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전봉석 2025. 3. 23. 04:21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하시니라

삼상 9:17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시 69:1-2

 

 

하나님은 우연을 동원하실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는 이를 먼저 알게 하신다. 우연이 덮여 작은 것인 줄 알았는데 큰 것으로 세우신다. 오늘 본문의 첫 어절이 “베냐민 지파에” 하는 것이다. 베냐민 지파는 12지파 중 하나로 야곱의 막내 아들이었다. 또한 베냐민 지파는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 사이의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았다.

 

사사 시대 말기, 레위인의 첩을 윤간하여 죽게 한 사건으로 말미암아(삿 19:22-30), 다른 지파의 징계를 받아 그 지파의 상당수가 죽었다. 그때 베냐민 지파 가운데 살아남은 남자의 수는 불과 600명밖에 되지 않았다. “베냐민 사람 육백 명이 돌이켜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에서 넉 달 동안을 지냈더라(20:47). 이후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가장 미약한 지파가 되었다.

 

이를 알리심으로, 바로 베냐민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택하셨다. 이스라엘 초대 왕이 수행해야 할 선결 과제는 각 지파의 결속과 단결이었다. 이 일을 이스라엘의 막내 지파가 하게 되었다. 그것도 가장 작고 미약한 지파로 말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더러 우리는 당장의 판단으로 크고 강하고 높은 것을 선호하겠으나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다른 데 있으시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마 11:8-9).” 곧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이 주의 쓰임에 결격사유가 될 수 없다.

 

우린 어떤 것으로도 낙심하지 않음은 주가 이 길을 아신다. 주의 인도하심이 오늘의 나로 이 길을 가게 하심이다. 나의 자격이나 어떤 특별함이 선택의 기준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시 37:5-6).

 

그리하시는 이가 오늘의 나로 여기에 두신다. 설령 나의 일이 현재로는 어떠하다 해도 그 또한 주가 정하신 바, 때가 있다. 오늘 본문은 하필 베냐민 지파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로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으러 가는 이야기를 조명한다. 그때만 해도 누가 알았겠나? 자신은 물론 그 가정도 지파도 몰랐을 것이나 하나님은 앞서 주의 사람 사무엘에게는 알리셨다.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하시니라(삼상 9:17).”

 

그러는 동안 사울은 순종하였고, 사환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 그의 말을 따라 사무엘을 찾아갔다. 이는 우리가 살면서 더욱이 그 부모의 말에 순종함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16).” 하여 부모로서는 믿음으로 자녀를 양육하여야 하고, 자녀로서는 부모를 가벼이 여기면 안 되는 것이어서,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 23:22).”

 

고로,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2-3).”

 

오늘 본문의 서두는 이 두 가지, 작고 가장 힘이 없는 지파에서 사소한 일이나 그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모습을 조명함으로 주의 뜻이 머무는 원리를 알게 한다. 당시 사울의 부친 기스는 베냐민 지파가 레위인의 첩을 윤간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다른 지파들로부터 징벌을 당할 때, 그 징벌을 피하여 <림몬 바위>로 도망하였던 600명의 베냐민 사람 중의 한 사람이거나 혹은 그의 후손이었다. 그 이름의 뜻도 ‘유력한 사람’이다.

 

하여 베냐민은 레위인의 첩 윤간 사건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삿 19:16-20:48). 이후 나뉘어 차지하게 되었을 600명은 부유했을 것이다. 베냐민 지파의 후손 중에 실제 용사가 많았다. “이 모든 백성 중에서 택한 칠백 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자들이더라(20:16).” 오늘 조명되는 기스의 아들 사울도 그 외모가 출중하였다.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삼상 9:2).”

 

사울이라는 이름은 ‘구하여 얻은 자’라는 의미다. 그렇듯 이름이 갖는 의미는 중의적이다. 저를 통하여 백성의 요구에 따라 왕으로 세워질 것을 암시한다. 하여 “준수한 소년이라” 하심은 ‘잘 생겼더라’ 하는 의미보다 사울의 풍채가 뛰어남을 말해준다. 그리고 여기에 맞지 않게 ‘소년’이라 하심은 ‘미성숙한 남자 아이’가 아닌, 오히려 전투의 능력이 있고, 재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으며, 또한 결혼할 연령의 성숙한 청년을 가리킨다. 사울은 그렇게 이스라엘을 외적의 손에서 구원할 자로 지목되었다.

