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전봉석 2025. 3. 25. 04:39

 

야베스 사람들이 이에 이르되 우리가 내일 너희에게 나아가리니 너희 생각에 좋을 대로 우리에게 다 행하라 하니라

삼상 11:10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시 71:20-21

 

 

악은 부지런하다. 참 열심히 산다. 암몬이 이번에는 야베스를 침략했다.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에 맞서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들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하니(1).” 암몬 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딸 사이에서 부정한 관계로 태어난 자식의 후예이다(창 19:30-38).

 

이 족속은 그 후 요단 강 동쪽, 사해 북동쪽을 차지하고 얍복강 언덕의 랍바를 자신들의 수도로 삼았다(신 3:11). 암몬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잘 조직된 왕국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하나님은 암몬의 땅은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그들이 롯의 후손들이기 때문이다(2:19). 이들은 이스라엘을 계속적으로 괴롭혔다(삿 10:9). 그러다 다윗에 의해 정복되고 말았다(삼하 12:30). 한편 오늘 등장하는 ‘나하스’는 ‘뱀’이란 뜻으로 ‘웅장하다’는 의미이다.

 

길르앗 야베스는 ‘길르앗의 메마른 땅’이란 뜻이다. 이곳은 갈릴리 호수에서 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요단강의 동쪽 지점이다. 가나안을 분배할 때 므낫세 반 지파의 영토였다(수 21:6-15). 그런데 사사 시대에 이곳 주민들이 베냐민 지파의 징벌에 참여치 않았고, 그 대가로 베냐민의 남은 장정들을 위해 처녀들을 강제로 제공해야 했다(삿 21:6-15).

 

당시 암몬 족속의 수도 ‘랍바’는 북쪽으로 약 50km 진군하여 ‘길르앗 야베스’의 맞은편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들이 이같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이유는 사사시대 이래 그 지역을 자신들의 합법적인 영토로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11:13). 당시 이스라엘을 공격하였으나 사사 입다의 활약으로 완전히 패퇴당하였다(11:32-33). 그로부터 1세기 가량이 지난 오늘, 암몬은 다시 침공을 시도한 것이다.

 

이에 사울이 듣고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다.’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삼상 11:6).” 곧 사울이 하나님의 장중에 잡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능력의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의 마음에 ‘노가 크게 일어나서’ 곧 사사로운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는 ‘거룩한 의분’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킨다.

 

악이 뿌려지면 악이 거둬진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그러므로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7-18).” 결국 우리는 그 열매로 알 수 있는데,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19).”

 

이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우리가 무엇으로 심는가, 하는 데서 그 거두는 열매가 다르다. 우리의 악은 잠시 가려져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는다. 암몬의 이스라엘 공격은 늘 있던 일이다. 잠시 사라진 듯 떠나 있으나 곧 다시 우리를 공격하는 게 사악이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눅 4:13).” 이를 가늠하는 것은 그 중심에 있다. 그러므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다급하게 전화를 했다. 4, 5번 경추 목 디스크가 터져 한쪽 팔을 잘 못 쓰고, 딸애는 여전히 선택적인 난독을 보이며 자신은 물론 그 부모의 마음을 힘들게 하였다. 저가 기도를 부탁하여 이런저런 상황을 이야기하는데, 그런 가운데 온전히 주를 바라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타나는 현상만으로는 뭐라 할 수 없으나 스스로의 거룩과 노력이 행여 저들로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듣기만 했다.

 

오늘 야베스에 대한 공격은 의미가 있다. 하필 길르앗 야베스일까, 하는 생각을 하다 저들은 우선 요단 저편 동쪽에서 멈추었다. 당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의 입성을 앞두고 저들은 그 땅을 요구하였고, 정복 전쟁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그리 정하여졌다. 상대적으로 오늘에는 다른 지파의 도움을 받기가 용이하지 못하다. 또한 암몬과 가까워서 이런저런 영향권 아래 있던 것도 문제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 대하여 베드로의 평가는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곧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7-8).” 롯을 의로운 사람으로 두는 것으로 그리 이해할 수 있지, 정작 롯은 죄악의 도성 ‘소돔과 고모라’와 지척으로 지내다, 그 속에 흡수된 꼴이다. 이에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저가 그 고통을 당하였다고 설명한다.

