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삼하 6:17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시 97:11-12
하나님의 자리, ‘그 준비한 자리’에 주를 모시고 사는 삶이 귀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 몸을 두고 ‘값으로 산 성전’이라 정의하였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하여 우리로 저와 같이 고백하는 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더는 내가 나로 사는 게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니, 나의 삶이 그와 같다면…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시 145:1).
하는 오늘 ‘다윗의 찬송시’로 부활절 새벽에 주 앞에 선다.
다윗은 이스라엘 지파 중에 골고루 뽑은 자들을 데리고 ‘다윗 성’으로 ‘하나님의 궤’를 올려오려 하였다. 당시 법궤가 있던 곳은 바알레유다라, 블레셋 땅에서 가까웠으므로 그들의 기습을 대비해서도 그리하여야 했다. 보기에는 작은 법궤 하나를 운반하는데 3만의 대군을 동원하는 것은 과하다 하겠다. 그러나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는데 있어, 이스라엘 전역에서 모든 백성 가운데서 그 수행자들을 뽑은 것은 법궤에 대한 온 국민적 관심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다.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 신앙의 부흥을 꾀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또한 각 지파간의 유대감을 조성하며, 통일 왕국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함도 있었다.
지난번 다윗의 즉위식 때 35만 명이 모였던 총회에 이어 제 2차 총회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바알레유다’는 ‘숲의 성읍’이란 뜻의 기럇여아림의 옛 명칭이다. 이곳은 본래 기브온 사람들의 도시로 ‘바알라’로 불리던 곳이다. “또 이 산 꼭대기에서부터 넵도아 샘물까지 이르러 에브론 산 성읍들로 나아가고 또 바알라 곧 기럇 여아림으로 접어들며(수 15:9).” 그 후 이곳이 유다 지파의 수중에 들어오고, 그래서 ‘유다의 바알라’ 곧 ‘바알레유다’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욥바로 가는 길목 곧 예루살렘 서쪽 15km 지점에 위치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이제 다윗에 의해 온 이스라엘의 관심이 되었다. 그전까지 이곳에서 70년 이상 방치되듯 주전 1075년부터 1003년까지, 이 기간은 아벡 전투 때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까지의 기간이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삼상 7:1-2).”
이에,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삼하 6:2).”
곧 하나님의 언약궤, 그 위에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그 이름이 불린다. 하나님의 이름은 곧 하나님 자신에 대한 계시(啓示)이다. 그의 능력과 속성에 대한 표현이다. 그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다. 곧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 3:14-15).”
곧 하나님의 이름에는 우리의, ‘나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그의 거룩하신 존재가 내포된다. 곧 ‘하나님의 언약궤 위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재, 그분의 능력, 그분의 성품, 그분의 영광이 임재하였는데 이는 우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오늘은 ‘나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궤 위에 영광스런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이를 하나님의 궤로 ‘주의 권능의 궤’라 한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132:8).
다시 말하면 오늘 본문에서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하실 때, ‘그룹들 사이’ 곧 주의 영광이 좌정하신 곳으로 나의 몸이 주의 성전이 되고, 이로써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하여 그 이름,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나의 하나님’으로 오늘 이곳에, 내 안에 좌정하신 하나님이시다. 곧 오늘을 살면서 주의 ‘언약궤’로써의 나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나’로서의 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존귀함은 주가 내 안에 거하심이다. 이를 여기 다윗은 갈망하였고, 통일왕국을 이룬 후 자신의 다윗 성으로 모시기를 바라였던 것과 같다.
곧 하나님을 모시는 신정왕국으로의 이스라엘로, 진정한 왕으로, ‘하나님의 궤’ 즉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을 하나님의 자리로 모시고자 하는 거였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운반하려 한 것인데, 이는 오직 레위인 중 고핫 자손들만이 법궤를 ‘어깨에 메고’ 운반할 수 있었다.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민 4:15).”
그런데 다윗이 법궤를 수레로 운반하려 한 것은 아마도 사무엘이 죽은 후라, 혼란기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가르침이 온전하지 못하였다. 또한 이러한 방식은 당시 블레셋족이나 페니키아인들이 자신들의 신상(神像)을 운반할 때 수레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아서일 수도 있다. 하여튼 다윗은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뜨거운 열심은 있었으나 그 방식부터가 올바르지 못했다.
하나님의 궤는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다. 블레셋으로부터 돌아온 하나님의 언약궤(삼상 6장)가 다윗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운반되기까지 안치되어 있던 기럇여아림 사람 아비나답의 집이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삼상 7:1-2).”
아비나답의 아들 엘르아살은 이미 70년 전부터 그 집에서 법궤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엘르아살의 아들 즉 아비나답의 손자들인 웃사와 아효가 이 일을 수행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법궤는 웃사와 그의 형제들이 운반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삼하 6:3).” 출발은 순조로웠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5).” 이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러운 모습인가?
