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전봉석 2025. 3. 24. 04:42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삼상 10:6-7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 70:4

 

 

우리의 직분과 사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도하신다. 소명에 따라 누구는 순순히 주를 따르고 누구는 강권하여 이끄심으로 끌린다. 그렇게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직분과 사명을 주었다. 기름을 붓는 것은 그에게 사명과 권위를 부여하는 일이다.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삼상 10:1).” 아울러 기름 부음의 의식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성별하는 자로 세우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시는 일이다.

 

이는,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오늘 우리가 각자 사명에 따른 직분이 부여되기까지,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삼상 10:5).” 곧 하나님의 소명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여기서는 산은 ‘하나님의 기브아’를 뜻하며, 사울의 고향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를 가리킨다.

 

곧 우리가 있는 곳, 그 처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로, 이 산은 “하나님의 산”이다. 일단의 ‘선지자의 무리가’ 곧 ‘훈련하는 성도들’이 모이는 곳으로 신령한 시와 찬미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중에 우리의 마음은 차분하게 되고, 음조에 맞춰 예언적인 노래를 하게 되며, 하나님의 영감을 더 받기 위한 열망이 가득하게 된다.

 

우리가 직분을 받아 이에 순종할 때 이를 헛되이 여기지 않음으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하는 고백으로 오늘의 이 모든 상황과 처한 것으로 주를 찬양하게 된다. 그리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 9:11).”

 

전적으로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에 따른 것이다. 오늘의 나를 두고 생각할 때에 내가 어쩌다(?) 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를 돌아볼 때 모든 게 다 주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때마다 내 곁으로는 주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나와 동행하였다. 이것이 남다른 체험일지 저마다의 고백일지 알 수 없으나, 아주 어릴 적 내 기억이 닿는 처음 지점에서부터 어린 눈에 비치는 기이한 일들이 이제는 선명하게 파악이 된다. 공든 탑이 무너지듯 천호동 일대가 아버지가 일생을 일궈 일가를 이룬 공장과 집이 삽시간에 홍수로 쓸려가는 것을 나는 조모의 등에 업혀 천호대교 위에서 보았다.

 

이후 부친을 향한 하나님의 강권하심을 나는 다 알지 못하지만 나의 어린 유년시절 그 가난하였던 아버지의 목회 현장에서 자랐다. 그렇듯 초등학교를 서너 차례 전학을 하였고, 나환자촌의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소경 무리의 장로님들과 어울렸던 반년 남짓한 시간은 일생에 귀한 은혜이다. 돌이켜보면 우연이랄 수 없는데, 병원에서 돌아왔을 때 우리 집 자체가 나환자촌에 있는 교회였고, 생에 처음으로 교회 사택이 있고 채마밭이 있던 언덕 위의 집이었다. 중학교 입학을 일 년 늦추고 집에서 가료 중이던 시절에 만난 또래 소녀와의 이야기는 나의 사춘기 시절을 송두리째 지배 한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의 사울도 왕의 직분을 받기에 앞서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5).” 그와 같은 만남으로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6).” 하심을 나의 일생에서 들춰보면 그러한 단편들이 엮여진다. ‘하나님의 산’에서 ‘예언하며 내려오는’ 무리는 나의 생에서도 그렇듯 마주하였던 상황과 사람과 그들 사이에서의 ‘예언은 여호와의 영광을 찬앙하는 노래’였다.

 

어린 내가 그때는 몰랐을 테고, 붉은 탁류로 모든 게 쓸려갈 때 우리의 수고가 한 생에 있어 부질없음을 보았고, 나환자로 정착촌에 사는 이들이 소경들이면서도 성경을 암송하는 것에서 ‘예언하는 것’ 곧 말씀을 되뇌고 전파하는 일을 은연중에 배웠을 것이다. 이는 황홀경이나 무아지경의 상태가 아니라, 자신들의 상황에서 맡기신 바 그 직분과 사명에 충성하는 것이었음을 확신한다. 그때에 나에게도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어린 시절 혹은 사는 동안에는 몰랐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하시는 말씀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이었다(6).

 

더러는 더디고 오래되어 막연한 것 같아도 분명히 내 안에는 주의 영이 함께 하셨다. 일례로 나환자촌에서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며 놀던 철없는 시절인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 예닐곱 명이 중학교 때 세례를 받으면서 그렇듯 뜨겁게 눈물을 흘리며 우리가 죄인인 것을 고하며 용서와 자비를 구하였던 기억은 생생하다. 실제 얼마나 통회하며 울었는지 마룻바닥에 앉아 같이 예배드리던 성도들 모두 눈물을 흘렸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연락이 닿고 살았던 네다섯 명이 선교사가 되고 사모가 되고 목사가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일깨워 우리로 누구인가? 알게 하시는 데는 각자의 기이한 현상이 무의식 가운데서도 활동한다.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하심을 우린 우리 임의로 그리 여겨 가능한 게 아니다. 그렇듯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오늘의 이 모든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 현실적으로는 이런저런 어려움이 우릴 어렵게 하나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일이었으니, 오늘 본문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6).” 하실 때에 “크게 임하리니” 곧 하나님의 영이 나의 수면 위로 운행하심인데,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본디 나의 속성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과 같이 그 “땅의” 형질이나, “하나님의 영”이 내 위에 “수면 위에” 임하심으로 “운행하시니라.”