 

오늘의 야베스의 경우도 함께 하여야 했을 무리에서 동떨어져 요단 저편에 남았고, 그 지척으로 암몬 족속이 있었으니 그 상황도 그럴만하다. 곧 우리가 교회를 멀리하고 믿는 자들과의 교제가 없을 때 영적으로 이러한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사사 입다 때에도 “그 때에 암몬 자손이 모여서 길르앗에 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도 모여서 미스바에 진을 치고 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하랴 그가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니라(삿 10:17-18).”

 

수시로 괴로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

 

스스로 악에 물들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사는 일보다 아둔한 일은 없다. 이는 결국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이를 피함으로 동시에 ‘소돔’이나 ‘암몬’과 가까워서 물들거나 저들의 괴롭힘을 당하는 일은 당연하다. 곧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은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그럼에도 여전히 돈에 멍에를 메고 사는 일이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그 관계를 우선하여 사는 일에 메여 끌려다니는 성도들도 허다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하나 주일에 이런저런 일에 예배를 빠지거나 뒤로 미루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결국 여호수아는 답답하여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어쩔 것인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오늘 야베스의 이러한 처지는 자처한 일이나 같다. 하나님 외에 우리의 평안을 보장하지 않는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완곡하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우리의 교만이 우리로 괴로움을 겪게 한다. 오늘 본문은 야베스의 남다른 선택과 그에 따른 괴로움을 보게 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이는 성경의 기본 입장이다. 교만이란 별 게 아니다. 자신에 대해 자신하는 것, 그것을 발단으로 자기고집을 꺾지 않는 것,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의 자유의지를 관철하려는 것, 물론 각자 선택의 문제이겠으나….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21-22).”

 

결국 우리의 거룩은 우리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거룩하신 이,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의로 덧입음이다. 그렇지 못한 모든 경우, “나는 네 무리가 용사 곧 모든 나라의 무서운 자들의 칼에 엎드러지게 할 것임이여 그들이 애굽의 교만을 폐하며 그 모든 무리를 멸하리로다(겔 32:12).” 종당에 하나님은 교만을 꺾으신다. 우리 안에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징계하신다.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 모압이 거름물 속에서 초개가 밟힘 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 그가 헤엄치는 자가 헤엄치려고 손을 폄 같이 그 속에서 그의 손을 펼 것이나 여호와께서 그의 교만으로 인하여 그 손이 능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누르실 것이라(사 25:9-11).”

 

주를 바람으로 주를 의뢰하는 일이란, 재촉하거나 조급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하여 사는 것.’ 오늘 이 야베스의 경우는 야베스의 위치나 나름의 선택의 결과이다. 그런 가운데 신앙의 기본자세로 기다림을 구사한다. “야베스 장로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에게 이레 동안 말미를 주어 우리가 이스라엘 온 지역에 전령들을 보내게 하라 만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네게 나아가리라 하니라(삼상 11:3).” 곧 우리를 구원할 자를 기다리는 것,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반드시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을 사울로 확신하게 하시는 것도 다 하나님의 계획에 속하였다.

 

“한 겨리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어 이르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11:7).”

 

결국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10:7).”

 

오늘을 살면서 우리에게 보이시는 징조를 분별하고, 이에 ‘기회를 따라 행하라.’ 곧 그때에 주의 영이 함께 하실 것이다. 성령으로가 아니면 우리가 주께 맡길 수도 없고 기다릴 수도 없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미 3:8).” 주가 행하심이다. 일련의 사태로 마음은 조급해지고, 기다릴 수 없어 여러 방도를 모색할 때 엇나가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다니엘과 같이 ‘뜻을 정해야 한다(단 1:8).’ 나는 이 지경의 상태에 어찌할 것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하여 오늘도 시편으로 사고하고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시 71:1-2).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 앞에 내어놓을 때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

(3).

 

그러므로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5-6).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17-18).

 

하여,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