곳이다.
레위인의 전갈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서 총회로 모이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그리하여 기브아를 칠 것을 결의한다(1-11). 이 회의에선 세부적인 지침이 함께 가결되었다. 기브아의 비류들을 징계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한 것(8), 전체 백성 중 10분의 1을 군사로 모집하고 군량미를 공급한 것(10), 딸을 베냐민 자손의 아내로 주지 아니할 것(21:1), 하나님의 총회에 나오지 아니한 지파를 멸할 것(21:5)이다.
앞서 기브아의 성읍을 공격하기 전, 베냐민 지파에게 비류들을 넘기라는 최후통첩을 보내나 이를 거부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내전은 불가피해졌다(12-16). 이스라엘이 모두 모여 전쟁을 개시하였다. 그리나 이스라엘이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에게 연일 패한다(17-25). 본문은 이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패배 원인이 무엇인가를 암시한다. 결국 저들 이스라엘 연맹군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화목제를 드린다(26-28).
그리고 베냐민 지파에게 크게 승리한다(29-48). 이때 림몬 바위에 숨은 600명 이외에는 모든 베냐민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자칫 베냐민 지파가 사라질 심각한 위기가 발생한 것이다(21장). 아무튼 이러한 내용이 참혹하고 끔찍한 것은 죄가 죄로 이어져 같은 민족이 같은 민족을 죽이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저들은 같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을 차지한 단일민족이다. 앞서 저들은 한 부친의 자손들로 혈육이고 혈족이다.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인지, 공동체 의식은 파괴되었고 도덕적 기준도 붕괴되었다. 당시 대제사장 비느하스가 있었다. 저는 모세 시대부터 활동했던 사람이다.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은 부디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였고 그는 비느하스를 낳았으니 이들은 레위 사람의 조상을 따라 가족의 어른들이라(출 6:25). 숱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였으나 그만한 존재감도 위력도 없이,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한낱 허수아비 같은 제사장에 불과했다.
앞서 2장 7절에서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하였는데, 대제사장 비느하스는 그만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듯하다. 저는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큰 일’을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무책임함이 오늘의 이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이스라엘이 기브아의 행악에 분노를 나타낼 때 그 시대의 어른으로서 공동책임을 일깨우지 못하였다.
오늘 미스바에 모여 이스라엘 총회에서 다루어진 내용을 보면, 기브아의 범죄를 자신들의 범죄로 다루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서 그 일의 발단인 레위인도 이를 돌아보며 회개하지 않았다. 억울하여 이를 알린 과정도 끔찍하게 사체를 토막 내어 12지파 앞으로 보냈고, 서로는 자신들의 죄악 됨을 인정하기는커녕 당장의 문제에 혈안이 되어 베냐민을 정죄하는 일에만 집중하였다.
“내가 내 첩의 시체를 거두어 쪼개서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냈나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라… 우리가 이제 기브아 사람에게 이렇게 행하리니 곧 제비를 뽑아서 그들을 치되…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어 두루 다니며 이르기를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행이 어찌 됨이냐(6, 9, 12).”
당장의 일에 함몰되면 앞서 왜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하였는지 분별하지 못한다. 서로를 겨누어 정죄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할 생각은 못한다. 일련의 우리 사회나 전세계적인 추세와 관점이 모두가 그러하다. 그런 가운데 혼란은 가중되고 서로에 대한 증오는 증폭된다. 자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서로가 자신을 돌아볼 생각이 없다. 오늘 여기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치 자신들은 깨끗한 듯 저마다 재판관이나 된 양 베냐민 지파를 향하여,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어 두루 다니며 이르기를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행이 어찌 됨이냐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들 곧 그 불량배들을 우리에게 넘겨 주어서 우리가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여 버리게 하라(12-13).”
하고 베냐민을 몰아세운다. 그러나 “베냐민 자손이 그들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당연히 버티며 서로가 서로를 향해 겨누는 정죄의 총구는 위태롭게 정조준 한다. 이들은 이와 같은 상황의 발단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니 사건만 보고 민족적 회개 운동은 일어나지 못한다. 함부로 정죄하기 급급하고, 함부로 정죄하는 어리석음에서 급기야 서로 같은 민족임에도 가나안 족속을 상대할 때보다 치열하고 잔혹하다.
나는 오늘의 우리 사회를 보면서 두려운 마음이 든다. 내란으로 구속되었던 현직 대통령이 석방되었다. 물론 법원은 나름의 논리로 날짜를 시간으로 계산하여 구속이 부당하다고 판단하였다. 법원은 법원대로 공정한 판단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교수의 말처럼 공정은 공평함에 양심이 합해진 것이다. 이런 논리로 각 언론사는 공정을 운운하며 선과 악을 같은 기준으로 놓고 자신들은 중립을 외친다. 논조는 그게 아니면서도 취하여 주장하는 바는 자기주장의 오류에 빠지는 셈이다. 일련의 사태와 오늘 본문의 교훈은 회개가 우선이다.
