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전봉석 2025. 4. 19. 04:19

 

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삼하 5:4-5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시 96:9

 

 

결국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저는 항상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 앞서도 사울을 두 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고, 저를 죽여 이 날을 앞당길 수 있었다. 또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대치하듯 2년을 지체할 게 아니라 북 이스라엘을 평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헤브론에서 잠잠히 주를 바라였다.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신 16:20).”

 

오늘 내게 주시는 삶, 그 날에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것이 이와 같다. 이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 21:3).” 곧 우리의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삶에서 살아서 주의 정도를 걷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사 56:1).”

 

이제 이스라엘 온 장로들이 나아와 서로의 언약을 세운다.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삼하 5:3).” 이에 언약을 세우는 것은 왕위 즉위식 이전에 행하는 공식 행사로 이는 쌍방간의 합의에 의한 언약이 아니라, 일방적인 언약이다.

 

여기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에서 언약의 주체는 이스라엘 지파가 아니라 다윗이다. 이 언약은 일방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과 연관이 있다. 이는 앞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일깨운 것처럼,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삼상 13:14).” 한 것 같이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다윗을 삼으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고 왕으로 삼으신 언약은 다윗이나 모든 백성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단독적인 결정에 의한 ‘일방적인 언약’이다. 곧 이스라엘이 다윗 왕을 자기들의 왕으로 모시겠다고 하는 서약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순종을 맹세하는 언약이다.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을 왕으로 삼겠다고 맹세하므로, 그 나라에 큰 복을 베푸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언약은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충성하겠다는 서약이 아니고 그 반대로 백성들이 다윗에게 충성하겠다는 서약이다. 그렇게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았다. 다윗은 이렇게 하여 세 번의 기름부음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사무엘이 그리하였다.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 16:13).”

 

두 번째로는 유다 지파의 왕으로 세움 받을 때였다.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 (삼하 2:4).” 그리고 오늘 세 번째로 온 이스라엘이 모여 기름을 부었다.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5:3).”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있는 왕에게로 나아가니 헤브론에서 다윗이 그들과 여호와 앞에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전하신 말씀대로 되었더라(대상 11:3).”

 

이 날이 오기까지 다윗은 무던히 주만 바라였고, 그 오랜 기다림으로 주 앞에 단련되었다. 하여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다윗과 맺으신 그 언약이 하나도 어김없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 하여,

 

“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5:4-5).”

 

이로써 이제 유다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다시 하나가 되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왕 아래에 최초로 통일 왕국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다윗의 나이 30세, 이 나이는 레위인이 성전에서 봉사를 시작할 수 있는 나이였고(민 4:3),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나이였다(창 41:46).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나이이기도 하다(눅 3:21-23).

 

그리고 비로소 다윗이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천도(遷都)하였다. 이는 정치적, 지형적, 종교적인 이점들이 있다. 이때 헤브론은 유다의 중심 지역이지만 온 이스라엘로 볼 때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다. 따라서 예루살렘은 온 이스라엘을 치리하기에 좋은 중심부에 있었다. 예루살렘은 주위가 깊은 골짜기로 형성되었고 성읍 자체가 고지에 자리 잡고 있는 천혜(天惠)의 방어 요새였다. 예루살렘 동쪽은 기드론 골짜기로 기혼 샘이 있어 충분한 수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지였다. “또 아골 골짜기에서부터 드빌을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서 그 강 남쪽에 있는 아둠밈 비탈 맞은편 길갈을 향하고 나아가 엔 세메스 물들을 지나 엔로겔에 이르며 또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올라가서 여부스 곧 예루살렘 남쪽 어깨에 이르며 또 힌놈의 골짜기 앞 서쪽에 있는 산 꼭대기로 올라가나니 이곳은 르바임 골짜기 북쪽 끝이며(수 15:7-8).”

 

예루살렘은 두 지파 간의 심각한 갈등을 해소시키며, 더 나아가 온 나라의 화합을 도모할 수 있는 적합한 도읍지였다. 온 이스라엘의 중심부로 중앙 성소를 짓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신 12:5-7).”

 

이곳에는 여전히 ‘여부스 사람’들 곧 여부스 족속이 이 깊은 산간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이 골짜기가 깊고 험해서 다리저는 자나 맹인이 지켜도 이곳을 잃지 않을 정도의 천혜의 산성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예루살렘과 그 주변 산간 지역에 여부스 족속이 차지하고 있었고, 저들을 쉽게 몰아낼 수가 없었다. 이는 가나안의 대표적인 족속으로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민 13:29).”

