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에게 명령하매 곧 그들을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 가에 매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매장하였더라
삼하 4:12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시 95:6
하나님의 일은 더딘 것 같으나 정확하고, 점진적으로 성취하신다. 다윗과 대적하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그의 두 지휘관 곧 바아나와 레갑이 죽여 그의 머리를 다윗에게 바치려했다. 때는 이스보셋이 아브넬의 사망 소식으로 낙심하였는데, 이 틈을 타 저 둘의 장수가 반역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이스보셋 진영과 다윗 진영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지만 이스보셋이 개인적으로 앙심을 품고 다윗을 살해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저 두 장수가 자신들이 따르던 자의 목을 들고 와서,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아뢰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하니(8).” 나름은 다윗의 후한 보상을 바랐을 것이다. 자신들이 저지른 잔인한 범죄(5-7)를 마치 당연한 처사인 것처럼 찾아온 것이다.
오늘 본문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라 명시한다. 레갑과 바아나가 이스보셋이 ‘사울의 아들’ 임을 강조하는 것은 다윗의 일생에 사울이 죽이려 했다는 것을 알았다. 서로가 원수처럼 대척점을 이루고 있을 것이라 여겼다. 자신들의 판단으로 다윗이 사울 왕가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이 가득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은 착오였다.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9).” 하고 다윗은 저들을 상대하는 데 있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이른다.
다윗의 중심은 하나님께 있었음을 저들은 미처 몰랐다. 그래서 몇 차례 사울을 직접 죽여 보복할 수 있었으나 다윗은 그러지 않았던 것을 말이다. 곧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간의 의식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바아나와 레갑이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하니” 이는 저들의 판단이었고 전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언사였다.
나름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신념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속내는 보상을 바라고, 다윗에게 이스보셋의 목을 가져왔다. 곧 자신들의 범죄를 호도하는 데 있어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인 것이다. 이와 같은 얕은꾀를 마치 공정한 마음으로 한 것처럼 자신들도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이를 분명히 하여,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전에 사람이 내게 알리기를 보라 사울이 죽었다 하며 그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그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을 그 소식을 전한 갚음으로 삼았거든(9-10).” 즉 다윗은 먼저 ‘내 생명을 건지신 여호와’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두고 말을 이어간다. 그러니까 레갑과 바아나의 범죄 행위가 다윗의 생명 유지에 아무런 필요도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저 둘은 마치 다윗의 생명을 구한 듯 말하였기 때문이다.
다윗이 분명히 한 것은 자신을 지금까지 여러 환난 가운데서 그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누구의 도움’ 때문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바아나와 레갑이 알 리 없다. 설령 이스보셋이 다윗을 죽이려 했다 할지라도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위해 그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또한 다윗이 스스로 나서서 원수 갚으려 하지도 않았다. 저들은 이를 오해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신들의 행위를 무마하고, 나아가 어떤 보상과 보장된 미래를 상상하고 왔을 것이다.
다시 느끼는 것이지만 다윗이 위대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았다. 행여 우리가 생각하기에 더딘 것 같아도, 그래서 스스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을 때도 다윗은 자신이 나서서 주의 일을 앞당기려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오늘 이 내용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것으로, 하박국의 전언과 같이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우리는 더욱이 성경의 시대를 살고 있다. 말씀이 완성되어 늘 우리 손에 있다. 어제도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고 있을 때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침 새벽예배 때 들은 내용으로 다음 구절이 이해가 안 간다는 것이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막 14:25).” 그러면서 이 뜻이 무얼 의미하는지 물었다.
걷다가 전화를 받고 잠시 멈추어 말씀을 되새기며, 이 구절의 내용은 비유로 하신 말씀이고 그러므로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다양한 각도에서 묵상이 가능하겠으나 먼저는 성경에서의 ‘포도주’가 대체로 우리들로 세상을 향하게 하고, 향락을 즐기면서 음행에 사로잡히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까지 ‘포도주’나 ‘독주’와 같이 우리 마음을 혼미하게 하는 것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곧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계 17:2).”
그러므로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민 6:3).”
