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전봉석 2025. 4. 16. 04:43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삼하 2:1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시 93:1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는 언제나 분열과 갈등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주의 ‘은혜와 진리’로 산다는 일은 곧 하나님의 주권이 나의 삶을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은혜와 진리는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된 용어이다. 은혜는 ‘헤세드’라 하여 단순히 하나님의 관대함이나 인자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대로 그의 백성이 된다. 이에 따른 보호가 은혜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이와 같은 약속으로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신 5:32-33).”

 

진리는 ‘에메트’라 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지키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식언(食言)치 않으시는 진실하신 분이시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삼상 15:29).” 이를 우리가 인정할 때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은 우리 삶을 다스리신다. 이에 오늘 ‘그 후에’ 일이 전개되는데,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삼하 2:1).”

 

여기서 ‘그 후에’는 앞서 사울의 죽음과 다윗이 헤브론으로 가서 왕이 되는 사이의 시간이 어느 정도 경과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다윗은 사울의 전사 소식을 듣고도 얼마 동안은 블레셋 땅 시글락에 그대로 머물렀다. 그리고 이때에 더욱더 많은 용사들이 다윗에게로 몰려와 그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졌다. “그 때에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대상 12:22).”

 

그러던 중 다윗이 하나님께 물었다. 다윗은 늘 무슨 일에 앞서 하나님께 물어 주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였다.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삼하 5:19).” 오늘도 다윗은 물었다.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그러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하고 말씀하신다(1).

 

이는 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의 자세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아가기를, 그만큼 자기의 앞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다는 증거다. 성경은 그렇게 우리로 기도하라 하신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더욱이 우리는 이제 성경의 시대를 살면서 말씀을 가까이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그러므로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딤후 3:14).” 이에 따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이러한 삶이 복이 있다.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 24:45, 46).” 이에 나는 이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데서 나는 안도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어제는 좀 멀리까지 걸어서 산책을 했다. 아내는 뜬금없이 물었다. 왜 하나님은 다 아시면서 우리에게 ‘이런 일’을 더하실까? 가령 율법도 어차피 지키지 못하여 죄를 범할 것을 아시면서 왜 그것을 지키라고 만드셨을까? 하는 식으로 훗날에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이런저런 이유로 심판을 받아야 할 텐데, 가끔은 그것이 두렵다고 했다. 다소 여러 말과 함께 현실적인 어려움도 예로 들었지만 요지는 그런 거여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부터 설명하였다.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는데, 우리로 하나님과 같은 자로 하나님과 같이 그의 나라를 누리기 원하신다. 당연히 서로가 인격적인 관계로 말이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하나님과 같이 완전한 존재로 뚝딱, 만드시면 우리로서는 인격적인 존재라 할 수 없다. 결국 인격이란 선택의 결과이고, 하여 천사들도 인격적으로 창조하신 바, 무리 중에 하나님을 배신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자 하는 자들이 쫓겨나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이 되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것도 고작 과일나무 하나를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언약의 표징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한다. 이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심을 하나님도 사람도 지켜야 한다.

 

하면서, 나는 아내에게 한 시간 남짓 걸으면서 이와 같은 내용을 설명하였고 오늘 우리가 사는 동안에도 같은 일의 연속인 것을 말하였다. 곧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다윗과 같이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오늘 우리는 그러한가? 물론 자신의 자유의지를 운운하여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 그 또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허용되는 일이다. 즉 가인은 아벨을 죽일 수 있었고, 앞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마음을 다스렸을 수도 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그리 행할 수도 아니 행할 수도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사람에게 부여하신 의지다. 하나 그에 따른 선택의 결과는 우리 자신의 몫이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4:48-51).” 그와 같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저들을 다 진멸할 수도 살려둘 수도 있었다. 물론 이런저런 사정과 이유와 나름의 판단이 따른다.

 

우리가 날마다 기도하기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한다. 곧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 29:11).” 이와 같이 주를 인정하는 것이 모든 믿는 자의 전적인 것이 아니다. 설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고로 우린 저마다 자신의 믿음을 신뢰하지 말 것은 그 또한 율법과 같아서 우리로서는 그 믿음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필요할 뿐이다.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삼하 2:6).”

 

다윗이 유다 성으로 와 헤브론을 차지하였다. 이스라엘에는 여전히 사울 가문을 추종하는 세력이 있었다. “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8-9).” 헤브론은 예루살렘 남서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오래된 성이다.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이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가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을 유다 자손 중에서 분깃으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주었으니 아르바는 아낙의 아버지였더라(수 15:13).”

 

헤브론은 연합과 친교란 의미다. 오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는 다윗에게 헤브론으로 가라 명하신다. 까닭은 유다 지파의 성읍이며, 유다의 중심부에 위치하였고, 다윗이 유다 지파를 거점으로 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삼하 2:4).”

 

헤브론은 여호수아 시대에 갈렙이 차지한 아낙 자손의 요새다(수 15:13-17). 산지가 성읍으로 둘러싸인 요충지다. 헤브론에는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는 유다의 장로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다윗이 시글락에 이르러 전리품을 그의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이르되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삼상 30:26).”

