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전봉석 2025. 3. 10. 05:12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삿 21:1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시 56:8-9

 

 

즉흥적이고 일시적인 감정으로 이 사달이 났다. 레위인의 부도덕한 삶이 첩을 두게 하였고, 그 첩의 음행으로 저를 데려오다 베냐민 지파의 땅에서 그 여인이 유린당해 죽었다. 이러한 분을 못 이겨 사체를 열두 조각을 내어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보냈고 이를 받아든 저들이 분개하여 같은 족속 베냐민을 진멸하였다. 이후 저들은 울면서 자신들의 감정이 격하여 벌인 일에 대해 후회한다. 더욱이 이를 복원하는 데 있어,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1).” 하여 한 족속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서로 같은 민족이나 ‘베냐민 지파와의 싸움’에 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혈기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맹세하였던 두 가지가 문제였다. 첫째는 자기 딸들을 베냐민 자손에게는 아내로 주지 않겠다는 것과, 둘째는 온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미스바 총회에 참석치 아니한 자들을 나중에라도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 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냐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5).”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맹세한 두 가지 사실을 놓고 이를 이행치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슬퍼하다 하나님을 원망한다.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하더니(3).” 우린 늘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한다. 탓할 상대를 찾아 저를 겨누어 자신의 과오를 뒤집어씌운다. 스스로 돌아볼 때 어이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느낄 때는 더러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서다.

 

결국 저들이 선택한 것은 또 다른 족속을 살상하는 것(8-12)과 그들 가운데 있는 처녀들을 납치하는 것(13-25)으로 이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 어쩜 이렇게 악할 수 있을까? 싶으나 인류의 역사는 그렇듯 흘러 오늘에 이르렀다. 더욱이 자국 내의 내전은 외세의 침입을 몰아내는 일보다 잔인하고 끔찍하다. 이를 우리나라도 수차례나 겪었고 오늘에도 여전한 것 같다. 성경은 그 원인을 규명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5).”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살지 않을 때 사람은 존귀하나 짐승과 다를 게 없다. 오늘 본문의 사태나 이를 수습하는 일에서도 그렇고 우리 사회의 분열과 그에 따른 서로의 증오도 그러하다. 이는 ‘왕이 없으므로’ 그러한데, 우리 영혼의 통치자를 거부할 때 그 삶은 여전할 뿐이다. 일련의 상황과 사태를 보면서 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내용과 같이 현실로 보는 사실에서도 다를 게 없다. 이를 깨달을 때 우린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스스로 자신에게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면 자기 안의 온갖 말(言)들이 아우성친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 때,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때, 우리의 기도와 말씀 묵상은 스스로에게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다. 선포하지 않으면 설득 당한다. 눈 뜨기 무섭게 여러 염려와 근심, 불안과 불평이 악취처럼 들고 일어난다. 결국은 내 안에 모시고 사는 왕이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이 말씀을 사사기의 결론과 비교하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이는 같은 의미를 가진다. 곧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마주할 때 이를 감정적으로 처리하거나 즉흥적으로 대처하면 그 결과는 오늘 본문과 같이 끔찍하다. 결국은 또 길르앗의 야베스를 죽여야 하고 무고한 여인들을 잡아와야 한다. 죄를 죄로 덮는 꼴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 해결도 그와 다르지 않다. 결국은 이에 화 있을진저,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 5:18).” 어쩌면 오늘의 이 사태도 작은 거짓말에서 시작되었다. 불법을 감추려고 불법을 끌어다덮는 형국이다. 그 결국이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는 역사를 안고 살면서도 여전히 서로가 서로를 저주하며 아우성이다.

 

그런 가운데 베냐민 지파의 용사 600명이 림몬 바위에 숨어서 살았다. “베냐민 사람 육백 명이 돌이켜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에서 넉 달 동안을 지냈더라(20:47).” 저들에게 아내를 마련해 주어 기업을 보존케 하려, 이스라엘은 자구책으로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야베스 길르앗을 친다. 거기서 처녀 400인을 얻는다(21:1-12). 그리고도 모자라 처녀 200인을 구하려고 실로의 포도추수 축제 때 처녀를 납치한다(13-24). 이 얼마나 끔찍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요즘은 자주 생각하게 되는 게, 어른이 없다. 이와 같은 문제를 문제라고 나무라고 꾸짖을 수 있는 스승이 없다.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삿 2:7).” 즉 하나님을 체험하고 함께 행하는 삶이 점점 희귀해진다. 교회도 양극화로 갈려서 젊은이들이 사라지고 노인들만 남는가 하면, 청년들이 가득한 곳에는 뭐라 나무라줄 어른이 없다. 소위 ‘꼰대’가 사라지면서 오늘의 비극은 여실히 드러난다.

 

남은 것은 감정뿐이다. 즉흥적인 결정으로 좋으면 같이 산다. 그것도 필요에 따라 동거하다 아니면 갈라선다. 사랑이 좋다는 감정으로 전락하였다. 사람이 사람을 서로 그리 여겨,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 49:20).