곧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삿 13:4).” 하여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고 내가 그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하니라(14).” 하고 이르시는 성경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유대와 팔레스타인 지역은 물이 귀하여 포도주를 물처럼 사용하기는 하였으나 과하면 이처럼 ‘술 취하는 자’로 만든다. 하여 이르신 내용이고, 또 다른 측면으로는 ‘포도열매’는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 인격으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1-2).” 그러므로 우리가 단번에 얻은 믿음으로 오직 한 길, 주의 나라를 사모하는 것에 집중할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대속의 제물’이 되어 그 피를 기념하는 것으로 이 내용을 비유로 하신 것이다. 즉 ‘단번의 속죄’로 당시 유월절 때는 항상 제사를 지내며 거듭 죄를 속량 받으려 제물을 바쳐야 했고 그 피를 흘려야 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이 구약의 율법과 제도가 완성되었음을 말씀하신 바 있다. 곧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9:30).” 하심으로 그의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 되었다.
하여 바울은 사랑을 전하면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그러므로 유월절 만찬으로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살과 피로, 우리가 이를 기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예수님의 살과 피로 우리들 또한 영원한 영생을 얻었음이다. 그러므로 ‘단번의 속죄’로 다시 또 우리의 죄 값을 속량하여야 할 필요가 없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다른 구속은 있을 수 없다. 즉 모세의 때부터 내려오던 ‘피의 구속’은 영원히 해결되었음을 알리시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는데 더욱이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이와 같은 묵상이 우리로 대속의 은총을 되새기게 하였다. 곧 예수님은 자기의 죽으심으로 더는 구속을 위한 다른 구원은 없음을, 그리하여 더는 포도나무에서 열린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하심으로 자신의 죽음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함께 나눌 영원한 만찬의 교제로 세워질 수 없음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이와 같은 말씀에서 저 두 사람, 이스보셋의 군지휘관 바아나와 레갑의 악행은 결코 선이 될 수 없음을 밝힌다. 곧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더하여 본문이 전달하면서 언급하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있는 ‘다리 저는 아들’ 곧 므비보셋에 대한 언급도 눈여겨보게 한다. 저는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에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하다 떨어뜨려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다윗이 저를 위하고 보살피는 내용으로도 알 수 있다. 곧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8-9).”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으로 나 같은 자로 주 앞에 서게 하시고 이 귀한 비밀의 말씀을 알게 하심에 감사하게 된다. 곧 우리는 사람의 얕은꾀로 사람을 의지하려는 두 인물, ‘이스보셋의 군지휘관 바아나와 레갑’의 속성이 우리 안에도 있음을 알게 된다. 이는 매우 작고 사소한 일처럼 사람을 의지하려는 마음인데, 그렇듯 서로가 무리를 짓고 당을 만들어서 서로가 하나인 듯 유대감으로 살려한다. 그러나 사람을 의지할 때 필연적인 결말은 낙심이다. 하여 성경은 여러 곳에서,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이는,
“환난 날에 진실하지 못한 자를 의뢰하는 것은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 같으니라(잠 25:19).”
하여 서로가 덫이고 올무일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전하였다.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까 하노라(출 34:12).”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넘겨주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신 7:16).” 그럼에도 우리는 살면서 사람이 사람을 의지하고 서로 위하여 섬기기를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것에 아무 거리낌이 없다. 그러나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수 23:13).”
하여 예수께서 우리의 대속 제물로 단 번에 주신 은혜로 우리는 이를 안다. 알면 알수록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하는 바울 사도의 간곡한 설교를 들어야 한다. 곧 우리의 믿음이란 믿으면 믿을수록 더욱 확실히 부여잡게 하는 것이라, 대부분은 마치 믿음으로 구원 받고 천국 가는 것으로 전부인 줄 알고 ‘이미 얻었다’ 혹은 ‘온전히 이루었다’ 하는 식으로 자신의 믿음과 확신을 신념으로 붙든다.
그러나 바울은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3-14).” 하고 우리의 가야 할 길이 남았음을 일깨운다. 이는 불신앙으로 인한 믿음 없음이 아니라, 그 귀하고 귀한 은혜를 알면 알수록 더욱 더 바라는 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그러므로 더욱 힘써야 할 것은 오늘 우리 안의 ‘레갑과 바아나’와 같은 속성이 외쳐 전하는 것이다. 곧 우리의 신념이 마치 저들의 착각 같아서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하니(삼하 4:8).” 그렇듯 마치 자신들은 다 이룬 줄 알고 사는 믿음 같지 않은 믿음으로의 얕은꾀로 ‘또 다른 구속’을 찾는 게 어리석다. 이를 더욱 확고하게 하여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심으로 오늘도 말씀 앞에 앉힌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시 95:1-3).
이와 같이 시편을 살면서 오늘도 주어진 한 날을 더하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8-19).” 곧 삶이 신앙이고 신앙은 믿음으로 더하여져,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5-6).” 이에,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6).
그리하여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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