 

이를 하나님은 앞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알리셨다.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 하셨더니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하시니라(16-17).”

 

그렇게 돼서 사울이 이 일이 있은 직후에 암몬 족속을 맞아 싸움을 했다는 사실이 소개된다.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이튿날 사울이 백성을 삼 대로 나누고 새벽에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11:6, 11).” 이에 어린 소년이 아닌 준비된 자로 “준수한 소년이라” 칭하고 있는 것이다(9:2).

 

또한 저가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의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한 사환을 데리고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9:3).” 하는 것에서, 한 마리의 암나귀라도 찾으려고 이에 순종하는 내용으로 저를 소개하고 있다. 이는 매우 상징적으로도 읽힌다.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겔 34:12).”

 

비록 사울이 훗날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초대 왕으로 기록되나,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그 장면 하나하나에 그리스도의 모형이 그려진다. 우리가 이 복음을 찾아 묵상하여 깨닫게 하시는 바, 말씀을 전달하는 데는 ‘사울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이야기’ 곧 그리스도에 대하여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약 5:20).”

 

하여,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오늘도 우리에게 이 한 날의 수고와 사명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위한 것이 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거나 전달될 성령의 은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리하여 무던하게 우리는 오늘도 맡기신 바, 아주 작은 사소한 일 같으나 이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같은 동선을 따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간다. 사울은 그렇듯 부친 기스의 말에 순종하여 집을 나섰고, 그날에 사무엘을 만날 줄이야. 저도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초대 왕의 지위가 있음을 알기나 하였겠나?

 

우리는 주가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7).”

 

누가 언제 어떤 일에서 주의 소명을 받게 될지, 나의 이 작고 사소한 글쓰기에서 또는 묵상 가운데서 주의 영이 어떻게 함께 하실 줄 알겠나? 하여 지혜자는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에 있느니라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잠 15:30-32).” 그러므로 눈이 밝고 생명의 경계를 듣는 것은 훈계와 견책으로 단련되어 주어진 오늘의 삶에서 나로 주 앞에 서게 한다. 나의 약함과 외로움이 주를 부르게 한다.

 

할 때에 주가 인도하신다. 오늘 사울의 길도 그러하였다. 사환의 말이라 무시하지 않았을 때 그의 권고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숨어 있었다. 이는,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 20:24).” 결국 오늘 우리가 어디를 헤매고 무얼 딛고 섰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으로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일에 대해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모든 고통과 염려까지도 이유 없이 찾아오지 않는다. 고난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확성기로 표현한 루이스의 말처럼, 듣고 돌이켜 알게 하시려고 주가 오늘도 여러 형편과 사정을 내게 두셨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비록 이 일이 사소하다 해도 묵묵히 순종함으로 주가 이루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는다. 세세한 부분까지 일일이 가르치신다. 오늘 본문, “사울이 오기 전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되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 하셨더니(15-16). 이와 같이 주님은 다 계획이 있으시다.

 

할 때,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그러므로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 3:5-6, 7).”

 

보면 늘 섣부르다. 덩달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려 든다. 어느 쪽이든지 상대를 욕하게 된다. 그것이 옳지 않다. 사울을 세우시는 이도, 사울을 내려오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안다. 오늘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주의 뜻을 구하고 그 훈계와 권면을 들어야 한다. 오늘 우리 사회에 어느 쪽이 그래서 나은가? 잘한 게 있나?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에 급급하여 정작 자신들의 허물을 망각하고 스스로는 옳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괴물들 같다. 부디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9).”

 

“내가…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하심으로 주가 다 하실 것을, 결국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는 배후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있다. 오늘 이 모든 현실 속에서도 다르지 않다. 주가 이루실 주의 뜻이 있으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하고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에 우리는 귀를 기울이고 눈을 열어 보아야 한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시 107:28-29).

 

하심을, 그리하여 오늘도 구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69:1-2).

 

하여, 고백한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5).

 

이 가운데 나를 돌아보아 주 앞에서 온전하기를,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6).

 

하여 언행을 삼가 조심하며,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에게 가까이하사 구원하시며

내 원수로 말미암아 나를 속량하소서

(17-18).

 

그러므로 오늘도 주 앞에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30-31).

 

고로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3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