 

또한 “또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올라가서 여부스 곧 예루살렘 남쪽 어깨에 이르며 또 힌놈의 골짜기 앞 서쪽에 있는 산꼭대기로 올라가나니 이곳은 르바임 골짜기 북쪽 끝이며(수 15:8).” 그러다보니 누구라도 함부로 공격할 수 없었고, 저들을 고립 시키려해도 샘이 저들 가운데 있어서 저들은 천혜의 요새에서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여호수아 당시 일시적으로 공격하였으나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였고, 사사시대에도 유다 및 베냐민 지파의 자손들이 쫓아내려다 실패하였다.

 

그렇게 해서 여부스 족속이 예루살렘까지 자신들의 방어기지로 삼은 것을 다윗에 의해 완전히 정복당하게 된 것이다.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다윗이 그 산성에 살면서 다윗 성이라 이름하고 다윗이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삼하 5:7-9).”

 

즉 예루살렘 주변에는 외적의 침입을 막아 주는 기드론, 힌놈, 두로베온과 같은 깊은 골짜기가 놓여 있다. 이와 같은 천혜의 방어 기지를 가지고 있어서,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8).” 하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이를 잘못 이해하면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로 들리지만 그만큼 천혜의 요새를 자랑하며 여부스 족속이 차지하고 있던 곳이라, 저들이 그와 같은 장애로 전쟁을 할 수 없는 처지라 해도 그곳을 차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다.

 

곧 여부스족들이 다윗을 조롱하기 위해 그리 외친 것으로 당시 예루살렘 성의 견고한 천혜의 요새를 과신하던 여부스인들이 자만하여 그리 조롱하듯 자신들을 공격하는 적군을 향한 언사였다. 그만큼 철옹성 같은 여리고도 함락시킨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권능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이래서 더욱 묵상이 필요하다. 억지로 풀거나 이해하려하기보다, 어제도 전날에 친구와의 통화에서 미진했던 성경을 설명하였는데 저는 여전히 말끔하게 이해가 안 간다며 시큰둥해했다. 나는 그래서 그리 놓아두라고 했다. 억지로 풀려하거나 이해하려하지 말고 그만큼, 더는 이해가 안 가면 안 가는대로 놓아두는 것도 지혜다. 이를 억지로 풀다 오히려 상식 이하의 수준으로 성경을 왜곡할 수 있다.

 

또한 의도적으로 자신들 교리나 교단의 뜻으로 해석하여 엉뚱한 의식이나 절차를 만들기도 하였던 게 사실이다.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는 바울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라서 몸에 유해를 가하여 죄를 회개하며, 임의로 읽어서 시집가는 것과 장가가는 것을 금하거나, 금식을 강요하거나, 시간과 장소에 억매이거나 하는 따위의 엉뚱한 의식이 성행하기도 한다. 실제 이와 같은 의식이 종교행위로 버젓이 오늘에도 이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여하튼 성경은 어렵다. 문자적으로만 읽어서도 안 되고, 상징과 은유로만 해석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어제 친구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개운하게 이해가 안 간다고 해서, ‘거기까지’ 하고 생각하기를 멈추게도 하였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듯 성령의 감동으로 읽혀야 한다. 말씀 앞에서 주의 지혜를 간구하는 것도 그 이유다. 아무리 아이라도 엄마를 알아보듯 그 느낌과 이해로도 충분하다. 아직 엄마의 나이도 혈액형도 모르지만 아이가 본능적으로 엄마를 알듯 우리에게 성경이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진다.

 

오늘 이 본문의 내용은 그와 같이 난해하여서 자칫 장애를 비하하는 냉소적인 표현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만큼 시온 산성은 요새란 뜻의 ‘시온’으로, 예루살렘 남동쪽에 자리 잡은 구릉(丘陵)의 이름이다. 이곳에 세워진 산성을 다윗이 빼앗아 ‘다윗 성’이라 이름하였다. 그리하여 시온은 예루살렘 전체를 묘사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하여 이곳이 타락하였을 때,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작거려 걸으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사 3:16).” 하며 저들의 죄성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슥 2:10)”

 

시온의 딸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칭한다. 이곳은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으로, “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사 24:23).” 하여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옵 1:17).” 하고 이곳으로 주의 영광을 삼으셨다.

 

결국 다윗은 수로를 타고 올라가 천혜의 요새 시온 산성을 함락시켰다. 수구는 배수로 또는 지하 통로인데, 예루살렘 남동쪽에 있는 기혼 샘에서 남쪽 저수지로 흘러 들어온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수직으로 파놓은 갱도를 타고 성 안으로 들어가 난공불락의 예루살렘을 점령할 수 있었다. 당시 지형적인 이점을 의지하고 교만하였던 여부스 사람들을 비꼬는 말로 “왕과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주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그들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삼하 5:6).” 그러나 결국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7).”

 

그렇게 하여,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10).”

 

그렇게 하여 우리의 삶이 드러나는데,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6-17).” 하시는 말씀이 이에 응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시 96:1-2).

 

이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4-5).

 

이를 인정하는 것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이어서,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