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삼하 1:26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시 92:15
결국 사울이 죽었다. 스스로 그 위를 지키려 했던가? 다윗을 그토록 시기하던 이가 결국 죽음을 맞았다. ‘사울이 죽은 후라.’ 다음 편으로 이어지는 문장으로는 슬픈 생각이 든다. 다 정한 때가 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다들 아등바등 사느라 사는 일에 급급하다. 그러나 모든 결과는 정해져서,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그러해서 누구는 더 기를 쓰고 사는 데 전념하고 누구는 이 생을 통하여 더 나은 소망을 가진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40).” 이를 붙들고 살 것인지 저를 붙들고 살 것인지, 저마다의 선택이겠다.
‘사울의 죽은 후라.’
다윗이 아말렉족을 치고 시글락으로 돌아왔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살아야 한다. 시글락을 침입하여 다윗의 백성을 약탈하였던 아말렉족을 추격하여 격파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돌아온 때였다. 시글락은 브엘세바 북서쪽 19.2km 지점에 위치한다. 시므온 지파에게 배당된 것이나 사울 때에는 블레셋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블레셋 가드의 왕 아기스에 의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쫓기다 죽임을 당할 때에 다윗은 아말렉족을 쫓아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여 돌아왔다.
그리고 ‘제 삼 일에’ 한 사람이 다윗에게로 왔다. 그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묻어있었다. 당시 근동 지방에서 사람들은 자기의 극한 슬픔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이와 같이 표현하였다. 그중에 옷을 찢는 행위는 ‘극도의 고통’이나 ‘번뇌’를 표현한다. 그렇게 금식하고 굵은 베옷을 입는다. 허리에 굵은베를 띠는 것까지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사람의 행위는 다음에 이어지는 위증으로 볼 때 이 모양이 꾸민 것이라 짐작이 된다.
본래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인산인해를 이루는 초상이 정작 정승이 죽으면 썰렁하다’는 말처럼 얼마 전까지 사울의 휘하에서 충성을 다하던 자가 사울이 죽자 얼른 다윗에게로 붙으려는 얕은 간특함을 엿볼 수 있다. 그러니 한 사람의 생이란 게 얼마나 가벼운가?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잠 1:19).” 하여 성경은 일갈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
당장은 뭐에 홀린 듯 기를 쓰고 목숨까지도 다 할 것 같으나 이내 그 또한 부질 없는 것을,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도 서로가 원수처럼 보다 언제 또 동지로 붙었다 싶은 게, 곧 대선을 앞두고 부화뇌동하는 꼴들이 가관이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그 속셈이 빤히 보이는데 저들은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다. 마치 큰 바위에 가려진 듯 자기 눈에만 안 보이는 것인지, 그리 여겨지는 것인지.
상대적으로 다윗의 온유함이 돋보인다. 다들 사울의 죽음에 안도하고 기뻐하였을 텐데, 다윗은 이를 슬퍼하며 원통히 여긴다. 엄연히 다윗은 사울로 인하여 젊은 시절을 광야에서 쫓기며 숨어 살아야 했다. 생명의 위기도 여러 번 겪었다. 그럼 원수 중의 원수라 할 수 있는 사울의 죽음이 기뻐야 할 텐데,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삼하 1:11-12).”
이 심정을 알 리 없는 아말렉 소년은 거짓으로 고한다. 성경은 앞서 사울이 그 무기 든 자와 함께 스스로 칼 위에 엎드러져 죽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데 오늘 아말렉 소년의 거짓말은 우리의 속내가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을 주목하게 한다. 순간 저마다 거짓을 꾸민다. 사실 이스라엘군이 블레셋군을 피해 길보아 산으로 도망친 이유도 저들이 병거를 타고서 추격해 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삼상 31:1).” 그러자 블레셋군은 병거나 기병 대신 활 쏘는 자들을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추격하였다(3).
그런 가운데 아말렉 소년의 거짓말은 오늘도 우리 현실에서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고 거짓으로 자신을 덮으려는 자들을 눈여겨보게 한다. 이에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사 5:18-19).” 그래서 자가당착(自家撞着)이라 하던가? 자기 말에 자기가 속는 격이다.
어떤 이는 법관씩이나 하고, 저마다 좋은 대학에서 나름은 이상과 꿈을 가지고 살았을 터인데, 어쩌다 거짓으로 거짓을 더해 한 올 한 올이 뭉치가 되어 수레를 끌 정도로 단단하여진 것일까? 누구는 한때 종군기자로 일하며 그 모습이 사뭇 인상적이었데 전혀 다른 인물이 되었다. 누군 민주화운동 때 모진 고문도 견뎌가며 나름은 이상을 실천하였던 이인데 지금은 극우 가운데서도 극우의 한 사람으로 이번 대선에도 출마를 한다고 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 23:25-26).”