그런데 순간적인 일이었다.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6-7).” 순간 이곳은 ‘충돌의 타작 마당’이며 ‘재앙의 타작 마당’이 되었다. 더욱이 나름 법궤가 흔들려서 그랬겠으나, 법궤에 손을 댄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갑자기 소들이 왜 뛰었는지 모르겠다. 무엇에 걸려 미끄러진 것인지, 넘어질 뻔한 것인지, 그리하여 수레가 흔들리고 비틀거리자 웃사는 좋은 의도에서 반사적으로 여호와의 언약궤를 붙든 것 같다.
과거에 블레셋 사람들도 법궤를 수레에 실어 운반하였다. 그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저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했다.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삼상 6:10, 14-15).”
여기서 웃사의 죽음이 선뜻 이해가 안 간다. 웃사가 하나님의 궤에 손을 댄 것은 수레를 끄는 소들이 날뛰고, 수레가 흔들리는 바람에 법궤를 잡으려했던 것인데… 인간적으로 이 상황은 억울한 마음도 든다. 그러나 성경의 윤리와 우리의 도덕적인 기준은 엄연히 다르다. 분명 고핫 자손일지라도 법궤는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민 4:15).” 이는 ‘하나님의 임재’가 이처럼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우리의 호기심으로 이를 들여다보지도 말라고 하셨다.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20).” 이에 법궤를 운반할 때는 그것을 완전히 싸서, 채를 궤의 고리에 꿰어 어깨에 메고 운반하라 하셨다.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출 25:14).”
이와 같이 하나님이 매우 엄하게 법궤의 규례를 말씀하셨는데 순간 웃사가 이를 잊었다. 다윗은 수레로 옮겼다. 그만큼 하나님의 명령을 소홀히 여겼던 것이다. 이를 바울의 표현으로 바꾸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여기서 사랑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의 궤, 주의 임재로 우리가 선이라 여기는 것이 얼마나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상기시킨다. 하여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궁극적으로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사랑이 없으면 그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처럼 시끄러울 뿐이다.
우리가 주를 경외함이란 주로 인하여 기뻐하며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삼하 6:13-14).” 기뻐하며 춤추며 찬양과 영광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지만, 동시에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9).” 그러나 분명히 주가 계시는 곳에는 복이 있다.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11).” 이에,
“너희는 내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22:31).”
우리가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는 것은 나의 의와 선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의지하면서 온전히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마 15:9-10).” 행여 오늘 우리가 성경을 세상 학문처럼 여겨 사람의 이해와 지식으로 공부하고 탐구하여 교훈을 얻으려한다면 이는 웃사의 뻗은 팔 같이, 좋은 의도로 시작하였으나 재앙의 결과로 어려워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사실 다양한 방식의 성경공부나 연구나 학습을 주의한다. 유행처럼 교회마다 번지는 이런저런 방식들이 더러는 불안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도 친구에게 자주 하는 말도 성경이 어렵고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함부로 한글 번역을 운운하고, 어디 성경이 더 낫네 옳으네, 판단하지 말 것을 주의한다. 그렇게 열심을 다해 누구는 스스로 영어로 재해석하고 나아가 라틴어도 공부하고 헬라어 히브리어까지 배우면서 바로 알고자 하는데… 나는 저들의 열심이 오히려 그들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한 해에 성경을 몇 번 정독하고, 여러 교재도 가지고 열심이나 그와 같은 열심이 저들로 머리는 커지고, 가슴은 냉랭하며, 삶은 형식적인 것 같아 조심스럽다. 얼마 전에도 무슨 일로 전화해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나한테 이러시는지 모르겠어!’ 하면서 대뜸 투덜거리는 거였다.
우리의 선하고 의로운 의도로도, 나름은 ‘수만 명의 백성’들과 ‘새 수레’로 한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웃사’와 같이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러기가 십상인 게 앞서 말한 것처럼 나름은 열심을 다해 한다고 한 사람들이 교회에 실망하고 사람에게 상처받았다며 신앙을 저버리는 경우가 흔하다. 보면 그저 무던히 겸손하게 제 자리를 지키는 사람보다 이리저리 열심을 다해 성경공부에서 교사로 성가대로 열심이었다가 팽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지나치게’ 그러하다 제풀에 걸려 넘어지는 꼴이다.
이때, ‘다윗이 분하였다’고 하는데 물론 웃사의 행위에 의해 분한 것인데, 지금껏 하나님을 신실한 태도로 온전히 섬기고자 했던 다윗으로 비추어 볼 때, 처음부터 이교들의 방식으로 ‘새 수레’로 옮기려 했던 것부터가 비극적이다. 이에 비로소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바른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이는 바른 경외심과 참 기쁨은 비례하는 것을 알게 한다. 안이하게 순간 방심하는 것이 우리의 소행이기는 하나, 그리하여 더욱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의 한 날의 첫 시간을 말씀 앞에 앉히는 것도 억지로라도 나를 쳐 복종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행여
“그러므로 내 백성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힐 것이요 그들의 귀한 자는 굶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라(사 5:13).”
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두려운 일인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이에 오늘도 말씀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
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시 97:1-2).
하실 때, 나의 날들이 매일 같아서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10).
그리하여,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11-12).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0) | 2025.04.22 |
---|---|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0) | 2025.04.21 |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0) | 2025.04.19 |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0) | 2025.04.18 |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0) | 2025.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