 

곧 나의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삶이었다. 설마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면 어떠한가 하면,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삼상 16:14).” 아, 이 끔찍하고 지겨운, 나의 성질이 악령의 그것과 같음을 인정한다. 곧 이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인정하셨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 뿐 아니라, 이를 통하여 나타내시고자 하는 ‘특별한 은사’인 것이 분명하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6-17).” 그러므로 오늘 내 안의 나의 옛 이야기가 사사로이 그러했던 남다른 경험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나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증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18).” 하는 말씀으로도 장래의 일을 확신하게 된다.

 

오늘 본문은 사울에게 있어 ‘이 예언은’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했음을 확증해 주는 외적 증표였고, 그 자신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기름부음 받았음을 확증해 주는 내적 증표였다. 하여 ‘저는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곧 우리가 중생함으로 성화가 이루어지는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을 깨닫게 된다. 이에 우리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삼상 10:7).”

 

하는 이 확신을 믿음으로 붙들고 가는 길이다. ‘이 징조’는 ‘손이 발견하는 것을 너를 위하여 행하라’ 하심과 같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음을 나는 이제 ‘손으로 생각한다.’ 이처럼 묵상을 손으로 쓴다. 나의 아흔 넘은 장모는 토요일 오후 내내 불편한 몸을 비틀고 화장대에 앉아 어제 주일 날 대표기도를 썼다. 그렇듯 나는 나의 묵상글을 읽으며 성경을 다시 붓펜을 들고 손으로 쓴다. 누구의 사연을 생각하는 일도, 이를 기도하는 내용도, 누군지 모르는 이의 후원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기도로 쓰는 것도 손으로이다. 나는 ‘손으로 기도한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1-12).”

 

곧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는 일로 ‘손으로’란 행함으로이다. 그 행하는 것,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이에 오늘을 살면서 이런저런 부대끼는 일들로 씨름하다가도, 아! 하나님이 여기까지 나와 함께 하심으로 나를 책임지셨던 여정을 기억하고 묵상함으로 이처럼 기억하고 기록한다.

 

하여, 나이가 들어가면서 늘어가는 염려도 무거워지기 마련인데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눅 12:29).” 하심과 같이 점점 이러한 상황에서는 무뎌진다. 이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그럴 수 있음은 주께 기도하고 아룀으로 간구할 따름이어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주께 맡긴다는 일은 앞서 마주하였을 나의 의인들에게서도 보았다. 누가 말해주길 눈이 희미하게 보일 때는 앞의 사물을 분간하려 더욱 조심스러웠던 것이 아예 시력을 잃고는 고요하여 주만 바라보게 하였다고 했다. 어린 내가 어떻게 성경 66권을 다 외울 수 있었나? 하고 물었을 때 아마도 저는 그리 대답하면서 더는 희미한 것조차 보이는 게 없을 때, 비로소 어떤 작은 희망의 실마리마저 잃었을 때 그것은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소망이 되었다는 것을… 갓 초등학교를 졸업하였던 어린 내게 어떻게 설명하였는지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분명한 것은 ‘혹시나’ 하는 어떤 이생에 대한 기대가 우리로 자꾸 어긋나게 한다. 주만 온전히 바라지 못하게 한다. 곧 저이가 성경 66권을 다 암송하게 된 것은 주께 맡길 때, 두 손을 펴고 아무 것도 쥔 게 없을 때 가능하였다.

 

나의 유년시절에 저들은 그렇듯 사회와 격리되어 정착촌에서 살면서 오로지 하나님으로만 충만할 수 있었던 자신들의 처지와 여건이 오히려 축복이었음을 내게도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우리의 염려를 모두 주께 맡긴다는 것은 이와 같이 체념이 아니라 산 소망으로 새 힘을 준다. 이에 나는 나의 생에 마주하였던 저들을 어느 훗날 천국에서 만났을 때를 생각하곤 한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어려서 미처 다 알지 못해 잊힌 줄 알았던 기억들이 무의식 중에 남아서 오늘을 사는 데 필요한 ‘개체발생’을 이루고 있었다. 이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하여 나는 누구에게 가까운 교회로라도 나가라고 권한다. 믿는 자들과 어울려야 한다고 말한다. 행여 서로의 사정을 알리기 싫어서 그저 친절한 타인으로 지내는 교회 현실은 비극이다. 다들 큰 교회를 선호하여 바글바글 모여드는 것이 위태롭고 안쓰럽다. 적당한 거리에서는 서로의 내밀한 신앙 고백을 나눌 수 없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오늘은 사울이 왕이 되기에 앞서 선지자의 무리를 만나고,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삼상 10:6).” 하시는 데서 나의 일생에 내가 잊고 사는 동안에도 나와 함께 하였던 성도들을 떠올렸다. 고로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7).” 이와 같이 임함도, 기회도 모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었으니,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70:4).

 

비록,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