 

다윗은 두 아내 아히노암과 아비가일을 데리고 헤브론으로 갔다. 아히노암은 다윗이 사울의 딸 미갈을 발디에게 빼앗긴 후 새로이 취한 아내이다. 그녀는 다윗에게 한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은 암논이다. 그리고 갈멜사람 아비가일이 두 번째 아내이다. 아들을 낳았는데 길르압이다.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또 자기와 함께 한 추종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다윗이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읍에 살게 하니라(삼하 2-3).” 우리가 주께 기도하여 여쭙고 답을 얻은 후 결행할 때에 주가 함께 하신다.

 

후에 다윗은 시를 지어 노래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시 143:10).

 

이와 같이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가 주께 아뢰고 고하여 주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다. 예수님도 그러하셔서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결국 우리가 차지하는 천국의 정도는 하나님을 인정하여 순종하는 정도와 비례한다. 하나님이 차별하심으로 차등을 두시는 게 아니라, 우리는 각각 저마다의 영광으로 충만하다 그 차이는 분명하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 이를 염두에 두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하는 자와 지극히 수동적으로 긴가민가하며 애매하다 은혜로 가는 나라는 확실히 다르다.

 

오늘 우리가 사는 동안에도 누구는 저쪽 편에서 누구는 이쪽 편에서, 서로는 견주고 다투느라 그 목숨을 다한다. 하물며 그러한데 영생의 삶에서는 어떠하겠나? “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삼하 2:8-9).” 그렇게 이스보셋이 사십 세에 왕이 되어 두 해 동안 왕위에 있었다. 그러는 동안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랐고,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칠 년 육 개월이더라(10).”

 

서로 다른 길을 가는 데는 ‘마하나임’ 곧 두 진영의 두 군대가 있다. 마하나님은 유서 깊은 땅으로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고향 가나안으로 돌아가던 중 천사들을 만났던 곳이다(창 32:1-2). 때문에 야곱은 그곳을 마하나임이라 칭하였는데, 요단 동쪽 갈르엣과 압복강 사이 어디,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경계 쯤 위치했다. 아브넬은 이스보셋은 이 두 지파를 쉽게 통제할 수 있었고, 훗날에 이곳은 또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다윗이 위기에 처했을 때 피신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어쨌든 ‘두 해 동안’ “각기 상대방의 머리를 잡고 칼로 상대방의 옆구리를 찌르매 일제히 쓰러진지라… 그 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16-17).” 각기 선택된 24명의 용사들이 승부를 가리지도 못한 채 모두 죽고, 양측의 군사들이 전면전에 돌입하여, 그 실상은 맹렬하였고, 잔혹하여 전쟁의 참상을 보여준다. 이는 결국 사람들의 일이라, 서로가 주를 인정함으로 하나 되면 좋을 텐데 이는 아무래도 인류가 망하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일인가보다.

 

오늘 아이와 나눌 성경은,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살전 4:13-15).”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이는 ‘죽는 것’에 대한 완곡어법으로 고대 헬라에서도 오늘에도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다. 이교도들은 ‘죽음의 잠’을 ‘영원한 잠’으로 인식한 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깨어날 것’을 믿는다. 또한 여기서 ‘자는 자들’은 죽은 그리스도인들을 일컫는 말로, 데살로니가 교인 중에 죽은 자들을 가리킨다. 곧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앞서 죽은 자들의 장래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

 

이에 바울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하며 저들로 알게 한다. 사실 이러한 어투는 바울 특유의 강조와 경각심을 주기 위한 것이다. 즉 바울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이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갖지 못했음을 알고, “소망 없는 다른 이”들 곧 ‘부활의 믿음을 갖지 못한 비그리스도인들’을 빗대어 말한다. 이교도의 기본의식은 ‘희망은 산 자를 위한 것이며 죽음에는 희망이 없다’고 하였다.

 

우리에게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곧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죽음은 그의 부활이 기적적인 하나님의 역사임을 증명한다. 우리는 부활을 믿는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19-20).”

 

이 땅의 생으로 전부라면 뭐 그리 대단하게 살려 하겠나? 그러나 모두는 다시 살되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곧 육신으로 이 땅에서는 죽었으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곧 예수 재림 때에 함께 올 것이다. 이는 바울의 견해가 아니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하는 것 같이 ‘주의 말씀에 있다.’ 곧 우리가 믿는 성경에 나와 있다.

 

곧 주의 재림 때까지 살아있는 자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 이를 안다. 곧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이는 살면서 사는 동안에 일어나는 일이면서 죽음과 동시에 우리의 부활도, 재림의 때에 우리의 동행도 모두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 4:14).” 주 예수와 함께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앞서고 뒤 따르고 하는 시간차는 별 의미가 없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살전 4:15).” 이를 어찌 설명하기 어려우나 우리가 여기서 사는 시공간의 개념으로는 이해가 어렵다. 다만 바울은 죽은 자들도 살아있는 자들 이상으로 그리스도를 맞이할 영광이 하늘나라에 간직되어 있음을 말한다. 하여 우리 믿는 자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버릴 수 있다. 이상, 나의 이해와 설명은 어눌하나 이를 묵상하는 데 있어 시편으로의 사고가 그래서 더 분명해진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시 93:1-2).

 

이를 알고 인정하는 데서 천국은 실행 중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미,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고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우리가 꿈꾸고 상상하는 그 이상이며 동시에 우리의 사사로운 일상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