오늘 이 아말렉 소년의 짧은 등장이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저의 거짓말과 그의 속셈이 오늘 우리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엡 5:6-7).” 한데 우리는 마치 쓸려 다니는 안개 같이 이쪽으로 기울었다가 저쪽으로 이끌리기를 반복하는 듯하다. 부디,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우리의 가는 길에 징검다리가 되어주는 것 같다. 거짓은 결국 거짓으로 드러나서 거짓으로 망한다. 본래 ‘한 가지 거짓을 덮으려면 일곱 가지 거짓이 필요하다.’ 아무리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지만 ‘거짓말이 꽃은 피울 수 있겠으나 열매는 거두지 못한다.’ 더욱이 우리나라 보수라는 세력의 한계가 이번 사태로도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다. 앞서 군사정권 때도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철옹성 같더니 그들의 최후는 비극적이었다. 몇 년 전에 이어 이번에도 탄핵을 당하는 대통령을 배출하고도 여전한 작태는 ‘있는 것들의 한계’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이쪽은 좀 나은가? 마치 다들 어디 숨어 있다 슬그머니 기어 나오는 뭐 같이 나름의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으려는지 이런저런 주장과 함께 출마선언을 하는 꼴이라니… 오늘 이 아말렉 소년의 거짓말이 주는 의미가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그러다 결국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잠 19:5).” 그러니 그 또한 보고 배우는 게 많다. 그야말로 우리 존재의 가벼움이 실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사 28:15).”
한 번 살자고 기를 쓰는 인생이면 뭔들 못하겠나? 저들은 그렇다치고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오늘을 보며 나를 또 주의하고 근신하는 게 지혜이겠다. 하여 성경은 엄연히 말씀하셨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4-15).”
여기서 상대적으로 가슴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은 다윗의 슬픈 노래이다.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삼하 1:17).” 다시 생각해도 기뻐해야 할 것 같은데,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여 저들을 조상하고 슬픈 노래를 지었다. 여기서 ‘슬픈 노래’는 ‘소리 내어 울다’란 뜻으로 ‘죽은 자를 애도하는 노래’로 비가(悲歌) 또는 조가(弔歌)라 한다. 다윗이 아브넬의 죽음 앞에서도,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이르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3:33-34).”
예레미야가 요시야의 죽음 앞에서도,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모든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대하 35:25).” 우리는 결국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활 노래’를 부른다. 다윗이 ‘애가(哀歌)’의 제목이랄 수 있게 ‘활’이라 명명하는 것은 사울이 죽게 된 이유가 화살을 맞은 때문이다. 또한 다윗을 위기에서 구해 준 것도 요나단의 활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화살이 네 앞쪽에 있다 하거든 네 길을 가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셨음이니라(삼상 20:22).”
더욱이 사울과 요나단이 속한 베냐민 지파는 활 쏘는 자들로 유명했다. “울람의 아들은 다 용감한 장사요 활을 잘 쏘는 자라 아들과 손자가 많아 모두 백오십 명이었더라 베냐민의 자손들은 이러하였더라(대상 8:40).” 특히 시의 표현 가운데 ‘요나단의 활’이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했다.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삼하 1:22).”
여기서 이 내용을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18).” 하는데 ‘야살의 책’이란 ‘의로운 자’란 뜻이다. 곧 ‘의로운 자의 책’으로, 이 책은 이곳 외에도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수 10:13).” 하지만 이 책은 여호수아와 사무엘 이전에 존재하였고,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의 기원이나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이스라엘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나 큰 사건을 노래한 서사시를 수록한 문서였을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우리의 자세를 바로하게 된다. 즉 원수의 불행도 슬픔으로 안타까워하는 인정이 필요하겠다. 이에 예수님은 이르시길,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35-36).” 이는 전적으로 사람에 대한 예의가 그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으로 갖추어지는 것이다.
오늘 다윗도 그러한 이유로 아말렉 소년을 벌하였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다윗이 청년 중 한 사람을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그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삼하 1:14-15).” 우리가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저와 어떤 관계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었다. 늙으신 나의 장모가 기도할 때에 좀 전까지 아내와 다투듯 신경전을 벌이다가도, 나의 이름과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목사님과 사모님’으로 호칭하여 위하여 기도하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또는 미워하는 일에서도 저의 죄와 주의 사랑으로 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이것이 오늘 날 우리 사회가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참 성도라면 가져야 할 기본자세이다. 서로가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대립하는 가운데서도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었다. 하여 우리의 진정한 우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이에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조상(弔喪)하며 애가(哀歌)를 지었다(17-27). 곧 ‘이스라엘의 영광’을 대표하는 ‘사울과 요나단’을 기리며,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니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 같이 됨이로다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21-23).” 그 가운데 요나단에 대한 벅찬 감정은,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26).”
저를 ‘내 형 요나단’이라 하여, 가장 친근한 관계로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하는 표현으로 그 마음을 살피게 한다. 곧 ‘그대는 나에게 심히 기쁨이 되었다.’ 하는 것인데, 생전에 요나단이 다윗에게 베풀었던 은혜가 지극하였음을 노래하는 것이다. 더욱이 요나단은 사울의 왕권이 다윗에게로 넘어가게 된 것도 개의치 않고 그를 자기의 목숨처럼 위하며 사랑했다(삼상 20:12-17). 참으로 이 권력욕이란 게 얼마나 끔찍할 정도로 사람을 망가뜨리는지, 오늘 우리 현실이 증명하듯 보여주는 가운데 요나단의 진정한 우정을 다윗은 표현하기를,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하였다.
기이하다는 것은 경이롭다는 것이다. 물론 불가사의하다는 의미도 있다. 우리가 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을 표현할 때 기이하다는 표현을 자주 쓰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주의 사랑이 그러하셨다.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시 17:7).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알 길이 없는…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39:14).
그렇듯 사람이 사람에게 보인 가장 아름답고 기이한 사랑이 요나단의 우정이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바, 창조주께서 어찌 이 하찮은 피조물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 나를 사랑하시는지,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사 29:14).”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8:6).”
이에,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92:1-3).
오늘의 시편으로 나는 노래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4-5).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8, 13-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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