오늘의 이 모든 현상을 보며 우선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어쩌다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를, 자신의 행위가 어떠했는지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잘못을 단죄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와 같은 자기모순의 주장으로 서로가 총구를 겨누면 외세의 침입보다 무서운 서로의 반목은 더욱 잔인하고 치열할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죄는 각 진영의 자기모순과 죄악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로서는 이에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가 우선이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고전 5:1-2).”
어쨌든 아직은 현직 대통령의 구속과 석방이 불안과 염려로 다가오는 것은 저의 반성이 없기 때문이다. 우선하여 잘못을 뉘우칠 능력이 없다. 본문의 대제사장 비느하스가 버젓이 있는데도 저가 그 자신의 나태함인지 무력함인지, 그의 존재감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데서 시작해야 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 사회와 본문이 닮은 것은 서로를 정죄하는 데만 혈안이 돼 있다는 것이다. 이를 틈타 자기 목소리를 내며 돈벌이에 급급하고, 자신의 명성을 알리는 데 혈안이 된 선동가들을 나는 증오한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6-27).”
서로가 물고 뜯는 결과로 오늘 우리나라는 단 하나 남은 분단국가로 같은 민족끼리 최악의 관계로 총구를 겨눈 채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이를 방어하자고 한미연합훈련을 하다 자국의 영토에 오발탄을 투하하질 않나, 한 해 국방비가 천문학적으로 들고, 서로를 좌파니 우파니 하며 그 사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크게 착각 하는 것은 국민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민의가 천심이란 엉뚱한 소릴 교회가 나서서 떠들어서는 안 된다.
오늘 2절의 말씀이 이를 알게 한다. “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 명이었으며” 여기서의 어른들이란 표현이 단순하게 칼을 빼 들 보병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른들’ 곧 다음 세대에게 오늘의 이 사태와 사실과 그 결과를 물려줘야 할 책임 있는 사람들….
나는 요즘 자주 느끼는 게 이 시대의 어른부재를 한탄한다. 종교지도자로든지, 정치지도자로든지 각계각층에 그와 같은 어른이 없다. 현직 대통령이라 하는 이도 어.찌.됐.든.지. 자신이 선포한 계엄으로 인하여 오늘의 이 파국을 불러온 것이면 우선은 사과와 자숙이 먼저 아닐까? 어제 구치소에서 걸어 나오며 자신을 지지하는 꼴랑, 구치소 앞에 모인 지지자들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민의가 하나님의 뜻이란 생각,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은 모두 헛되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 32:1).” 하여 모세를 대신하던 아론은,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4).” 이것이 오늘 우리의 실상이다. 이어 아론의 변명에서 한탄이 나온다. “아론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22).”
다수결의 원칙으로, 민심이 천심이란 말로 현혹하여 대의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이때에’, 오늘 우리의 이때가 ‘왕이 없는 때’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한, 양심이 발동하지 않는 한 공정은 허울뿐인 중립을 부르짖고, 그 중심은 냉혹할 정도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뿐이다. 우리는 이미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하여 성경은 일갈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방민족이 서로 그러한 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참사가 벌어졌으니, 베냐민 한 지파가 통으로 사라질 위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큰 소리로 울며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하더니 이튿날에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거기에 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삿 21:2-4).” 뒤늦은 후회와 한탄은 돌이킬 수 없는 참사를 겪고서야 온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
오늘 우리 사회의 일련의 사태나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가 출렁대는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분별해야 한다. 민심이 어쩌고 하면서 덩달아서 부화뇌동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린 다만 죄를 인정하고 이를 부끄러워하며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 회개가 이뤄져야 한다.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는 교회가 그 수치심을 느낄 때 자성할 수 있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엡 5:11-12).” 하여 오늘 우리에게 보이신다.
“인자야 너는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겔 43:10).”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남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 이럴수록 입을 다물고 자신의 주장으로 자신을 겨냥하여 회개가 나와야 한다. 자숙이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들이다. 소위 이 시대의 어른들이다. 주님이 이르셨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남을 탓하기보다 나를 돌아보아 회개해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삿 20:48).” 결국 이렇듯 비극적인 현실을 맞이해야 할 것인지…?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시 55:1, 4).
결국 우리가 서로 괴롭히는 것으로,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12-13).
결국 이 모든 일을 통하여,
옛부터 계시는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들을 낮추시리이다 (셀라)
그들은 변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이다
(21).
그러므로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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