 

아니 그러한가? “함부로 이 물건은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덫이 되느니라(잠 20:25).” 이보다 사람이 사람을 그리 여기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보다 애완동물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그보다 자신을 충족시키는 물건을 탐하기 시작하였다. 가상현실에서 혼자 게임을 하거나 온갖 주장에 시달리듯 감언이설에 종잡을 수가 없다.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4).”

 

결국 우리 안에 왕이 없어서이다. 하나님 모시기를 그 마음이 싫어하면서 자신이 거둔 성공으로 자신이 존귀함을 잃어 짐승이 된다. 우리가 말씀을 버릴 때, 곧 자신에게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면 결국은 자신의 감정과 판단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그리하여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삼상 15:26).”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19).”

 

우리 안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고 고통이다. 그렇게 각각 자기 소견에 따라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사는 것이고, 그렇게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벌여 이 지경에 이른 것이고, 이를 수습한답시고 길르앗 야베스를 치는 과정이나 처녀를 잡아오고, 실로에서 처녀들을 납치하여 궁여지책으로 연명하는 이와 같은 형국이 참으로 비극적이다. 우리 삶의 실상은 그러해서 스스로 곤경에 빠뜨린다. 하여 사무엘은 왕에게 고하였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이에 성경은 이르시되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1:19-20).” 그러니 별 수 없다. 산다고 사느라, 자기 멋대로 살아보고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데야 어쩌겠나? 누가 말한들! 요즘은 누구도 선뜻 가르치지 못한다. 예전에 아이들과 수업하면서 아이들의 글을 읽고 뭐라 나무라거나 권면하던 일은 이제 낭만이 되었다. 요즘은 하다못해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다 아이에게 말이라도 걸라치면 아내가 화들짝 놀라면서 말린다. 엘리베이터에서 등에 업힌 아이를 보고 눈을 마주치다가도 핀잔을 듣는다. 서로가 무서운 세상이다.

 

왕이 없는 삶, 하나님을 떠난 자의 삶이란 이와 같아서 꼬리를 무는 죄의 악순환과 혼돈뿐이다. 그러다 이 악순환을 벗어나려 서로 찾는 것이 누구의 강연이나 저들의 성공담은 지극히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권면으로 우리 삶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진정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그 속의 왕으로 모실 마음은 없다. 하나님을 믿되 마치 낙하산 같이, 혹시 모를 상황에 필요한 그 정도의 위로이면 족하다. 하나님이 내 삶에 관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를 주께 맡기거나 주가 나를 인도하심이란, CCM으로 흥얼거리는 정도로 나의 감정 저 안쪽에 두면 족하다.

 

그나마 림몬 바위에 숨은 600명의 베냐민 족속이 살아서 다행인가? 그나마 길르앗의 야베스가 가담하지 않은 이유로 저들을 치고, 처녀 400을 얻은 게 어딘가? 또한 실로에서 축제 때 처녀를 훔쳐올 수 있어서 괜찮은지? 하나의 범죄로 여러 개의 범죄가 필요하게 되었다. 오늘의 계엄이 그와 같은 논리로 합당하였다는 소리 같은데…. 베냐민 지파는 스스로의 자존심과 완악함 때문에 비참한 곤경에 처했다.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잠시 그에 따른 혈기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은 채 한 지파를 멸절시키는 맹세를 하였다. 그야말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죄악이 죄악을 낳고 덮고, 더하고 보탠다.

 

좋을 대로 맹세하고, 베냐민을 친 것도 모자라 야베스 길르앗 거민을 무참히 도륙하였다. 베냐민을 위한 것이라며 실로의 처녀들을 납치한다. 이처럼 자신들의 죄책을 합리화하려 다른 죄악을 끌어다 죄를 범한다.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당면한 문제를 주께 맡길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또 다른 죄악을 범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당시의 대제사장 비느하스는 침묵하였다!

 

오늘 이 상황과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무서운 교훈은 우리의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이 얼마나 무서운 맹점을 가지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각자 저마다의 이유는 나름 합당하였다. 우리의 이성과 나름의 논리라는 게 얼마나 비극적인지, 우리가 살면서 뼈저리게 당하면서도 얼마나 더 끔찍한 현실로까지 치달아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더욱 말씀으로 엎드리게 된다. 나의 판단과 기준을 주께 내려놓게 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주를 섬기고 따르려면 내가 취하고 바라던 것을 포기해야 한다. 엄연히 이는 포기가 아니라 본래 쥐고 고집 부리던 것을 놓는 일이다. 내게 있는 어느 것도 본래 내 것은 없었다. 내 수고와 노력으로 얻은 줄 아는 것도 그리 여겨주시는 주의 은총으로 가능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르길,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과연 오늘 나는 그러한지? 세상이 아무리 요지경이라 해도 세상은 세상이어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임을,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5-16).” 하물며 뒤늦은 후회라도 은혜 가운데 돌이킬 수 있던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7).” 부디 나의 남은 날들이 주 안에서 온전하기를, 이를 위하여 말씀으로 떠나지 않게 하시기를.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 56:1, 3).

 

하여,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8-9).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0-11, 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